소설리스트

172화 (172/196)

3 화

소중한 친구가 사랑싸움을 벌여 마음이 아프니, 공작 부인을 위로해 주는 것이 친구의 본분이 아니겠느냐는 말이었다.

“솔직히 황제께서는 그냥 놀고 싶으셨던 게 아닌가요?”

그 당시의 일을 회상하던 이엘리는, 침대에 대자로 누운 채 쿠키를 갉작이던 황제를 밉지 않게 흘겨보았다.

이엘리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황제는 붙임성 좋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머나, 들켰나요?”

“솔직히 저희가 싸운 게 뭐라고, 황제 페하께서 휴가까지 선언하시나요?”

“당연히 아주 중요하죠.”

황제는 부러 두 눈까지 동그랗게 뜨며 이엘리를 마주 보았다. 황제의 입술 끝이 씰룩 거렸다.

“제국 최고의 귀족 가문이자 공신인 헤센바이츠 공작가에서 벌어진 다툼이잖아요?”

“……”

"공작과 공작 부인의 분란이라니, 당연히 황제로서 중재해야 마땅하 죠.”

완전히 헛소리라는 것을 아는데, 저렇게 진지한 얼굴로 말하고 있으니 어쩐지 설득될 것 같았다.

정말, 제위에 즉위하시고는 혀만 더 매끄러워 지셨다니까. 이엘리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렇다고 저희 사이를 중재해 주신 것도 아니었잖아요.”

“뭐, 그건 그렇죠.”

황제가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침대에서 데구루루 한 바퀴 구른 황제가 씩 눈웃음을 쳤다.

“어차피 사랑싸움은 끼어들어 봤자 본전도 못 찾는걸요.”

“폐하, 정말.”

“제가 뭐라고 하건 간에, 공작과 공작 부인은 당장 내일 화해한다는 데에 금화를 걸죠.”

“이거 사행성 조장이예요?”

이엘리가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그때쯤, 오렌지주스를 모두 마신 론 도 영애가 끼어들었다.

“그러고 보니 두 분의 금슬이 엄청 나게 좋다는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네?”

두 눈을 깜빡이던 이엘리의 양 뺨이 살짝 붉어졌다.

금슬이 좋다, 라. 물론 그들의 금슬이 좋은 편이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소문이 날 필요는 없잖아.

그리고 달아오른 공작 부인의 얼굴을 바라보던 두 여자가 슬쩍 시선을 맞춘다.

이거, 잘 하면 재미있는 얘기를 들을 수 있겠는데?

"한번 얘기 좀 해 주세요.”

“맞아요, 제국 최고의 금슬을 가진 부부는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요.”

황제와 론도 후작 영애가 나란히 이엘리를 채근했다. 실제로 궁금 하기도했다.

제 아내를 지극히 사랑하다 못해 북부에 봉쇄령까지 내릴 정도의 공작이었다. 그런 공작이 공작 부인을 어떻게 대하는지, 많이 사랑해 주는 지.

공작 부인은 공작과 함께하여 행복 하게 살고 있는지.

하지만 두 사람이 꼬치꼬치 캐묻는 이유는, 단순한 호기심 뿐만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공작 부인은 내 소중한 친구니까.’

그 생각이 황제와 론도 후작 영애의 공통적인 마음이었다.

그래도 황제와 후작 영애는 두 사람 모두 제도에서 살기에, 서로 연락을 자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공작 부인은 저 멀리 북부에 머무르고 있었고,  북부와 제도사이에는 상대적으로 연락이 적을 수밖에 없다.

친구가 행복하게 살고 있다, 이런 막연한 풍문을 접하는 건 좋다. 하지만 당사자에게 직접 듣고 싶었다.

“공작께서는 공작 부인께 잘해 주 시나요?”

“어, 그, 그게.”

어쩌다 분위기가 이런 식으로 몰렸지? 그렇지 않아도 붉었던 이엘리의 얼굴이 점점 더 새빨개졌다.

점점 이엘리의 고개가 아래로 향하는 모습을 보며, 두 여자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자, 잘해 주기는 하는데요……”

이엘리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평소 이엘리는 분위기를 몰아가는 쪽 이었지, 분위기에 휩쓸리는 쪽이 아니었기에 더욱 그랬다.

하지만 이제 두 여자는 그녀를 놀릴 마음이 만만해 보였다.

"어떻게 잘해 주시나요?”

“아침 식사도 침대로 갖다 주시나요?”

호기심 가득한 후작 영애의 말에 이엘리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건 ‘잘해 준다’의 축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그건 이엘리의 기준이었을 뿐, 제국에서 ‘남편의 다정함을 과 시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바로 아내에게 아침 식사를 침대로 직접 가져다주는 거였다.

“네, 그건 자주 그래요.”

그 대답을 들은 두 여자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이엘리는 ‘당연한 일인데, 왜 저렇게 흐뭇한 얼굴을 하고 계시나’라고 생각했지만. 황제와 론도 후작 영애 가 이엘리를 채근하기 시작했다.

“더 자랑해 봐요.”

“저희도 이야기를 들으면서 대리만족을 하고 싶거든요.”

고작이 이야기로 대리만족을 할 게 있나? 남들이 들으면 배부른 소리를 한다고 타박할 만한 생각을 하면서, 이엘리는 약간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잠시 후, 이엘리가 입을 열었다.

“세심하고 다정해요.”

세심하고 다정하다고? 순간 황제와 론도 후작 영애의 표정은 애매해지고 말았다.

과연 ‘세심’과 ‘다정’이 헤센바이츠 공작과 어울리는 단어였던가.

차라리 ‘무뚝뚝함’과 ‘냉정함’, ‘칼 같음’같은 단어가 훌씬 더 어울리지 않나.

하지만 이엘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제가 원하는 것을 끝까지 지지해 주고, 여자라는 이유로 가로막지 않는 것도 좋아요.”

두 여자의 얼굴은 이제, 납득과 혼란이 뒤섞인 모호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헤센바이츠 공작, 그 냉혈한 이?’란 혼란과 ‘하긴, 그래도 공작 부인이 대상이니까…….’라는 납득이 엉망으로 섞였다.

별생각 없이 말을 이으려던 이엘리가 멈칫하여 두 여자를 마주보았다.

“……저기, 왜 그런 표정을 하고 계세요?”

“아니, 아니예요.”

두 여자는 동시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엘리는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긴 했지만, 우선 이야기하는 것에 집중 하기로했다.

그의 장점이란, 사실 이야기하기 아주 쉬웠다. 무척 많았으니까.

“애정표현도 모자람 없이 해 주고, 제가 좋아하는 것을 모두 기억해 주고요.”

그랬다. 그의 애정표현은 언제나 차고 넘쳐서, 이엘리는 자신이 엄청난 사랑에 파묻혀 살아가는 것 같은 행복감을 느꼈다.

그녀가 가족들을 떠나 북부에 온 이래로, 단 한 번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자카리가 곁에 있어서였다.

그는 말 그대로 무한한 애정들을 보여 주었다.

‘이엔은 단 음식을 좋아하니까.’

함께 식사 한 번을 할 때만 해도 그렇다.

당연하다는 것처럼 설탕과 잼 등, 갖가지 달콤한 간식들을 그녀 앞에 밀어주며 부드럽게 웃는 자카리.

그녀의 모든 일상에 자카리의 애정이 배어있었다.

"사소한 것 하나하나를 배려해 줘요, 그 배려가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로요.”

이렇게 그의 장점을 하나하나 이야기하다 보니, 이엘리는 약간 양심이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자카리는 이렇게나 자신을 배려하고 있는데, 그녀는 그가 원하는 단 하나의 것조차 제대로 이루어 주지 않고 있지 않나.

이엘리의 기분을 살피던 자카리가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건네던 말이 떠올랐다.

‘이엔, 나와도 좀 시간을 보내 주면 안 돼?’

그런 자카리를 향해, 이엘리가 한 대답은 고작 ‘어린애처럼 굴지 마’ 가 아니었나.

이제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자신 이 심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엘리는 곰곰이 생각에 빠진 채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도 제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인 것처럼 웃어 줘요.”

두 여자는 서로를 다시 마주보았다. 역시 공작은 공작 부인에 한해, 세계 최고의 순정남인 것이 분명하 다.

그러던 중, 황제의 표정이 약간 음 흉해졌다. 황제가 목소리를 낮춰 입을 열었다.

“공작 각하께서는 낮에도 제국 최고의 기사이시니, 밤에도 역시……”

“화, 황제 폐하!”

까아,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엘리는 기겁하여, 론도 후작 영애는 환호를 하여 터뜨린 소리였다.

이엘리는 어쩔 줄 몰라 고개를 홱 돌려 버렸고, 후작 영애는 황제의 장단을 맞춰 주었다.

“우리들끼리만 있으니 한번 얘기해 봐요, 밤은 어떠신가요?”

"항상 즐거우시겠죠?”

두 여자의 집요한 질문에, 이엘리는 어쩔 줄 몰라 시선을 돌렸다. 자카리와 보내는 밤.

쾌락과 쾌감에 휩쓸려 온몸이 녹진하게 녹아내리는 것 같은 그 감촉.

그와 함께하는 순간들을 어떻게 다 설명할 수 있을까. 이엘리는 결국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 좋아요.”

이것만큼은 거짓말을 칠 수 없었다. 자카리와 함께하는 밤은 그만큼 행복했으니까.

서로가 단단히 연결되어있다는 그 안락함을 어떻게 모두 표현할 수 있을까.

육체의 쾌락만큼 정신적인 안도감도 굉장히 컸다.

물론 자카리의 건강한 체력에 비하자면 이엘리는 한참 약해서, 좀 힘들긴 해도…….

여기까지 생각하던 이엘리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절레절레 내 저었다.

세상에,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어떻게 좋으신 거죠?”

“궁금하네요, 정말.”

말꼬리를 늘이며 두 여자는 이엘리를 실컷 놀려 댔다. 이엘리가 어쩔 줄 몰라 언성을 높였다.

"그, 그만 좀 하세요!”

두 여자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혀끝을 깨물어 삼켰다.

평소 말 한 마디 지지 않고 당차 게 맞받아치던 공작 부인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어뜨리는 그 모습 이 너무 귀여웠다.

“그럼 이제 곧 헤센바이츠의 후사를 볼 수 있는 건가요?”

황제가 능글맞은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화들짝 놀란 이엘리가 파드득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그건!”

“그렇잖아요, 헤센바이츠 공작가는 대대로 손이 적은 가문이니까요.”

하지만 황제는 아주 당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론도 후작 영애가 그 말을 거들었다.

"아마 공작께서도 후사에 대해 일 정 부분 생각하고 계시지 않을까요?”

어라, 그러려나? 이엘리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러고 보니 자카리와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제대로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지금껏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짚어준 기분이었다.

‘한번 제대로 대화해 볼 필요는 있는 것 같아.’

후계자라. 확실히 헤센바이츠 공작가는 후손이 적은 집안이었다.

애초 은룡의 힘을 버티면서 태어날 수 있는 아이들이 적었기에, 배 속에서 사산되거나 혹은 전대 공작처럼 일찍 사망하게 됐던 것이다.

물론 이엘리와 자카리가 만남으로 써 그 힘들은 이제 사라질 테지만, 어쨌든.

‘힘이 사라지는 건 둘째 치고, 대를 이어야 자손이 번성하든 말든 할 거 아냐.’

자손이 번성한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다시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까, 아이를 가 지려면 자카리와 함께 수많은 밤을 보내야 한다는 거지.

지금도 많은 밤을 보내고 있긴 하지만, 지금보다도 더...

저절로 심장이 거세게 뛰어서, 이엘리는 손을 들어 가슴을 꾹 눌렀다.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쉬자 두 여자가 이엘리에게 다시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을 하기에 그렇게 얼굴이 붉어지신 건가요?”

“맞아요, 결혼생활 선배로서 뭐라도 말씀을 좀 해 보세요.”

“아, 다들 그만 좀 하세요!”

결국 이엘리는 와락 목소리를 높여 버렸다.

두 여자가 키득키득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고, 이엘리는 붉어진 얼굴을 쉬이 가라앉히지 못했다.

결국 이엘리는 패배 선언을 해야만했다.

“못 살아, 정말. 전 바람이라도 좀 쐬고 와야겠어요!"

“그러세요, 그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