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화
술 한 잔으로 저렇게까지 망상이 폭발할 수 있다니, 얼마나 안주인 마님을 사랑하면 저러는 것인가.
“걱정 마십시오, 안주인 마님께서 그러실 리 없다고 생각합니다.”
부부싸움에 술이 끼얹어지면, 어디까지 망상이 뻗어 나갈 수 있나 실시간으로 보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런 말씀은 안주인 마님께 직접 하시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결국 마르텔 경은 한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테이블에 눌어붙어있던 공작이 순간 눈을 번쩍 치켜떴다.
몸을 곧게 세운 공작은 눈에 불을 켜고 마르텔 경을 마주 보았다.
“정말로 이엔이 그렇게 생각 안 할거라고 여기나?”
“예, 그럴 것 같습니다만.”
지금껏 마르텔 경이 체감한 바, 안 주인 마님은 그렇게 째째한 분이 아니셨다. 오히려 관대한 쪽에 가깝지.
거기다 공작 부부의 금슬을 곁에서 보고 있자면, 공작 각하께서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다는 게 바로 눈에 들어온다.
그러자 내내 흐릿했던 공작의 시선에 총기가 돌았다.
“안 되겠군.”
그렇게 말한 공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약간 비틀거리긴 했지만, 그럼에도 들이켠 술에 비하면 자세는 놀라우리만치 곧았다.
화들짝 놀란 마르텔 경이 자신도 엉거주춤 일어났다.
“저, 공작 각하?”
"지금 이엔을 데리러 가야겠어.”
"예?”
도대체 이게 몇 번째로 ‘예?’라고 되묻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마르텔 경은 진지한 현실 자각의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존경하는 주군께서는 정말로 안주인 마님을 데리러 갈 기세였다.
“그, 그렇게 술에 만취하셔서요?!”
아니다, 이건 정말 아니야. 마르텔 경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다음날 조간신문에 ‘헤센바이츠 공작, 밤늦은 시각 론도 후작가의 타 운하우스에서 진상을 부리다’라는 기사가 헤드라인으로 박힐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주군을 만류하기 위하여, 마르텔 경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각하, 그렇게 가시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뭔가 문제라도?”
자카리가 비스듬히 시선을 꺾어 마르텔 경을 돌아보았다.
비딱한 푸른 시선은 ‘네가 뭔데 내 앞길을 가로막아?’ 란 종류의 뜻을 품고 있었다. 마르텔 경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외쳤다.
"공작 부인께서 싫어하실 겁니다!”
“……이엔이?”
그 말을 듣는 순간, 공작은 잔뜩 혼난 강아지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마르텔 경은 진심으로 안도했다. 안주인 마님, 앞으로도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마르텔 경이 애써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내일 아침 일찍 찾아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지만, 늦게 사과했다고 혹시라도 화를 풀지 않기라도 한다면……”
“그럴 리 없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제가 안주인 마님을 설득하겠 습니다!”
기사단장이 안주인 마님을 설득하는 데 무슨 재능이 있겠냐마는, 마르텔 경은 당장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우선 입부터 움직였다.
다행히도 주정뱅이는 평소라면 절대 넘어가 주지 않을 그 어설픈 설득에 넘어가 주었다.
정확히는 '안주인 마님’이라는 단어가 가진 마력 때문이겠지만.
비틀거리는 주군을 부축하며 마르텔 경은 몇 번이고 쉬었던 한숨을 다시 한 번 내쉬었다.
‘젠장, 다시는 주군을 모시고는 술 안 마신다.’
이런 고생은 오늘 하루만으로도 충분했다. 마르텔 경은 피곤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 * *
그리고 같은 시각, 밤이 이슥한 시간. 이엘리와 황제, 그리고 론도 후작 영애는 론도 후작가의 타운하우스에 옹기종기 모인 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세 여자 모두 잠옷 차림으로 침대에 뒹굴면서, 옆에는 과자 접시와 음료수까지 놓아둔 본격적인 모습이었다.
이엘리는 과자 그릇에 손가락을 쏙 넣으며 초콜릿 쿠키를 하나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아작아작 야무지게 베어 문다.
“자카리, 정말 웃기지 않아요?”
잠시 후, 초콜릿 쿠키 조각을 삼킨 이엘리는 뾰로통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옆에서 오렌지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 있던 론도 후작 영애는, 쿡쿡 소 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그만큼 공작께서 공작 부인을 사랑하시는 게 아닐까요?”
“아니, 저도 그게 싫다는 건 아니 지만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이엘리는 씩씩 숨을 몰아쉬었다. 이엘리가 언성을 높였다.
"제가 오죽하면 가출을 했겠느냐 이 말이예요!”
정확히는 행선지를 밝히고 나갔으니 합법적 외박이나 다름없긴 하지만.
이엘리는 새침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뭐 어때, 나에게는 이번 일 자체가 가출이나 다름없다고.
“전 지금까지 무조건 잠은 타운하우스에 돌아와서 잤는걸요.”
“아하, 그러셨군요.”
현 황제, 안네로제는 빙그레 눈웃음을 지을 따름이다.
그 웃음은 마치 ‘그래, 너희 사랑 싸움이 좀 유난이긴 하지’라는 뜻을 품고 있는 것 같아서, 이엘리는 어딘지 모르게 무척 억울해졌다.
"다들, 제 얘기를 진지하게 듣고 계시지 않는 거죠?!”
"아뇨, 진지하게 들었어요.”
론도 후작 영애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녀는 어린 소녀처럼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공작 부부께서 사랑싸움을 하셨다, 이거 아닌가요?”
“아니예요!”
이엘리가 반쯤 울상이 되어 항변했다. 그러나 황제와 론도 후작 영애는 서로에게 곁눈질을하며,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그저 억누를 뿐이었다. 이엘리는 억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어쨌든 정리하자면, 공작 부인께서는 공작과 다투시고 뛰쳐나오신 거잖아요.”
“맞아요, 바로 그거예요!”
“그리고 그 다툰 이유는, 공작께서 자신과 시간을 보내지 않는 게 질투가 나서……”
거기까지 요약하여 말한 황제는 결국 큭큭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엘리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제국 최고의 금슬을 자랑하는 공작 부부가 사랑싸움을 하게 된 연유는, 정리하자면 대충 이러했다.
공작 부부는 아주 오랜만에 제도에 올라왔다.
일에 파묻혀 있던 공작 부부를 보다 못한 사람들이, 두 분 모두 휴식을 취하시는 편이 좋겠노라 진언을 올렸기 때문이다.
‘그래? 공작 부인께서 제도에 올라 왔다니.’
‘오랜만에 오셨으니, 저희 살롱에도 참석해 주실까요?’
‘문화계 전반에 조예가 깊으신 공작 부인이시니, 조언을 몇 마디 구하면 참 좋을 텐데요.’
공작 부부가 제도에 도착했다는 소식에, 제도는 조금 술렁거렸다. 무엇 보다도 두 사람은 제국 최고의 귀족 이자,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널리 끼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엘리가 그러했다. 문화 쪽에 관심이 많은 이엘리는, 여러 티 파티와 살롱에 초대받았다.
‘이엔, 많이 바빠?’
‘응? 아, 생각보다 초대장이 많이 오네.’
이엘리는 쌓여 있는 초대장을 살펴 보며 난감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오랜만에 제도에 올라왔으니, 공작가의 안주인으로서 최소한의 사교 활동은 해야했다.
중요한 약속만을 추렸는데도 근 일주일은 자카리의 얼굴을 거의 보지 못할 정도로 바빴다.
게다가 소중한 친구인 황제와, 론도 후작 영애도 한 번쯤 만나야했다. 그런 약속들을 잡으니 시간이 까마득히 흘러갔다.
‘편지는 누구한테 쓰는 거야?’
‘아, 론도 후작가에 보내는 거야. 한 번쯤 얼굴을 보자는 약속을 잡으려고.’
‘….그렇구나.’
문제는 불퉁한 얼굴이 된 자카리였다. 자카리는 냉정한 성품 때문에 친구도 많이 사귀지 않으며, 친구를 필요로 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자카리는 정말로 아내만 곁에 있었으면 상관없었기에, 아내의 그런 바쁜 생활을 바라보며 내심 토라지기 시작했다.
스스로가 어린애 같다고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이상하게 이엘리의 문제만 되면 이성적으로 행동하기가 어려웠다.
‘이엔, 나와도 좀 시간을 보내 주면 안돼?’
그리하여 자카리는 저도 모르게 불쑥 그렇게 질문해 버렸다. 막 편지를 접어 편지봉투에 넣던 이엘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카리는 뾰로통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그런 그는 역시…….
‘귀여워!’
두 사람은 금슬 좋은 부부였고, 서 로에게 콩깍지도 단단히 낀 상태였다.
어딘지 모르게 뚱한 얼굴이 된 자카리를 바라보던 이엘리는, 상황의 심각함을 인지하지 못하고 ‘우리 남 편, 오늘도 무지하게 귀엽다’라고만 생각했다.
그랬기에 이엘리는, 해서는 안 될 말을 해 버렸다.
‘지금도 충분히 보내고 있는 것 아니었어?’
물론 그녀는 반쯤 장난이었다. 하지만 자카리에게는 그렇게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이엘리와 보내는 시간이 모자라다고 생각하는 자카리였는데, 마치 이엘리는 그와 보내는 시간 자체가 줄어들어도 상관없다고 말하는 것 같지 않은가.
자카리는 불퉁한 얼굴로 답했다.
‘이엔, 넌 나랑 다른가 보네.’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막 편지에 밀랍을 녹여 봉하던 이엘리가 슬며시 미간을 좁혔다. 자카리가 고개를 기울였다.
‘난 너와 매일매일 시간을 보내도 모자란데, 넌 다른 사람이 더 소중 한가 봐.’
‘그럴 리가 없잖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문제는, 모난 말투를 듣던 이엘리도 슬슬 기분이 상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녀가 말했다.
‘내게 있어 가장 소중한 사람은 바로 너야, 알잖아?’
‘그런데 왜 자꾸,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려 해?’
아, 이러면 안 된다. 저도 모르게 말을 내뱉은 자카리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엘리는 제국 유일의 공작 부인이고, 마땅히 자신에게 어울리는 사교 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그도 알고 있었다.
아는데, 자꾸만 말이 뾰족하게 튀어나온다.
이엘리가 두 눈을 가늘게 치켜떴다.
‘빈정거리지 마. 내가 일부러 그러는 것도 아니라는 거, 알면서.’
‘그깟 사교 활동이 중요해, 내가 중요해?’
‘세상에, 그런 말 엄청나게 유치하다는 거 알지?’
탁 소리 나게 편지를 내려놓은 이엘리가 몸을 돌려 자카리를 쏘아보았다.
이런 유치한 싸움에서는 한쪽이 유연하게 넘어가야 하는데, 상황이 좋지 못했다.
이엘리 또한 북부의 안주인답게 한 성격했던 것이다.
수많은 귀부인들과 살롱에서 다뤄오던 매끄러운 혀가 말을 내뱉었다.
‘자꾸 어린애처럼 굴래?’
그 말이 기폭제였다. 두 사람은 옥신각신 말다툼을 벌이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유치한 다툼을 벌이고 있다는 것도, 점점 말도 안 되는 자존심 싸움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럼에도 가끔씩, 그런 사실을 알 면서도 어쩔 수 없이 진행하고 마는 싸움이 있었다. 이게 그랬다.
‘안 되겠다, 자카리.’
그리하여 이엘리는 얼음장 같은 얼굴로 선언하고 말았다. 자카리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이대로 있어 봤자 말다툼만 계속 지속되고, 서로 감정싸움만 할 거 아냐.’
이엘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순간 당황한 자카리가 어쩔 줄 몰라 입술을 당겨 물었다.
‘오늘은 론도 후작가의 타운하우스에서 잘게.’
‘이, 이엔?’
‘지금은 네 얼굴 보고 있으면, 더 화가 날 것 같으니까.’
그렇게 말한 이엘리는 곧장 공작가의 타운하우스를 빠져나온 것이다.
그리고 황제 안네로제는, 공작 부부의 불운한 소식을 론도 후작 영애의 편지를 통하여 알게 되었다.
그러자 황제는 금일 휴가를 선언하고 공작 부인과 시간을 보낼 것을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