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0화 (170/196)

<외전>

1 화

밤이 어둑한 시간, 제도에 위치한 공작가의 타운하우스.

무려 주군과 단둘이 마주한 마르텔 경은 현재, 아주 희귀한 광경을 목격하고 있었다.

십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이런 광경의 유일한 목격자가 되는 건 사양인데 말이지.’

마르텔 경은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간신히 펴는 데에 주력했다.

그때, 마주 앉은 헤센바이츠 공작이 번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언제나 새파랗게 날이 서 있던 푸른 눈동자는 묘하게 풀린 채였고, 얼굴에는 열은 홍조가 돌았다.

순간, 마르텔 경은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간신히 삼켰다.

“그러니까 말일세.”

그래, 친애하고 존경하읍는 주군께 서는 현재 만취해 있었다.

느릿하게 늘어지는 말끝을 들으면서, 마르텔 경은 치솟는 피로감에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어쩌겠나, 갑 은 공작인 것을.

“우리 이엔이……”

공작은 손에 쥔 술잔을 흔들면서 마르텔 경을 마주 보았다. 푸른 시선이 술기운에 느른했다.

“글쎄, 나에게 화가 났다면서.”

공작은 세상 모든 억울함을 끌어안은 것처럼 미간을 구겼다. 그의 목소리가 저절로 높아졌다.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단 말일세!”

“아, 예……”

도대체 몇 번이나 저 말을 들었는 지 모르겠다.

하긴, 술주정뱅이가 같은 말을 반 복하는 건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니까.

마르텔 경은 해탈하는 심정이 되어 주군의 술주정을 한 귀로 흘렸다.

‘이 술자리는 도대체 언제 파할 것 인지 알 수가 없군.’

그렇게 생각하던 마르텔 경은 눈앞 이 깜깜해지는 기분을 맛보았다. 이 일의 시작은 대충 이러했다.

공작 부부는 오랜만에 공작령을 벗어나 제도에 왔다. 근래 일이 상당히 바빴으니, 휴식 겸 기분 전환을 위해서였다.

그런데 기껏 제도로 올라온 공작 부부는 부부싸움을 벌인 것이다.

‘무척이나 금슬이 좋으신 분들이신 데, 어쩌다 싸움이 나신 거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기에, 마르텔 경은 그저 답답할 따름이었다.

공작은 공작 부인에 한해서 세상 모든 귀한 것들을 안겨 주기라도 할 것처럼 열렬한 애정을 보였고, 공작 부인 또한 공작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솔직히 싸울 일도 별로 없을 것 같은데, 어느 날 아침 두 사람은 찬 바람이 쌩쌩 부는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후, 공작 부인은 타운하우스를 나가 버렸다.

‘오늘은 론도 후작가의 타운하우스에서 잘게.’

이런 말만 남긴 채 말이다. 공작 부인의 초유의 가출 사태에, 공작가의 사람들은 모두 혼란에 빠져 있었다.

평소라면 공작 부인을 붙들고 늘어 졌을 공작은 어딘가 부루퉁한 얼굴이 되어 방구석에 틀어박혔다.

공작가의 분위기를 온화하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공작 부인이 사라지자, 공작가의 타운하우스는 썰렁해지고 말았다.

마르텔 경은 힐끔 공작을 곁눈질했다.

‘그런데……’

그날 저녁, 공작은 거의 죽을상이 되어서 마르텔 경을 찾아왔다. 그러고는 불쑥 한다는 말이.

‘마르텔 경, 술 한잔하겠나?’

‘예? 술 말입니까?’

‘그래, 술 말이야.’

충성스러운 기사인 마르텔 경은 주 군의 명령을 거절하지 못했다.

마르텔 경을 앞에 앉혀 둔 공작은, 마치 타운하우스의 모든 술을 거덜 낼 것처럼 술을 마셔 댔다.

어째서 저렇게 술을 마시는 건지 가타부타 말조차 없었다. 그 이후, 술에 잔뜩 취해서야 입을 열기는 했는데.

“그건 그렇고, 마르텔 경.”

“예, 말씀하십시오.”

지겨운 얼굴이 된 마르텔 경이 한숨을 섞어 대답했다.

후우, 한숨을 내쉰 자카리가 이마를 짚었다.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채 마르텔 경을 올려다본다. 그러고는 불쑥 말을 내뱉었다.

“우리 이엔이 얼마나 예쁜지 아 나?”

아니, 차라리 부부싸움을 한 이유 라도 알려 주시지 그러십니까! 마르텔 경은 그렇게 항변하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지금 상황이 뜬금없는 안주인 마님의 자랑을 할 때입니까?!

“……북부인들 중에서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공작의 입술 위로 천천히 미소가 번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마르텔 경은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제 아내를 아끼다 못해, 북부에 한때 봉쇄령까지 내렸던 그였다.

그런 공작 밑에서 살면서, 공작이 공작 부인에게 얼마나 큰 의미를 두 고 있는지 모른다면 오히려 그게 머 저리일 터.

‘물론 안주인 마님은 응당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분이시지만.’

마르텔 경은 다시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엘리 헤센바이츠, 공작가의 현 안주인인 그녀는 공작가 사람들의 모든 애정을 한몸에 받고 있는 사람

이었다.

모든 사람들을 공평하게 대하고, 다정하게 웃어 준다. 일 처리 또한 꼼꼼하며, 열정적으로 영지를 보살 폈다.

공작성의 모든 사용인들보다 늦게 잠들고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 바로 안주인 마님이었다.

안주인 마님께서 공작성에 오신 후, 공작성의 분위기는 무척 온화 해졌다. 그래, 안다. 우리 안주인께 서 얼마나 대단한 분이신지.

그러니까.

'안주인 마님의 대단함은 모든 북부인들이 잘 아니까, 이제 그만 좀 주무셨으면 좋겠는데.’

듣기 좋은 꽃노래도 삼세번이면 지 겹다고 한다. 마르텔 경은 공작의 팔불출에 질린 상태였다.

그때 공작이 정색하며 입을 열었다.

“그냥 예쁜 게 아니라, 세상에서 제일 예삐.”

“예, 압니다……”

“게다가 엄청나게 똑똑하고, 사랑스러워.”

공작은 주절주절 말을 이었다. 이제 마르텔 경은 저 술주정에 대답조차 해주기 싫어졌다.

“내 아내만큼 완벽한 사람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란 말일세.”

마르텔 경은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자, 자카리가 술잔에 남은 술을 쭉 들이켰다.

“그런데 그런 이엔이 나한테 화를 냈단 말일세!”

광! 술잔을 내려놓은 자카리는 거의 울먹거리는 얼굴이 되어 마르텔 경을 마주 보았다.

마르텔 경은 이제 황망해지고 말았다.

테이블 위에 굴러다니는 술병의 개 수를 보면 만취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아무리 술기운이 한껏 올라 있어도 그렇지, 그 얼음 같던 주군 이 저렇게 억울함이 가득한 표정을 하고 있는 건 도무지 적응이 가지않았다.

마르텔 경은 그저 혼란스러웠다.

'아니, 안주인 마님. 도대체 무엇 때문에 싸우신 겁니까!’

이럴 때 주군을 진정시킬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안주인 마님뿐인데……!

공작은 마치 눈물을 뚝뚝 흘릴 것처럼 처량맞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결국 마르텔 경은 무난한 대답을 내어놓았다.

“그게…… 예, 마음이 많이 상하셨겠습니다.”

“그래, 내가 이엔의 행동을 너무 제약하려 하긴 했지.”

후우, 긴 한숨을 내뱉은 공작이 턱을 괴고 고개를 기울였다. 그 눈빛이 새삼 서글프게 보인다.

“내가 잘못했어. 알아, 아는데 말이야……”

아, 이제야 두 분이 싸우신 이유를 말씀하시려나? 마르텔 경은 슬슬 공작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도 이엔이 다른 사람과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가 마음에 안 든단 말일세!”

“……예?”

순간 마르텔 경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건 또 무슨 말씀이시지?

안주인 마님이 다른 사람과 시간을 보낸다고 해 봐야, 몇몇 귀부인들과 티타임을 가진다거나 하는 소소한 교류뿐이었다.

물론 오랜만에 제도에 올라왔으니, 지금껏 얼굴을 보지 못했던 귀부인들과 자주 시간을 갖긴했다.

상대적으로 공작 각하와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기는 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설마 정말로 그런 유치한 질투를 하신 건가?’

아니야, 설마 그건 아닐 거야. 마르텔 경은 필사적으로 표정을 가다 듬었다.

안 돼, 이러다가는 주군께 갖고 있는 존경심이 줄어들 것만 같아! 광대한 헤센바이츠를 완벽하게 다스리

고 계시는 공작 각하.

자카리는 완벽한 가주이자 제국 최고의 기사였으며, 또한 모든 북부인 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존재였다. 그런 휘광처럼 드리워졌던 주군에 대한 환상이 깨져 버리려고 한다.

“이엔의 시간을 남편인 내가 독점하고 싶다는데, 어?”

하지만 어떻게든 현실을 외면하고자 하는 마르텔 경의 노력은 아쉽게 도 헛수고가 되었다.

저렇게까지 말씀하시는 것을 보아 하니, 안주인 마님께서 공작 각하와 시간을 보내지 않는 게 질투가 나신 것이 분명하다.

차마 마님께는 따지지 못하고 만만한 자신을 붙들고 있는 거겠지.

“이엔이 하루라도 곁에 없으면 답답해 죽을 것 같은데, 어떡하나!”

공작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마르텔 경은 지끈지끈 아파 오는 이마를 짚었다. 아이고, 이거 완전히 답이 없게 취하셨군.

마르텔 경은 이제, 이 술주정뱅이를 어떻게든 설득해서 방으로 들여 보내고 싶어졌다.

그리하여 마르텔 경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각하.”

“왜 그러나?”

공작은 힐끗 마르텔 경을 마주 보았다. 간신히 미간을 편 마르텔 경 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각하께서는 안주인 마님께 잘못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공작은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허리를 곧게 펴고 앉은 공작이 마르텔 경에게 말을 이었다.

“이엔을 화나게 만든 것 자체가 잘 못한 거야.”

마치 태양은 동쪽에서 떠서 서쪽에서 진다, 라고 말하는 것만 같은 당연한 말투였다.

“그렇다면 사과하시는 것이 어떻겠 습니까?”

“사과, 사과라.”

공작의 푸른 시선이 순간 번뜩 빛 났다. 어찌나 기세가 흉흉한지, 마르텔 경이 흠칫할 정도다.

“좋은 생각이야, 그런데.”

공작의 목소리 끝이 순식간에 시들 해졌다. 뜨거운 물에 데친 배추처럼 테이블에 축 늘어진다.

“……이엔이 받아 주지 않으면 어쩌지?”

“예?”

마르텔 경은 그만, 주군을 대하는 예의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황당한 목소리로 되묻고 말았다.

하지만 공작은 어느새,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를 스스로 파내어 들어 간 상태였다.

“이엔이…… 내게 화를 냈어.”

그건 마치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슬픔이었다. 공작은 어깨를 옹송그리며 말을 이었다.

“난 쓰레기야, 이엔을 화나게 한 쓰레기라고.”

잔뜩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공작이 테이블에 고개를 푹 처박았다.

마르텔 경은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공작을 내려다보았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엔이 이대로 너무 화가 나서, 날 떠나면 어쩌지?”

“……각하.”

아, 이거 진짜 진상이네. 다음부턴 절대로 같이 술 마시지 말아야지. 마르텔 경은 저도 모르게 주군에게 불경한 생각을 품고 말았다.

그린 것 같은 술주정뱅이가 눈앞에 있는데, 그 술주정뱅이가 제국 최고의 기사이자 충성을 바친 주군이라는 사실에 그는 진한 탈력을 느꼈다.

“난, 이엔이 없으면 살 수 없는데……”

하지만 마르텔 경도 그 말에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은 한 점 거짓 없는 진실이니까.

“떠나지 말라고 말해야 하는데, 이 엔이 화를 낼까 봐 무서워서……”

주군의 망상은 도대체 어디까지 가는가.

마르텔 경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 와중에도 약간은 주군이 안쓰러 워지는게, 아직 주군에 대한 콩깍지가 완전히 떨어지지는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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