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때마침 황녀를 모시러 온 시종이 가까이 다가왔다.
황녀는 자리를 떴고, 리체는 아버지 곁으로 돌아갔다.
공작 부부는 묘한 감회에 젖었다.
“황녀 전하께서 제위를 잇게 되실 줄은 몰랐네.”
“그러게. 이제야 모든 것들이 옳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기분이 들어.”
자카리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덧붙였다.
자카리가 다정한 눈으로 그녀를 본다.
“그리고 그 ‘옳은 방향’은 모두, 이엔 네가 제시해 준 거지.”
“그렇게 띄워 줘도 나올 건 없답니다.”
“하지만 진심인걸.”
자카리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맞잡은 공작 부부는, 대관식을 참관하러 걸음을 옮겼다.
대사제는 새 황제에게 보관을 씌워 주었다.
새로운 황제는 예전 폐제의 오만함 이 아니라, 정중함으로 보관을 받들었다.
그건 제국민에 대한 존중과 감사였다.
“만민을 공명정대하며 자애롭게 포 용할 것을 맹세하겠습니다.”
새 황제의 맹세는 꾸밈없는 담백함을 가졌다.
대사제가 황제에게 깊숙이 허리를 숙여 보였다.
“이로써 새로운 제국의 태양이 우리 앞에 떠올랐습니다. 홍복을 누리 소서, 폐하.”
사람들이 파도처럼 고개를 숙여 보였다.
대사제의 선창에 뒤이어 쩌렁쩌렁 목소리가 울린다.
“홍복을 누리소서, 폐하.”
“홍복을 누리소서, 폐하.”
황녀, 아니 이제 알렉산드라 1세가 된 안네로제는 감사와 애정이 가득 한 눈빛으로 수많은 인사를 받아들였다.
바닥에 길게 깔린 주단을 가로지르는 황제에게 축복의 말이 쏟아져 내렸다.
대관식이 끝나고 황제는 최측근들 과 함께하는 자리를 가졌다.
론도 후작과 그의 딸인 리체, 그리고 헤센바이츠 공작 부부가 참석했다.
사실상 제국을 움직이는 중진들이 모인 자리나 마찬가지였다.
“제도에 좀 남아 있다가 가시는 건 어때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던 중, 황제는 문득 질문을 던졌다.
느닷없는 질문에 자카리와 이엘리는 서로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란히 웃는가 싶더니, 곧장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니예요, 저희는 이만 공작령으로 돌아가려고요.”
이엘리의 대답에 황제는 아쉬운 얼굴을 했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하긴 지금까지도 많이 도움을 받았다. 공작 부부가 너무 오랫동안 공작령을 비우는 것 또한 안 될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이별이겠네요.”
“그래도 계속 제도에 왕래할 테니까요."
가벼운 대답에 황제는 그제야 약간 미소를 지었다.
이엘리는 짓궂은 표정으로 말을 덧붙였다.
“론도 후작께서 폐하를 잘 받쳐 주실 거예요.”
“하지만 공작 부부가 없으면 정말 서운할 거예요.”
“이런, 황제 폐하. 저희만으로는 믿음직스럽지 못하다는 뜻입니까?”
론도 후작이 너스레를 떨자 황녀는 약간 민망한 얼굴이 되었고, 공작 부부는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루 뒤, 공작 부부는 오랜만에 그 들의 영지, 헤센바이츠 공작령에 발을 디뎠다.
거의 몇 달 만에 방문한 헤센바이츠 공작령엔 봄이 물씬 다가와 있었다.
비록 남부보다는 못하지만, 봄기운 가득한 공기는 한층 따스해진 상태다.
아샤 축제까지 얼마 남지 않은 때였다.
“어서 오십시오, 공작 각하. 안주인 마님.”
굉장히 반가운 얼굴이 된 공작성 사람들이 두 사람을 맞아들였다.
집사가 입술을 열었다.
“오랜만입니다, 두 분.”
“그래, 별일 없었지?”
“별일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두 분께서 고생하셨지요.”
에폴리와 제도에서의 일을 이야기 하는 것이리라.
공작 부부는 머쓱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아무튼 수고했네.”
“감사합니다, 각하.”
깍듯한 인사가 돌아온다. 공작 부부는 열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귀환한 공작 부부가 공작성에서 가장 먼저 방문한 장소는 바 로 ‘초상화 방’이었다.
역대 공작 부부와 그 일가의 초상 화가 모여 있는 장소.
오래된 원망과 애증을 지워 내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었다.
초상화 방에 들어간 자카리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을 그린 그림을 가린 천을 거두는 일이었다.
어머니가 직접 그린 ‘괴물이 된’ 그 자신의 그림.
자카리는 나지막이 숨을 몰아쉬었다.
“……”
온통 새하얀 배경으로 한 줄기 피 가 선명하게 흩날리는 그림.
천을 움켜쥔 손에 온통 힘이 들어 갔다.
스스로의 치부와 애증을 담은 그 그림을 그리시며, 어머니는 무슨 기분이 드셨을까.
“어머니께서는 날…… 사랑하셨을까?”
자카리는 충동적으로 이엘리에게 물었다.
그의 손을 마주 잡은 그녀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
“네 어머니께서는 널 진심으로 사랑하셨어.”
다만 처음부터 증오로 쌓아 올린 관계인 게 문제였을 뿐이다.
아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사랑을 자각했을 땐 이미 마음이 다친지 오래여서, 제대로 사랑을 주는 방법을 알지 못했을 뿐이다.
만약 아델라이데가 정말로 자신의 아들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런 죄책감에 시달리지도, 함께 죽으려 하지도 않았을 거야.’
그 모든 기억을 곁에서 지켜보았기 에, 이엘리는 자신할 수 있었다.
그녀가 희미하게 웃었다.
“내가 봤으니까.”
“……그렇구나.”
그렇게 대답한 자카리는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잠시 후, 조그만 목소리가 들렸다.
“더 이상…… 내 과거에서 도망치 지 않기로 마음먹었어.”
“자카리.”
“어떻게든 맞서다 보면, 증오와 미 움과 원망도…… 언젠가는.”
조금씩 무뎌지지 않을까. 부모님을 향한 애정을 인정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고 자카리는 입술을 당겨 물었다.
이엘리는 팔을 들어 자카리를 끌어안았다.
“다 괜찮아질 거야.”
“……이엔.”
“그리고 지금 당장 괜찮아질 필요 도 없어.”
그녀가 손을 들어 자카리의 등을 작게 토닥거렸다.
마치 어린아이를 대하듯 다정한 손길이다.
“시간이 널 도와줄 테니까…… 당장 괜찮아야 한다는 강박 같은 건 버려도 돼.”
“그래, 그럴 테지.”
그녀를 마주 포옹하며 자카리는 희 미하게 웃었다.
조그맣고 따스한 몸, 그리고 콩콩 뛰는 심장박동.
그를 안정시키는 유일한 존재. 제 어깨에 고개를 기대는 이엘리를 보듬으며 생각한다.
‘언젠가는 그렇게 될 거야.’
그렇게 살다 보면…… 오래된 애증 과 원망도 언젠가는 무뎌질 것이다.
나중에 이 순간을 반추하며 ‘그땐 그랬었지’라고 웃을 수 있을 때가 올 터다.
그녀가 곁에 있으니, 뭐든지 가능 하다.
“고마워.”
“별말씀을.”
이엘리는 어깨를 움츠리며 조그맣게 눈웃음을 쳤다.
자카리는 그녀의 이마에 조심스럽게 키스했다.
나비가 내려앉는 것처럼 다정한 키스였다.
이엘리는 당연하다는 양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 * *
헤센바이츠 공작령에서는 언제나 아샤 축제를 크게 열곤 했지만, 그 중에서도 올해의 아샤 축제는 꽤 특 별했다.
‘우리 다음에 축제에 나올 땐, 같이 춤도 추자.’
어렸을 적, 함께 아샤 축제에 참석했을 때 나누었던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공작 부부가 아샤 축제에 직접 참석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자카리는 아직도 그때의 축제가 가졌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남청색 어둠, 부드러운 어둠을 머금고 흐드러지게 피어있은 아샤
꽃, 그리고 땅에서 뜨는 별처럼 수 없이 빛나던 오색의 등불들.
“성인이 된 이후에 아샤 축제에 함께 나온 건 처음이야.”
공작 부인다운 기품은 모두 던져 버린 채, 양손에 간식거리를 잔뜩 쥔 이엘리가 새삼스러운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버터에 달달 볶은 감자를 야무지게 오물거리며 두 눈을 가늘게 치뜬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손해를 본 것 같은 기분이 들긴 하지만.”
예전에는 축제를 마무리하며 밤에 춤을 추곤 했는데, 그새 축제의 규 칙이 좀 바뀌었나 보다.
어린아이들이 손을 맞잡은 채 삼 삼오오 모여 춤을 추는 모습을 심심찮게 구경할 수 있었다.
과거 성년이 아니라는 이유로 춤 한 곡조차 추지 못하고 축제 구경을 마쳐야 했던 그녀는 약간 배신감을 느꼈다.
하지만 뭐, 예쁜 광경이긴했다.
이엘리는 춤추는 사람들을 가만히 구경했다.
“다들 정말 예쁘다.”
“이엔 네가 더 예뻐.”
“음, 넌 맨날 그런 말만 하는 것 같아.”
이엘리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고, 자카리는 그런 그녀의 옆얼굴을 홀 린 듯이 응시했다.
그녀는 모르겠지만 자카리는 언제 나 진심만을 말했다.
이엘리가 세상에서 가장 예뻐 보이는데, 어쩌라는 말인지.
“어쨌든 낮에 춤을 추는 것도 나쁘 지 않은 선택인 것 같아.”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연분홍색 아샤 꽃잎들이 화사하게 흩날렸고, 그 아래로 아가씨의 치맛자락이 동그랗 게 부풀어 흔들린다.
경쾌하게 춤의 스텝을 밟는 신사들의 구둣발이 맵시 있게 움직인다.
축제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환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이엘리 또한 밝게 미소했다.
“저 봐, 다들 즐거워 보이지?”
“그러네.”
“모두 자카리 네가 이 영지를 지켜 줘서 그런 거야.”
이엘리는 생글생글 웃었다.
자카리가 그런 그녀의 손끝을 가만히 감아쥐고는 다정히 말한다.
“그러고 보니, 올해는 함께 춤을 출 수 있겠네.”
“맞아. 그러려고 나온 거 아니었어?”
이엘리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웃었고, 자카리는 곱게 눈매를 휘었다.
“레이디, 저에게 레이디와의 춤을 즐길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기꺼이요.”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춤을 추는 사람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흥겨운 음악이 울려 퍼진다.
두 사람은 사람들의 시선에 거리낌 없이 춤을 추었다.
온통 분홍색으로 물든 세상, 곁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
음악에 맞춰 빙글빙글 돌고 있자니, 세상을 전부 가진 것 같은 행복 감이 들었다.
“곤란해, 내 남편이 이렇게 귀여워 서는.”
그녀는 미간을 좁히며 장난스럽게 고개를 속삭였다.
그녀를 제 팔 안에 가두며 그가 답했다.
“하지만 너에게만큼은 평생 그렇게 보이고 싶은걸.”
봄 하늘처럼 새파란 눈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다정한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사랑해, 이엔.”
“음, 아마도.”
눈동자를 굴리던 이엘리는 생긋 눈 웃음을 쳤다.
발꿈치를 들어 시선을 맞추며 그대로 답한다.
“내가 널 더 사랑할걸?”
“그럴 리가.”
진지한 얼굴로 대답한 자카리가 이엘리의 양 뺨을 가볍게 그러쥐었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진다.
이엘리는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고, 자카리는 그녀의 입술을 그대로 삼켰다.
“…..읏…….”
격렬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부드러운, 초콜릿처럼 달콤한 키스였다.
따끈한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쓸어내리자 이엘리는 작게 웃었다.
이엘리는 자카리에게 망설임 없이 그녀 자신을 맡겼다.
잠시 후 고개를 떼어 낸 자카리가 그녀를 향해 싱긋 웃었다.
“아마 내가 널 훨씬 더 사랑할 거야.”
“어차피 이 문제는, 몇 번이고 논쟁해 봤자 해답이 없을 테니까.”
이엘리는 장난스럽게 눈동자를 빛 냈다.
자카리의 품을 파고들 듯이 끌어안으며, 곧장 답한다.
“서로를 사랑하는 감정은 똑같다고 치자.”
“그래, 이엔.”
쿡쿡 웃음을 터뜨린 자카리가 그녀를 마주 안았다.
아샤꽃잎이 화려하게 쏟아지는 세 상 속에서, 두 사람은 감히 믿었다.
이 사람과 함께한다면, 영원한 행 복을 손에 넣을 수 있으리라고.
〈내 남편이 너무 귀여워서 곤란하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