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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화 (168/196)

168화

“……여기는?”

지금 이곳은 용과 아샤의 힘으로 구축된 그 세계가 아니었다. 현실이었다.

겨울에 어울리지 않는 꽃잎들이 활짝 만개하여 눈물처럼 꽃잎들을 흩날린다.

일찍 다다른 봄처럼 화사한 날씨였다.

“자, 자카리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이엘리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자마자 미소를 짓고 있는 새파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는 두 눈을 크게 떴고, 자카리는 씩 웃었다.

“나 여기 있어.”

“자카리.”

“역시 넌…… 정말로 전설 속의 아샤였어.”

장난스러운 그 말을 들으며 이엘리는 왈칵 눈물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그가 작게 소곤댄다.

“너 정말 괜찮아?”

“물론이지.”

그렇게 말한 자카리가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 다정한 손길이 너무 행복하다.

“폭주 직전에 몰렸던 나를 진정시킬 뿐더러, 이런 능력까지 가지고 있다니……”

“……유능한 아내가 있어서 기쁘지?”

이엘리는 울음을 삼키며 자카리에게 되물었다.

다시 한 번 소리 내어 웃은 자카리가 답했다.

“맞아.”

그 말을 들은 이엘리의 뺨 위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카리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이제 이렇게……”

“……”

“내가 널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났네.”

이엘리는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카리는 고개를 숙여 이엘리와 시선을 맞추었다.

“사랑해, 이엔.”

자카리는 그렇게 속삭였다. 그 목소리 끝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손을 뻗은 자카리가 이엘리의 양 뺨을 감싸 쥐었다.

따스하고 커다란 손바닥이 조그마 한 얼굴을 보드랍게 어루만진다.

“실은 나, 영원히 행복하게…… 라는 끝을 꿈꿨어. 믿었던 적은 없었지만.”

자카리의 목소리는 마치 생크림처럼 부드럽고 다디달았다.

그는 진심 어린 어조로 속삭인다.

“그런데 그 꿈이 이루어질지도 모른다고, 처음으로 생각했어.”

이엘리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자카리와 시선을 맞추었다.

말간 햇빛 아래에서 투명하게 빛나는 연녹색 눈동자를 지켜보며, 자카리는 문득 지극한 행복함을 맛보았다.

그가 말을 이었다.

“너와 함께라면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아.”

그대로 자카리는 이엘리에게 깊숙이 입을 맞췄다.

마치 상대를 잡아먹을 것처럼 격렬하고 진한 키스였다.

잠시 후, 하아, 호흡을 내뱉으며 그녀는 자카리를 마주 보았다.

“……물론이지.”

잠긴 목소리로 대답한 이엘리가 눈물 고인 눈으로 웃었다.

자카리는 그대로 그녀를 제 품 안에 가둬 넣었다.

그의 품에 고개를 기댄 채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카리의 눈동자만큼이나 새파랗게 빛나는 하늘 아래로 아샤꽃잎이 휘날린다.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날이었다.

20. 영원히 당신과 함께

그리고 몇 달 후, 아샤꽃망울이 가지에 올망졸망 맺힌 화사한 봄날.

안네로제 황녀의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황녀의 대관식은 렘푀르데 사원에서 진행되었다.

금빛과 붉은색 휘장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렘푀르데 사원은, 과거 요슈아가 대관식을 치를 때보다 훨씬 산 뜻하게 보였다.

“알렉산드라 1세 폐하.”

“어머나, 헤센바이츠 공작님. 공작 부인께서도 함께 오셨네요.”

황제를 상징하는 붉은 망토를 어깨에 두른 안네로제가 두 사람을 향하여 빙그레 미소 지었다.

“오랜만이예요, 두 분.”

곁에 함께 있던 리체도 두 사람을 향해 생긋 눈웃음을 쳤다.

황후는 전 황제와의 결혼을 파하고 론도 후작가로 돌아간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황후에 준하는 대 접을 받았다.

이번 사태에서 론도 후작가는 명백한 피해자였고, 사태 이후에도 상황을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리체 론도라는 이름을 돌려받은 것만으로도 행복해요.’

막 혼인 무효가 성립되었던 그 당시, 리체는 행복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은 사실이었는지, 리체의 지금 표정은 무척 밝았다.

게다가 그녀는 최근 새로운 사랑에 빠져 있었다.

그녀보다 세 살 나이가 어린 백작가문의 영식을 데릴사위로 들여 론도 가문을 잇기로 한 것이다.

‘처음부터 이러고 싶었어요. 황후 라니, 제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자리였죠.’

즐겁게 재잘거리는 리체의 낯은,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시원해 보였다.

이엘리는 흐뭇한 얼굴로 다정한 모습을 하고 있는 리체와 황녀를 바라 보았다.

바로 그때, 황녀가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아직 그 호칭은 일러요.”

가벼운 목소리를 듣던 이엘리는 짧은 회상을 털어 냈다.

황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잇는다.

“저, 대관식을 치르지 않았는걸요.”

“하지만 오늘 치르실 거잖아요?”

이엘리는 즐거운 얼굴로 대답했고, 황녀는 조금 부끄러운 얼굴이 되었다.

사실 긴 역사를 가진 제국에서도 여성의 몸으로 제위에 즉위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귀족 가문도 피치 못한 사정이 없으면 여성보다 남성에게 작위가 돌아가는 마당에, 여성 황제는 꽤나 파격적인 인사였다.

‘하지만 아무도 황녀께서 제위를 이으시는 것을 반대하지 못했지.’

이엘리는 뿌듯한 표정으로 그 당시의 일을 다시 떠올렸다.

황제가 ‘아샤의 축복’을 이용하여 폭주했고, 그것을 공작 부부가 막았다.

제국 전체가 혼란에 빠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황녀의 지휘 아래에 모든 일은 철두철미하게 정리되었다.

‘전 황제는 폐제가 될 것입니다.’

단 한 명뿐인 황위 계승자의 발언에 귀족들은 술렁거렸다.

그들의 눈초리에 불신이 가득 차 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미 폐제는 ‘아샤의 축복’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멋대로 이용했고, 그녀 또한 ‘아샤의 축복’을 가진 후손을 잉태할 수 있는 리펜베르크의 후손이었으니까.

‘내게 ‘아샤의 축복’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귀족들을 모아 놓은 안네로제는 그렇게 선언했다.

온통 엉망이 되어 버린 에폴리를 수습하고, 죽은 전 황제를 가차 없이 황가에서 파문시킨 직후의 발언

이었다.

황녀는 말을 이었다.

‘또한 앞으로도 ‘아샤의 축복’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말씀을 어떻게 믿습니까?!’

귀족 중 하나가 황녀에게 사납게 항의했다.

하지만 황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이 자리를 빌려 말씀드리자면, '아샤의 축복’은 본디…….’

황녀의 맑은 회색 눈동자가 이엘리를 흘끗 돌아보았다.

생긋 미소를 지은 황녀가 곧 말한다.

‘리펜베르크의 후손에게 허용되지 않은 힘이었으니까요.’

황가의 특별함을 증명하는 근간을 아무렇지도 않게 부정하는 황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모두 놀 란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황녀는 차분한 얼굴로 사람들을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그 힘은 원래의 주인에게 돌아갔으니, 다시는 리펜베르크의 혈통에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아샤의 축복’

이란 결국 아샤 요정의 영혼 일부였고, 그 영혼은 이엘리에게 다시 돌아갔으니까.

더 이상 ‘아샤의 축복’을 통해, 사람들이 조종당할 일은 없었다.

‘그리하여 우리 황가가 제국민들에게 감히 바라는 건, 잃어버린 신뢰입니다.’

그렇게 말한 황녀가 깊숙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언제나 오만했던 폐제의 모습과는 다른, 진솔한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황녀의 목소리에는 죄스러움이 가득했다.

‘저희는 지금까지 크나큰 잘못을 했습니다. 최선을 다해 그 잘못을 수습할 생각입니다.’

황족이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라니.

기나긴 리펜베르크의 역사 속에서도 그 모습은 처음이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조차 염치 없음을 압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황녀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리깐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아마 황녀 또한 두려울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저지른 일이 아님에도 사람들의 분노를 온전히 받아 내려 한다.

‘한 번만 기회를 주신다면, 지금 사태를 어떻게든 수습해 내겠습니다.’

황녀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이엘리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저는 황녀 전하를 믿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이엘리에게 모두 쏠렸다.

이엘리는 침착한 얼굴로 사람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적어도 일을 수습할 기회는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사태의 가장 큰 피해자 중 하나인 공작 부인이 그렇게 주장하니, 사람들의 여론도 그렇게 기울어졌다.

잠시 후, 서로 얼굴을 마주 보던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점점 분위기가 누그러졌다.

‘…하긴, 그건 그래요.’

'이번 문제는 황녀 전하께서 잘못 하신 것도 아니니까요.’

‘황위를 계승하실 수 있는 분도 황녀 전하 한 분 뿐이잖아요?’

그리고 황녀는 놀란 얼굴로 이엘리를 바라보았다.

공작 부인은 이번 일의 명백한 피해자 아닌가.

공작 부인은 그저, 침묵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최대한의 관대함을 보여 준 거였다.

그런데 이렇게 적극적으로 황가를 도와주다니.

‘힘내요.’

이엘리의 입술이 조그맣게 달싹였다.

그 동작을 읽던 황녀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황녀 전하는 제게 아주 소중한 사람인걸요.’

잠시 머뭇거리던 이엘리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 말에 황녀는 금방이라도 울어 버릴 것 같은 얼굴로 웃었다.

그렇구나. 공작 부인은 날 그렇게 생각해 주는구나. 그런 황녀를 보던 그녀 또한 눈웃음을 쳤다.

‘저는 황녀 전하를 믿어요.’

그리고 황녀는 유일한 황위 계승자 로서 최선을 다했다.

실제로 황녀의 수습이 없었더라면 혼란은 한층 더 가중됐을 것이리라.

그 이후, 폭주하던 폐제를 막아 준 보상으로 헤센바이츠 공작가는 공신 지위를 받았고, 론도 후작가도 제도 정계의 중심으로써 그 위치를 단단히 굳혔다.

그에 두 가문은 기반이 연약한 황녀가 황제가 되기까지 계속해서 지 지했다.

“황제의 붉은 망토, 전하께 무척 잘 어울려요.”

“그런가요?”

“네. 처음부터 황녀 전하께서 걸치 셨어야 하는 망토라고 생각해요.”

어깨를 고정시킨 황금 브로치를 매 만져 주며, 이엘리가 작게 소곤거렸다.

그 말을 들은 황녀는 수줍게 미소 지었다.

황제의 복식을 차려입고, 환하게 웃는 황녀의 모습은 무척 우아했다.

“드디어 에반의 망령에서 해방된 첫 번째 황제가 탄생하네요.”

그렇게 말한 이엘리는 빙그레 웃었다.

‘아샤의 축복’과 리펜베르크의 핏줄에 얽매여 있던 에반의 영혼은 모조리 사라졌다.

안네로제 황녀는 에반에게서 자유로운 최초의 황제가 될 것이다.

“정말 고마워요, 공작 부인.”

진심 어린 목소리로 대답하는 황녀의 목소리 끝이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과거의 망령에 너무 오랫동안 붙들려 있었다.

그 망령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봤지만, 이제 모두 끝났다.

“세상에, 지금 우시는 건가요?”

이엘리는 웃음 섞인 목소리로 황녀를 향해 소곤거렸다.

황녀는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돌렸다.

수많은 감정들이 복받쳐 제대로 마음이 추슬러지지 않는다.

이엘리가 손수건을 집어 들었다.

“모두가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 것뿐이예요.”

화장이 번지지 않도록 눈가를 조심스럽게 찍어 내 주며, 이엘리는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마음을 추스르고 얼른 가셔야지요.”

“……공작 부인.”

“대관식이 시작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요.”

그 말에 황녀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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