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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화 (167/196)

167화

용은 아샤를 지키기 위해 용과 아샤 둘만의 세계를 만들었다.

지금 이엘리가 자카리와 함께 있는 이곳이었다.

‘결국 잔인한 용을 퇴치하고 요정을 구출하기 위해, 리펜베르크의 기사가 분연히 일어났다.’

그들을 먹이고 키운 어머니를 향한 소유욕, 인간들의 소유욕을 정당화 하기 위한 오만한 전투.

그 전투엔 어느새 ‘잔혹한 은룡을 퇴치하고 요정을 구출한다’라는 정 당성이 부여되어 있었다.

‘용과 기사는 일주일 밤낮을 사투를 벌였고, 승리자는 '회색 기사’인 에반 리펜베르크였다.’

만약 인간들이 승리했다면, 애초에 이 세계에 용이 남아 있을 수 있을리 없다. 인간들의 탐욕은 당연히 용을 죽였을 테니까.

일주일 밤낮을 사투를 벌였지만, 용은 강건했다.

애초 자연재해와 같은 압도적인 힘을 가진 존재에게 인간이 승리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리하여 인간은.

‘용의 마지막 발악 때문에 요정은 큰 상처를 입는다.’

아샤를 이용하기로 마음먹는다. 아 샤에게 회생할 수 없는 상처를 입힌 이는 바로 에반이었다.

에반은 아샤에게 혼의 일부를 강탈했고, 용의 반려였던 아샤의 힘으로 용에게 칼을 겨누었다.

‘결국 요정은 기사에게 축복을 내리며 숨을 거두었고, 기사는 위대한 성군으로 등극했다.’

그가 아샤에게 빼앗은 힘은, 아샤 가 스스로의 의지로 내린 축복으로 어느새 탈바꿈되었다.

아샤를 지키기 위해 은룡은 미물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런 용을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에 반은 말했다.

‘내가 아샤를 가질 수 없다면, 너 또한.’

‘에반!’

‘가질 수 없어.’

에반의 눈동자에 희번덕거리던 그 감정은 분명 강렬한 소유욕과 열등 감이었다.

에반은 아샤의 영혼 일부를 가진 채 초대 황제가 되었고, 불완전한 아샤는 환생의 고리에 들어가게 되

었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게 될 이 세계를, 소중하게 생각해 줘……”

그럼에도 아샤는 인간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샤가 남겨 둔 그녀의 본체 덕분에, 봄은 여전히 인간들을 찾아왔다.

그 봄에 의지하여 인간들은 계속해 서 번성했다.

그리고 은룡은 절망했다.

시들어 떨어지는 분홍색 꽃잎이 눈물처럼 져 내리고 있었다.

분분히 흩날리는 꽃잎들을 맞으며, 은룡은 허리를 숙여 제 반려의 창백 한 얼굴을 굽어보았다.

새하얀 얼굴에 핏기라고는 없었다.

“나의 아샤.”

메마른 입술 사이로 절망에 가득 찬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새싹을 닮은 연녹색 눈동자가 은룡을 빤히 올려다본다.

새파란 시선이 순식간에 젖어 들었다.

얼음이 녹아 깨어지듯 무너지는 낯.

“내가 널…… 사랑하지 않았더라 면.”

투명한 눈물들이 툭툭 쏟아져 내린다.

희다 못해 푸르게 빛나는 이마를 뜨거운 눈물이 적셨다.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아샤는 말끄러미 은룡을 올려다보았다.

그 눈동자에는 인간을 향한 원망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여전히 티끌 하나 없이 투명한 연녹색 눈동자가 아팠다.

은룡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네가 자식처럼 생각하던 인간들이 널 배신하지 않았을까?”

그녀는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 조그만 동작이 은룡에게는 천둥처럼 크고 무겁게 느껴졌다.

“차라리 내가 널 일찍이 보내 줬더라면……”

누군가가 심장을 움켜쥐고 조르는 기분이었다.

처음 그녀가 이 땅에 발을 디뎠을 때가 떠올랐다.

이 땅의 생명을 위해 당연하게 봄을 불러오던 그 순진한 모습.

그런 그녀를 자신의 반려로 삼아 이 세계에 얽매어 놓은 건 은룡 자신이었다.

아샤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속삭였다.

“……자식이 성장하여 부모를 이기려 하는 건 당연한 일이야.”

은룡은 숨이 꽉 막히는 것을 느꼈다.

넌 분노도 하지 않아? 인간들은 널 배신했어, 그런 인간들에게 언제 까지 용서를 베풀 셈이야? 증오와 분노가 뒤섞여 부글거리며 끓어 넘쳤다.

그때.

“나의 헤센.”

세상에서 단 한 명, 용의 애칭을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존재.

그녀가 용을 향해 눈웃음을 쳤다.

“난 다만…… 네가 걱정돼.”

“아샤.”

“왜냐하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바로 너니까.”

그녀는 그를 온전히 걱정하고 있었다.

그 말에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펑펑 눈물을 흘렸다.

“너와 함께할 수 있어서, 너의 반려가 될 수 있어서.”

누군가의 곁에 있다는 것이 이렇게 즐거운 일인 줄, 지금껏 아샤는 알 지 못했다.

그 모든 기쁨과 찬란함을 가르쳐 준 존재는 바로 헤센바이츠, 그녀를 반려로 맞아 준 겨울의 은룡이었다.

“정말로 기쁘고 행복했어.”

진심을 다한 고백에 푸른 눈동자가 커다랗게 뜨였다.

그녀는 온 마음을 다해 약속을 건넸다.

“네 곁으로 꼭 돌아올 테니까.”

아샤는 힘겹게 손을 들어 은룡의 뺨을 쓸어내렸다.

따스한 손가락이 축축하게 젖은 뺨을 어루만진다.

연녹색 눈동자는 그를 올곧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날 기다려 줘.”

여전히 봄처럼 다사로운 그녀의 어조.

“아샤.”

“다시 돌아오게 될 그때는, 영원히 너만을 사랑할 테니까.”

그 말을 들은 은룡은 숨을 쉬는 방법조차 잊어버린 것 같았다.

연녹색 시선이 흔들린다. 나의 헤센.

너를 두고 떠나는 게 역시 난 너무 미안해.

그런 너에게 무거운 부탁을 하는 것, 모두.

“다시 만날 그날, 우리가 함께 살아가게 될 이 세계를.”

하지만 넌, 이런 부탁이라도 남겨 두지 않으면 분명 이 세계를 파괴해 버릴 테지.

그녀는 쓰게 웃었다. 난 네가…… 자비를 배웠으면 좋겠어.

그녀는 한 음절 한 음절 힘을 줘 말을 이었다.

“지켜 줘야 해…… 알았지?”

“어떻게 그런 부탁을 할 수가 있어, 너를 이렇게 만든 인간들을 두고!”

감정이 격해진 은룡이 드물게 그녀를 향해 언성을 높였다.

아샤는 그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이렇게 울면 내가 마음 편히 떠날 수 없잖아…… 나의 헤센.”

눈가에 닿는 보드라운 감촉이 서러웠다.

아샤는 눈매를 곱게 휘었다. 창백 한 입술이 달싹인다.

“사랑해.”

아주 오랫동안 가슴에 품어 온, 깊고 따스한 애정. 아샤는 은룡을 향해 조그맣게 소곤거렸다.

“내 자신보다도 더.”

“……”

차마 그녀를 보지 못한 채 은룡은 고개를 숙였다.

그녀도 사실, 딱히 대답을 원하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미소를 남긴 그녀가 눈을 감았다.

마지막 호흡이 휘날리는 꽃잎 사이 로 흩어졌다.

모든 기억의 끝, 이엘리는 조그마 한 소년을 만났다.

깜깜한 어둠 속에 소년이 홀로 서 있었다.

“자카리.”

그 말에 소년은 움찔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희게 빛나는 은빛 머리카락 아래 로, 짙푸른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이엘리는 소년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손을 뻗으며 입을 연다.

“널 데리러 왔어.”

“……아니, 그러면 안 돼.”

소년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소년의 눈동자 안쪽에 가득 고여 있는 감정은 짙은 공포였다.

“내가 깨어난다면…… 결국 폭주하게 될 거야.”

자카리는 미친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어째서 스스로를 봉인했는데.

그는 숨을 삼켰다.

“네가 사랑하는 인간들을 내가 모 두 죽이게 될 거야.”

두려움에 가득 찬 시선이 이엘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떨리는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스친다.

“우리 단둘이 남는 세계는 원하지 않잖아, 이엔.”

“원하지 않는다고 한 적 없어.”

“……뭐?”

뜻밖의 대답이었다.

순간 소년이 멍하니 그녀를 마주 본다. 그녀는 삐딱하게 시선을 맞받았다.

“정말로 네가 깨어나서 폭주하게 된다면.”

“이엘리.”

“그래서 세계가 멸망하고 너와 나 단둘이 남는다면.”

이엘리는 연녹색 눈동자를 가늘게 치 떴다.

팔짱을 끼며 고개를 갸웃 기울인다.

과거 아샤 요정은 세계가 멸망하는 것에 대해 엄청난 의미 부여를 한 모양이지만, 이엘리는 아샤와 달랐다.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뭐, 안 그래?”

“……이엔?”

“세상 모든 것을 바꿔도 좋아, 난 네가 필요해.”

그러므로 이엘리는 단호한 목소리 로 그렇게 말했다.

세상의 멸망을 막는 것, 좋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 자카리가 희생해야 한다면, 그녀는 그것을 거절하고 싶었다.

가장 소중한 게 무엇인지 그녀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온 세상과도 바꿀 수 있을 소중한 존재는 바로 자카리였다.

“약속했잖아. 다시 돌아오면, 너만을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으쏙여 보였다.

그러고는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

“……뭐?”

“솔직히 말하자면, 너도 그렇게 되 고 싶지 않은 거잖아.”

그렇게 말한 이엘리는 살짝 시선을 내렸다.

소년의 손에는 작은 크라바트 핀이 들려 있었다.

“그거, 내가 선물해 준 거지?”

“……”

“풍어제에서, 그걸 네게 선물하면서.”

이엘리의 말을 들은 자카리는 두 눈을 동그랗게 치떴다.

자신이 이런 크라바트 핀을 귀중하게 품고 있었다니. 전혀 인지조차 하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이엘리는 그에게 빙그레 웃어 보였다.

“내가 없으면 나 대신 그게 널 지켜 줄 거라고 했었지.”

“그건……”

“너도 실은 폭주하고 싶지 않은 거잖아.”

자카리는 가슴속 가장 연약한 부분을 날카로운 바늘로 쿡 찔린 기분이 되었다.

그녀는 고개를 기울였다.

“온전한 세계에서 나와 함께하고 싶은 거야. 그렇지?”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녀가 선물해 준 크라바트 핀은 자카리의 마지막 남은 인간성이었다.

그렇기에 저렇게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든 폭주를 막아 보고자, 끝까지 인간으로 남아 있고 싶어서.

화사하게 웃은 이엘리가 자카리의 손을 마주 잡으며 못 박듯 말했다.

“그 물건 대신, 진짜 내가 여기에 있어.”

“……이엔, 하지만.”

“난 우리의 과거에 더 이상 시달리고 싶지 않아.”

자카리가 무어라 말하려 들었지만, 이엘리는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차분하게 입을 연다.

“과거가 어쨌든 나는 나고, 너는 너야.”

그 말에 짙푸른 눈동자가 짧게 떨렸다.

이엘리는 숨을 크게 삼켰다. 언제 까지 이 지긋지긋한 과거에 얽매여 야 한단 말인가.

지금까지 그들은 과거에 너무 휘둘려 왔다. 이제 그건 싫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행 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난 믿어.”

이엘리는 진심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어린 소년이 가만히 시선을 들어 올린다.

“그러니까 우리 이만 돌아가자.”

그 말을 들은 그는 입술을 깨물며 침묵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침묵을 망설임 없이 부순다.

“우리가 있어야 할 곳으로, 우리의 집으로.”

확고한 그 말에, 소년의 눈동자에 눈물이 그득하게 차올랐다.

소년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로 돌아가도 돼?”

“물론이지.”

“나와 영원히 함께 있어 줄 거야?”

“당연한 말을 하네. 네가 싫다고 해도 떨어지지 않을 거야.”

그 순간, 소년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이엘리는 양팔을 활짝 펼쳤다.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던 소년이 주춤주춤 그녀에게 다가왔다.

마치 어린 짐승처럼 그녀의 품을 파고든다.

“뭐든지 괜찮아.”

“이엔.”

“이번에는 너만을 끝까지 사랑하기로 결심했으니까.”

이엘리는 자카리를 꽉 끌어안았다. 품 안에 가득 차는 소년의 온기가 눈물겹게 사랑스러웠다.

* * *

이엘리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건 연분홍색 꽃잎 폭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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