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꼭 돌아올 테니까, 날 기다려 줘.’
가느다란 손가락이 뺨을 어루만지던 보드라운 감촉.
연녹색 눈동자 안쪽에 비치는, 당장이라도 무너지기 직전의 표정을 짓고 있던 스스로의 얼굴.
아샤의 다정한 목소리와 상냥한 미소.
'다시 돌아오게 될 그때는, 영원히 너만을 사랑할게.’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남긴 그 약속 은 지나치게 달았다.
그의 삶의 유일한 이정표이자 생존의 이유가 되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함께 살아가게 될 이 세계를, 소중하게 생각해 줘…….’
툭 떨어지던 조그마한 손. 은룡은 그녀를 잃으면서 처음으로 상실의 고통을, 그리고 무언가를 지켜야 하는 의무를 배웠다.
인간도, 세계도 모조리 미웠다. 그럼에도 차마 버릴 수가 없었다.
‘나의 아샤, 내가 포기를 배움으로써 네가 행복할 수만 있다면.’
그리하여 용은 긴 시간 동안 유지되는 거대한 마법을 펼쳤다.
자신의 피를 섞어 창조한 일족을 만들고, 긴긴 세월 동안 일족의 핏 줄 속에 스스로를 봉인했다. 반강제 적인 선택이기도했다.
‘넌 내 반려니까.’
아샤가 인간에게 혼의 일부를 강탈당하고 살해당한 건, 반려인 은룡에게도 타격이 가는 일이다.
그런 상황에서 긴 시간 동안 유지되는 강대한 마법을 펼쳤으니 무리 가 가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난 널 기다려야 했어.”
이엘리의 눈동자에 눈물이 차올랐다.
이제 에반은 죽었고, 이엘리는 에반이 빼앗았던 혼의 조각을 되찾았다.
은룡의 오랜 고뇌를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그녀는 더듬더듬 말문을 열었다.
“……모두 내 잘못이야."
“……”
그는 그녀의 말이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는다.
그것 자체가 그가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는지를 증명한다.
자카리는 그저 얕은 숨을 몰아쉴 뿐이었다.
그녀는 무릎걸음으로 그에게 다가 갔다.
“제발, 자카리.”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 아샤, 즉 그녀가 다시 이 세계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녀는 반쪽짜리 아샤였다.
영혼의 일부를 빼앗긴 그녀는 은룡에 대한 기억을 모두 잃은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은룡은, 자카리는, 끈질기 게 그녀를 기다렸다.
기억을 되살리며, 각성의 순간을 기다리며.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잘못했 어.”
이엘리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자카리의 얼굴을 더듬어 보고 깜짝 놀란다.
그가 너무 차가워서. 눈앞의 그가 얼음장 같아서.
안색은 창백했고, 입술에는 핏기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이엘리는 황급히 그를 품 안에 끌어안았다.
작은 심장 소리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았다.
“그러니까 제발 잠들지 마, 응?”
후두둑 눈물이 쏟아졌다. 내가 잘못했어.
내가 먼저 이 모든 것을 기억했어야 했어. 네가 괜찮다고 말하는 것에 기대서는 안 됐어.
자카리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그가 희미하게 웃으며 속삭인다.
“네가 사랑했던 것들을…… 너와 같은 마음으로 사랑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
마지막까지 자카리는 이엘리에 대한 사죄만을 입술에 담는다.
원망조차 없는 순연한 그 애정이었다.
“사랑해, 이엔.”
마지막으로 미소를 남긴 자카리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마치 죽은 것처럼 눈꺼풀이 굳게 닫힌 것을 보자 순간 가슴이 쥐어뜯는 것처럼 아파 와서, 이엘리는 신
음처럼 자카리의 이름을 불렀다.
“……자카리?”
하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그녀를 바라보는 상냥한 눈빛도, 다정한 목소리도, 모조리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아무리 자카리의 몸을 흔들어 봐도 그는 눈을 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카리, 대답, 대답 좀 해 줘, 응?”
자카리의 피를 흠뻑 머금은 아샤꽃나무가 활짝 꽃을 피운다.
잿빛 하늘 아래로 분홍색 꽃잎들이 팔랑팔랑 떨어진다.
비처럼 쏟아지는 그 꽃잎조차 지금 은 원망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제발.”
이엘리는 그에게 매달리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목 안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솟아 올랐다.
거대한 아샤 나무 아래에 잠든 듯 눈을 감은, 사랑하는 사람.
나의 자카리. 제발. 제발 한 번만.
“……내게 기회를 줘.”
나 때문에 네가 이렇게 됐어.
괴물처럼 몸집을 부풀린 죄책감이 이엘리를 삼켰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다.
자카리, 넌 몇 번이고 이런 기분을 느꼈겠지.
미쳐 버릴 것 같은 기분에 이엘리는 뚝뚝 눈물만을 흘렸다.
칼에 베인 마음에서 피가 흐르듯, 쉴 새 없이 눈물이 넘쳐흘렀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창백한 얼굴로 잠든 연인을 향해 그녀는 작게 속삭였다.
그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을 잇는다.
“하지만 이대로 널 포기할 수 없어.”
자카리는 그녀 때문에 모든 것을 놓아 버리지 않았나.
그녀가 인간을 지키고 싶어 한다는 이유로, 자기 자신을 봉인한다는 선택지를 고른 자카리.
이엘리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그러니까 나, 이번에는 내가 널 데리러 갈 거야.”
연녹색 눈동자가 결연하게 가라앉았다.
힘을 주어 자카리를 포옹한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절대로 널 포기하지 않아.”
용의 반려가 용을 봉인할 수 있다면, 용의 봉인을 다시 파훼하는 것 또한 가능할 터.
그녀의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자카리를 다시 돌려받을 생각이었다.
이엘리는 곧장 힘을 끌어 올렸다.
* * *
자카리는 그 누구도 닿을 수 없는 깊고 깊은 늪 안쪽에 있었다.
끝나지 않는 잠, 영원한 고요. 차라리 이편이 나았다.
더 이상 감정 소모를 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
무엇보다도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그녀를 아프지 않게 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와 함께하며 너무 많은 희생을 치렀다.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넌 내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
'그게 무슨 뜻이지?’
‘너만큼은…… 세계를 파괴하려는 그 충동에 휩쓸리지 말라는 뜻이야.’
자카리는 은룡 헤센바이츠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너만큼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 말은 아마 진심일 터였다. 과거의 전철을 똑같이 밟지 말라는 것.
‘왜냐하면 그녀가 슬퍼할 테니까.’
자신의 과거, 겨울의 은룡 헤센바이츠와 똑같은 선택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보다는 나은 선택을 해야 하지 않겠나.
그녀의 눈물을 다시 보느니, 차라 리 자신을 지워 버리는 편이 낫다.
‘내가 깨어난다면…… 너를 슬프게 만들고 말 거야.’
눈과 얼음으로 쌓아 올린 조용한 세계.
그가 '자카리’라는 자아를 갖기 전부터, 오래전 겨울이 지배하는 세계의 군주였을 때부터, 고독함과 외로 움은 이미 익숙했다.
오히려 아샤가 그의 세계에 당도하여 온기를 나눠 주던 게 비정상적인 상태였다.
‘어떻게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 따스함은 만인의 애정을 받기에 마땅한 고귀함이었다.
알고 있었다. 사실은 자신이 ‘반려’ 라는 그 이유로 그녀에게 너무 큰 욕심을 부리고 있었다는 것을.
그녀를 독점하려 하는 제 소유욕은 올바르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만인을 공평하게 사랑하려 했을 뿐이다.
'다시 돌아온 너를 만났을 때부터.’
그는 언제나 두려웠었다. 그건 아 마 본능적인 두려움이었을지도 모른 다.
그녀가 이 세계에서의 죽음을 맞이하고 다른 세계로 떠났던 그때, 그는 그녀가 제 곁에 돌아오지 않을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넌 내게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 켰지…… 하지만.’
그녀는 이미 이 세계에서 큰 상처를 입어 떠났던 존재였다.
그런 그녀가 과거를 회상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자카리는 언제나 두려움이 제 목을 조르는 것을 느꼈다.
‘만약 네가, 앞서 떠났던 다른 세계를 더욱 사랑하게 됐다면.’
그렇다면 난 널 보내 줘야 하나.
간신히 다시 만난 너와의 이별을 다시 받아들여야 하나.
은룡의 명확한 기억이 아직 되돌아 오지 않았던 그때도, 자카리는 그녀를 보며 언제나 마음을 졸였었다.
‘네가 날 떠날까 봐 언제나 무서웠어.’
그러므로 이엘리는 자카리에게 있어 항상 불안한 존재였다.
그녀가 곁에 있는 게 행복할수록, 그녀를 상실했을 때의 고통이 두려웠다.
'하지만, 이엔.’
감은 눈 안쪽에는 언제나 이엘리만이 보였다.
오랫동안 공허했던 삶, 유일하게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가르쳐 준 그의 아가씨. 삶의 의미를 건네고, 온기를 나누어 주고, 미소를 지어 준 이.
‘난 너만 있으면 괜찮은데.’
정말이었다. 그녀를 최초로 만났던 아주 오래전, 가엾게 여겼던 인간에게 배신당하여 그녀가 그를 떠났던 때, 그리고 마침내 그녀를 다시 만난 현재까지. 모조리 그녀를 향하는 삶이었다.
‘너만 있으면 이 세계의 모든 것은 완전해지는데.’
온기도, 빛도, 삶의 의미도 모두. 이엘리가 그에게 모두 선사한 거였다.
그 사실에 자카리는 서글퍼졌다.
‘너는 내가 네 곁에 있는 것으로는, 역시 안 되는 거였니?’
질문의 답은 아마 영영 알 수 없을 터였다.
자카리는 그대로 의식을 놓아 버렸다.
자아는 희미해지고, 이성은 토막토막 끊어진다.
영원의 잠을 선택한 자카리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때 조그마한 목소리가 들렸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의식을 강제 적으로 끌어올리는 서러운 목소리.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던 서글픈 어조였다.
흐느끼는 목소리는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어째서 우는 거야, 이엔.’
하지만 이제 그는 무리였다.
더 이상 그녀에게 손을 뻗을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그녀를 품 안에 가득 끌어안고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고,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 또한 그는 알았다.
현재 상태는 스스로의 영혼을 강제로 봉인하여 폭주를 멈춘 것에 가까웠으니까.
“하지만 이대로 널 포기할 수 없어.”
잠시 후, 다시 한 번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따스한 손이 그를 붙들었다.
“그러니까 나, 이번에는 내가 널 데리러 갈 거야.”
안 돼, 내가 네 곁에 있으면 또다시 너를 상처 입히고 말 거야.
그는 고개를 저었다.
“절대로 널 포기하지 않아.”
절대적인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녀는 속삭였다.
그와 동시에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 * *
이엘리는 오래된 기억을 보았다.
과거 에반이 그녀에게서 빼앗았고, 마침내 되찾은 혼의 조각이 갖고 있던 기억이었다.
그녀가 불러온 봄을 통해 번성한 인간은, 끝내 그들의 어머니인 아샤 마저 소유하고자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용의 반려였 고, 용은 반려를 포기하지 않았다.
‘영원한 겨울이 머무른 북부에는 잔혹한 은룡 헤센바이츠가 살고 있었다.’
잘 꾸며진 건국 전설의 뒤편에 숨어있은 진실.
아샤 요정이 처음으로 당도한 북부에는, 영원한 겨울 따위 자취를 감춘지 오래였다.
봄이 만개한 북부에는 잔혹한 은룡이 아니라, 자신의 반려를 열렬히 사랑하는 은룡이 살고 있었다. 본능 적인 증오마저도 거둘 정도의 사랑이었다.
‘용은 봄의 요정인 아샤를 사랑했 지만, 요정은 용이 아닌 기사를 사랑했다.’
건국 전설에서 교묘하게 바뀐 진실.
서로를 마음 깊이 사랑하고 있던 연인은 은룡과 아샤였다.
‘분노한 용은 요정을 독점하기 위해 비밀 정원에 가둬 두었고, 세계는 봄을 잃어버렸다.’
오히려 은룡에게서 아샤를 강탈 하려한 것은 에반을 대표로 한 인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