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 화
형체조차 남지 않은 이성의 가루를 애써 긁어모아 이엘리를 마주 본다.
지금 당장 폭주해도 이상하지 않을 그가 간신히 버티고 있는 이유
“네가 슬퍼할 테니까…… 용으로는.”
목소리 끝이 이지러졌다.
자카리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당겨 물었다. 그리고 그의 표정이 허물어졌다.
“어떻게든 용으로는 변하고 싶지 않았는데……”
자카리는 숨을 삼켰다.
정말이었다. 이엘리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사랑하고, 또한 지키는 인 간이었기에 그 또한 보호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이 증오스러웠다. 너무나도. 아주 오래전부터, 그가 은룡이며 그녀가 아샤였던 순간부터.
인간은 언제나 그녀를 빼앗아 갔다.
“난 여기까지인가 봐.”
나는 인간이야. 인간이어야만 해. 사랑하는 아가씨가 몇 번이고 이야 기했고, 억지로 스스로에게도 걸어 두었던 그 제약.
하지만 그 제약은 너무나 연약했다.
그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미안해, 이엔.”
한숨처럼 옮조린 그 사과에 이엘리는 멈칫 어깨를 굳혔다.
자카리는 어설프게 미소를 지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고작이런 것뿐이었어.”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사랑하는 것들을 지키는 것. 그리고 너를 실망시키지 않는 것.”
새파란 눈동자가 이엘리를 똑바로 보았다.
또렷한 이지가 되돌아온 시선은 확고하기만 하다.
“동시에 해낼 수 있는 방법…… 단 하나가 있으니까.”
인간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이엘리의 애정을 잃지 않을 수 있는 법.
아주 오래전부터 간신히 유지해 왔던 금제는 풀린 지 오래였다.
압도적인 용의 힘은 그 힘의 주인 인 자카리 자신에게도 유효했다.
자카리가 가진 인간의 자아는 너무나 연약해서...
“실은 말이야, 이엔.”
결국에는 인간을 증오하고 만다. 그가 가진 용의 본질이 그랬다.
본디부터 용의 세계였던 이 땅에 봄의 요정이 발을 딛게 된 때부터, 그녀의 온기가 싹을 틔우고 만물을 소생시킨 때부터.
그가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가 인간을 동정하여 가엾게 여겼던 바로 그때부터 시작된 증오.
“나도.”
“……”
“이런 오랜 증오 속에 갇힌 채…… 살고 싶지 않았어.”
갓 떨어져 손안에서 녹아내리는 눈 송이처럼 자그만 고백이었다.
자카리는 희미하게 웃었다.
“은룡이 되느니…… 차라리 나 스스로를 영원히 가두는 편이 낫다 고.”
그녀를 바라보는 자카리의 손에는 아샤 가지가 들려 있었다.
이엘리는 커다란 얼음 조각을 삼킨 것처럼 서늘한 기분을 느꼈다.
재해로 불릴 정도로 강대한 용. 그리고 그 용의 유일한 반려.
용의 반려라는 건, 용의 존재에 간섭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육신은 물론이고 영혼까지도.
“……그렇게 생각해.”
툭, 죽은 나비처럼 목소리가 떨어졌다.
자카리의 표정은 담담한데, 이엘리의 낯은 일그러졌다.
“너,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알잖아.”
자카리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엘리는 마구 고개를 가로젓더니, 입을 열었다.
“그, 그만둬.”
“이엔.”
“응? 그러지 마,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그러니까……”
이엘리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유일하게 용을 봉인할 수 있는 방법은, 용의 반려가 가진 영향력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래전에 아샤가 용의 반려 였던 것처럼, 이엘리 또한 자카리의 반려였다.
지금 그는 스스로를 포기하기로 결 심한 상태였다.
“난…… 솔직히 말하자면.”
일 년, 십 년, 백 년, 그보다 오래 된 시간들.
그녀를 기다리며 버텨 왔다.
그녀가 인간을 사랑했기에 용의 핏 줄 속에 자신을 봉인했고,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다시 만났다.
“이제 조금은 지친 것 같아.”
자카리는 미소 지었다. 모래 먼지가 풀썩이는 것 같은 미소였다.
이엘리는 멍하니 자카리를 응시했다.
처음이었다, 자카리가 ‘지쳤다’라고 말하는 때는.
아샤 가지를 만지작거리던 그가 웃었다.
“이대로라면 난 결국 폭주하고 말 거야.”
폭주는 이미 결정된 수순이었다.
용의 본질도, 지금껏 쌓여 온 인간에 대한 분노도 그랬다.
지금도 당장 이 세계에서 뛰쳐나가 모든 인간들의 숨을 거두고 싶었다. 억누르는 것도 한계였다.
“인간을 멸하고자 하는 재앙이 되겠지…… 더 이상 나에게는 그 폭주를 막을 힘이 없어.”
하지만 넌 내가 그렇게 행동하면 분명 슬퍼하겠지.
역시 난 너의 눈물은 보고 싶지 않은걸.
“그러니까.”
아샤 요정의 본체인 거대한 아샤 나무. 그는 가만히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꽃송이가 남아 있지 않은 나무는 앙상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 세계의 한 축인 용이 불안정하 기에, 그녀에게도 영향을 끼치는 것 이리라.
더 이상 자신 때문에 그녀가 고통 받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다.
“남은 방법은 이것뿐이야.”
그는 우아한 동작으로 아샤 가지를 제 심장 안쪽으로 꽂아 넣었다.
용에게 유일하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반려의 일부.
자카리의 손발부터 딱딱하게 굳어진다.
이엘리는 경악했다.
“자카리!”
피를 토하는 것처럼 날카로운 비 명. 고통도, 눈물도, 비명도 없다.
다만 그는 실 끊어진 인형처럼 툭 자리에 주저앉을 뿐이다.
그 자리에 얼어붙은 그녀를 보며,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아.”
“뭐가 괜찮아!”
“그저 잠드는 것뿐이야.”
자카리의 입가에 미소가 서렸다. 이엘리를, 그리고 그녀가 사랑하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괜찮다.
아샤 가지가 심장을 꿰뚫는 순간, 자카리는 머나먼 과거를 문득 떠올렸다.
“나의 이엔.”
용으로 각성하기 전에 일부러 잊어 버렸던, 아니, 떠올리는 것조차 고통 스러워서 일부러 묻어 버린 기억이었다.
온몸이 돌처럼 무거웠다. 묵직한 눈꺼풀을 늘어뜨리며 자카리는 속삭였다.
“아니…… 나의 아샤.”
이 땅에 봄을 불러온 아샤는, 자신 이 베푼 기적으로 융성하게 자리를 잡은 인간을 동정하고 사랑했다.
감히 아샤의 혼의 일부를 갈취하 고, 용에게 반기를 든 리펜베르크 황가에게 조차 인간의 대표라는 이유 로 자비를 베풀 정도로.
그건 건국 전설에 교묘하게 감추어 진 진실이었다.
“너는 언제나 자비롭고 따스한 존 재였지.”
겨울의 은룡, 헤센바이츠의 반려인 봄의 아샤.
본디 이 땅에 없었던 봄을 불러 일으킨 봄의 요정과, 그리고 그녀의 자비에 기대어 성장한 인간.
봄이 찾아오면서 인간들은 문명을 일으켰고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샤 요정은 그런 인간들을 마치 자기 자식처럼 아끼고 사랑했다.
“이해해. 아마 넌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야.”
자신이 피워 낸 봄에서 태어나고 발전한 존재가 어찌 사랑스럽지 않을 수 있으랴.
헤센바이츠는 제 반려의 마음을 모두 이해했다.
하지만 언제나, 인간의 탐욕이 문제였다.
인간의 대표였던 에반은 아샤에게 품어서는 안 될 마음을 품었다.
바로 아샤 요정을 제 여자로 삼고 싶은 욕구였다.
‘당신을 갖고 싶어.’
그렇게 속삭인 에반이 진득한 열망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을 때, 아샤는 그런 에반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래서는 안 된단다, 아이야.’
아샤에게는 아마 그 반응이 당연한 것일 터였다.
하지만 헤센바이츠에게는, 아샤를 사랑하는 인간들의 감정 자체가 증오스러웠다.
'난 너희와 내 반려를 모두 사랑하 지만, 그 애정의 종류는 달라.’
그 문제에 있어서는 아샤와 헤센바이츠의 생각은 동일했다.
아샤는 언제나 에반과 인간들의 도가 넘는 요청을 거절해 왔다.
하지만 헤센바이츠는 고작 거절만으로는 참을 수 없었다.
‘아샤, 그들을 물리면 안 될까?’
‘…미안해.’
인간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아샤는 언제나 죄스러운 얼굴을 했고, 그리하여 헤센바이츠는 그녀에게 더 이상 인간들의 문제를 따져 물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다른 존재를 함께 사랑한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상처였다.
그 상처들은 차곡차곡 쌓여, 은룡의 심장을 할퀴는 가장 날카로운 칼날이 되었다.
'난 내 아이들을 포기할 수 없어.’
‘아샤.’
‘너를 포기할 수 없듯이…….’
그녀는 그의 반려였고, 그는 자신이 엄연히 그녀의 첫 번째를 차지할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
그녀를 독점하는 것이 제 욕심임을 알았기에, 그나마 최대한 물러난 거였다.
하지만 인간들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저희를 돌봐 주세요!’
'저희를 사랑해 주세요!’
저희는, 저희에게, 저희를…….
끝없는 요구들이 이어졌고, 아샤는 그런 인간들을 자식으로서 품어 보듬었다.
인간과 신도 하나 공평한 점이 있다.
시간과 베풀 수 있는 애정은 언제나 한정적이라는 것.
'아샤, 제발……’
그녀의 애정은 크고 넓었지만, 가끔 지나치게 공정했다.
그리하여 헤센바이츠는 아샤의 애 정을 나누어 받기 위해 노력해야했다.
‘사랑해.’
‘…….’
‘넌 영원히 나의 반려일 거야.’
하지만 아샤의 다정한 목소리는 헤센바이츠뿐 아니라 인간들에게도 쏟아졌다.
그에게 주어지는 애정은 점차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은룡은 그 사실이 너무나도 괴로웠다.
영혼까지 나누어 가진 반려는 언제 나 인간들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샤.’
너에게는 내가 중요하지 않은 거야?
난 너만 있으면 되는데, 넌 내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거니?
언젠가부터 은룡의 마음 깊은 곳에는 그런 의문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자신의 연약한 부분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아, 꽁꽁 숨겨 두고 사라지기만을 기다렸던 의문.
그러나 그 의문은 점차 몸을 키우고 자라서, 헤센바이츠를 통째로 먹어 치우고 말았다.
“하지만 난 말이지.”
오래된 과거를 헤집어 되새기던 자카리는 비스듬히 시선을 내렸다.
푸른 눈동자 안에 가없는 애정과 서글픔이 가득 고였다.
“난 너의 그 점을 가슴 깊이 사랑 하면서도, 가끔씩은……”
이엘리는 입술을 짓씹었다.
그 감정을 이해하고야 마는 자신이 미워 견딜 수 없다.
과거의 그녀가 은룡에게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자카리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나에게만 온전히 오지 않는 너의 그 애정이 너무 버거웠어.”
인간의 대표이자 용과 아샤 요정을 알현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자, 리펜베르크의 에반.
하지만 그는 아샤를 보자마자 한눈 에 사랑에 빠졌다.
품어서는 안 될 애정의 결말은 파국이었다.
“에반은 널 소유하지 못하자, 결국 널 죽이려 들었지.”
“……자카리.”
“솔직히 말하자면 모든 인간을 죽이고 싶었어. 하지만, 하지만……”
자카리의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꺼 질 것처럼 가늘어졌다.
오래된 증오는 이제 진득한 늪처럼 발목을 움켜쥐고 있어, 영영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차라리 스스로를 죽이면 편해질까, 하루하루를 고뇌로 살아가던 그에게 유일한 구원이던 단 하나의 말.
아샤가 마지막 남긴 약속.
“그때의 네가 나에게 약속했잖아.”
이엘리는 숨을 삼켰다.
새파란 눈동자 안쪽에 고인 감정이 너무 아팠다.
자카리가 소곤거렸다.
“내게…… 꼭 돌아오겠다고.”
어느 강대한 영혼이든지 간에, 죽음 후에는 이 세계를 떠나야 한다.
환생의 고리에 들어가 깨끗하게 혼 백이 씻겨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샤는 떠나기 직전, 은룡에게 약속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