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너를 공격하고, 집착하고.”
이엘리. 나의 여신. 세계 따위는 필요 없었다.
자카리에게 필요한 건 오로지 이엘리뿐이었다.
“너를 제 손안에 두고 휘두르려 하 지.”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멋대로 누군가를 박해하거나, 경외하거나, 기대를 거는 미물들.
어째서 그런 미물들에게 끝없이 자 비를 보여야 하나.
자카리는 이제 그 이유를 알 수 없게 됐다.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을 나의 아샤에게, 감히.”
자카리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감정이 스며들었다.
그 감정은 이엘리에 대한 압도적인 애정과, 이 세계를 향한 서늘한 분노였다.
그 말을 들으며 이엘리는 등골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자카리.”
“차라리 이런 쓸모없는 세계 따위 부수어 버리고.”
푸른 시선에 반짝, 빛이 돌았다.
압도적인 재해가 의지를 갖는다면 이런 모습이 되지 않을까.
“너와 나, 단둘이 남아 있고 싶어.”
한숨 같은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와 닿았다.
용의 분노에 세계가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 * *
이엘리를 지켜야 해. 그녀를 고통스럽게 하는 세상을 두고 보느니, 차라리 나와 그녀 단둘이 남는 세계 가 훨씬 낫지 않을까.
어째서 이 세계가 존재해야 하나. 오랫동안 풀리지 않던 의문.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넌 내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
'그게 무슨 뜻이지?’
'너만큼은…… 세계를 파괴하려는 그 충동에 휩쓸리지 말라는 뜻이야.’
자신을 말끄러미 바라보던 은룡 헤센바이츠.
자카리는 오히려 그에게 묻고 싶었다.
어떻게 그 충동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지? 목숨을 주어도, 아니 세계와 맞바꾸어도 아깝지 않을 사랑하는 여인이었다.
그런 여인에게 이 세계는 언제나 시련만을 준다.
부숴 버려야 마땅하지 않나.
‘왜냐하면 그녀가 슬퍼할 테니까.’
은룡의 서글픈 대답이 들려온 듯하 다.
동시에 자카리의 의식이 깊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거대한 재앙, 세계를 멸하기 위한 겨울의 화신.
겨울을 지배하는 강대한 재해로 각성한 자카리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은룡이 눈을 뜬 그 순간, 세계에 영원한 겨울이 내려앉았다.
과앙! 냉기 섞인 바람이 폭발하듯이 휘몰아쳤다.
건물의 위쪽이 터져 나갔다.
새파란 하늘 아래로 새하얗게 얼어 붙은 건물의 파편들이 하늘 위로 치 솟아 올랐다.
매서운 바람에 파편들은 순식간에 가루처럼 분쇄되어 버렸다.
투명한 얼음 가루들이 눈이 아리도 록 반짝이며 빛났다.
“……”
자카리는 내리떴던 속눈썹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인간임을 증명하는, 감정이라곤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은 빙해 같은 눈동자.
새파란 눈동자엔 파괴 욕구만이 하얀 성에 처럼 서려 있었다.
“자카리?”
반사적으로 힘을 끌어올려 사람들을 보호하던 이엘리는 멍하니 자카리를 바라보았다.
인간의 외피를 쓰고 있되, 눈앞의 자카리는 더 이상 이엘리가 사랑하고 존중하는 남편이 아니었다.
“자, 자카리.”
이엘리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자카리를 불렀다.
하지만 자카리에게는 그녀의 목소리 자체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온통 무너지고 부서진 건물 사이로 그는 자박자박 걸음을 옮긴다.
그의 발이 닿는 자리마다 쩡 소리와 함께 서리와 얼음이 얼어붙었다. 깨진 유리처럼 반짝인다.
“처음부터 널 죽였어야 했어.”
바닥에서 바르작거리는 에반을 내려다보며, 자카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얼음으로 빚어낸 양 서늘한 얼굴. 황제의 외피를 덮어쓴 에반은 경악에 찬 낯으로 그를 응시했다.
“괴, 괴물.”
“……”
“너 같은 괴물이, 감히 나의 아샤와 어울린다고 생각하나……!”
두려움에 짓눌린 목소리로도 에반은 자카리를 매도했다.
그 매도를 들으면서도 자카리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다만 갸웃 고개를 기울였을 뿐이다. 새파란 눈동자가 금세 가늘어졌다.
“그런 건.”
에반을 향하는 소름 끼치도록 냉정 한 목소리엔, 감정이라고는 단 한 조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너 같은 하찮은 미물이.”
사실을 언급하는 단정한 그 시선. 사형을 선고하는 재판관처럼 자카리는 냉엄하게 선언했다.
“정하는 게 아니다.”
그와 동시에 에반의 온몸이 얼어붙 기 시작했다.
흰 성에가 구석구석 달라붙는가 싶더니, 금세 손발 끝이 차가워졌다.
에반의 눈동자에 경악이 가득 찼다.
자카리는 고개를 숙여 말했다.
“너희 미물들은 언제나 자신밖에 모르더구나.”
자카리의 입술에는 서늘한 비웃음 만이 서려 있었다.
조소를 숨길 생각조차 않는 그의 오만한 얼굴.
“애초에 아샤의 동정심이 아니었다면.”
고개를 내려 에반을 위아래로 훑어 보는 자카리의 표정은, 이미 인간의 선을 넘어선 자 특유의 것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기세등등하던 에반의 낯에 공포가 차오르는 건 순식간이었다.
“너희 혈족은 지금껏 존재할 수조 차 없지 않았나.”
에반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확대되었다.
회색 눈동자가 두려움과 혼란을 품고 파르르 떨렸다.
“……더러운 인간들 같으니라고.”
그 목소리 안쪽에는 혐오감이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자카리가 마지막 말을 내뱉 은 그 순간.
“커, 헉……!”
에반의 입술 사이로 억눌린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쩌저적, 소리와 함께 에반의 몸에 금이 갔다.
자카리는 곧장 꼭 한번 눈짓을 했다.
그 순간, 에반의 몸이 파사삭 온몸 이 부서졌다.
“크아악!”
에반은 찢어질 것처럼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산 채로 얼어붙어, 약간의 충격만으로도 툭툭 떨어지고 부서진다.
피조차 흐르지 않는 새빨간 단면은 마치 장난감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
“……”
죽음과도 같은 침묵이 흘렀다. 사람들은 공포에 질린 눈동자로 헤센바이츠 공작을, 아니 한때는 인간이었던 '그 무언가’를 지켜보았다.
그는 비스듬히 시선을 들어서 인간 들을 돌아보았다.
“역시 이 세계는 필요 없어.”
픽 미소를 흘린 ‘무언가’는 그렇게 선언했다.
주변의 사람들은 숨을 죄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그건 생물이 본능적으로 느끼게 되는 공포였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차디찬 공포.
“사, 살려 주십시오……”
이름 모를 이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는 정말 의아하다는 것처럼 되물을 따름이었다.
“어째서 내가 미물들을 살려야 하지?”
‘겨울의 은룡’이란 그런 존재였다. 압도적인 자연재해와도 같은 것. 재해에는 의지가 없다.
눈 폭풍이 모든 것을 얼어붙게하여 파괴하는 건, 그저 눈 폭풍이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용 또한 마찬가지였다. ‘인간’의 눈 높이로 감히 판단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자카리 널 이대로 내 버려 둘 수는 없잖아.
이엘리는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난 널 포기하지 않기로 결심했으니까.’
이엘리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내디딘 걸음 아래로 바삭거리며 새 하얀 성에가 부스러진다.
“왜냐하면 내가 그걸 원하니까.”
새싹 같은 연녹색 눈동자가 도전적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멈칫한 그가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난 이 사람들을 지키고 싶어.”
“어째서?”
그렇게 말하는 자카리의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졌다.
감정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았던 그의 얼굴은, 오로지 이엘리를 마주 할 때만큼은 갖가지 표정을 드러낸 다.
자카리가 사납게 입을 연다.
“너는 언제나 미물들에게 관대했 지.”
“자카리.”
“하지만 난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이엔.”
그렇게 말하는 자카리는 눈과 얼음으로 만들어 낸 조각상 같았다.
일견 고요해 보이는 그 표정은 오히려 수많은 감정들을 억누르고 있기에 가능했다.
그중 가장 크게 느껴지는 것은, 역시 ‘분노’와 '증오’.
인간, 그리고 이 세계 자체를 향한 강렬한 감정이었다.
‘이대로는 안 돼.’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눈앞에서 있는 그에게서 이질감이 느껴졌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다.
‘자카리 안의 은룡이 눈을 뜨면…… 세계는 정말로 멸망할지도 몰라.’
그것만큼은 막아야 해.
이성적인 판단보다도 힘이 먼저 발현했다.
동시에 세계가 뒤집어졌다.
* * *
이엘리가 가장 먼저 느낀 건 온몸을 물어뜯는 것만 같은 맹렬한 추위였다.
눈에 닿는 세상은 온통 희었다. 새하얗게 눈보라가 일어나, 시야를 가리는 세계.
이엘리는 움찔 어깨를 굳혔다.
“……아파.”
자카리의 과거, ‘은룡 헤센바이츠’ 가 남겨 두었던 손등의 주술이 욱신거렸다.
손등을 감싸 쥔 이엘리는 은룡이 했던 말을 다시 한 번 되새겼다.
그러니까지금 이곳은 일종의 이공간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곳. 세계에 속해 있으면서도 속해 있지 않은…… 마법으로 만들어진 세계.’
이공간에 연결된 문을 연 대가인 지, 온몸에서 기운이 쭉 빠진 상태 에 그녀는 한숨을 삼켰다.
‘꿈과 현실의 경계. 은룡과 아샤 요정, 단둘만을 위해 만들어진 장 소.’
화사하게 꽃이 만개해 있던 아샤 나무는 이제 바짝 메마른 상태였다.
청명하던 하늘은 이제 거무스레한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뾰족한 나뭇가지는 창날처럼 하늘을 갈기갈기 찢어 놓는다.
금방이라도 먼지처럼 부스러져 사라질 것 같은 모습이다.
그녀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 세계는 아샤와 은룡의 힘으로 이루어진 세계이니까.’
세계를 구축하는 두 축 중 하나가 폭주 직전에 휘말려 있었다.
무너지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하 다.
내가 정말로 자카리의 폭주를 멈출 수 있을까? 이엘리는 손끝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자.’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이 세계가 현실 세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이곳이 현실 세계에 어느 정 도 영향을 끼치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당장 자카리의 폭주 때문에 세계가 파괴되지는 않을 터였다.
이엘리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간을 좁히며 상황을 파악하려 애 썼다.
‘그렇다고는 해도 아예 영향이 없지는 않을 거야. 아샤 요정의 본체는 이곳에 있으니까.’
현실 세계가 아직까지 봄을 잃어버리지 않은 이유는, 아직 이 세계에 남아 있는 아샤 요정의 본체 덕분이었다.
그렇다면 이 세계에서의 자카리의 폭주가 현실 세계에도 영향을 끼치기 전에, 어떻게든 그의 폭주부터 멈춰야만 한다.
자카리, 어디 있지? 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자카리?”
하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잠시 후, 자카리를 발견한 이엘리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짓씹었다.
그는 거대한 아샤꽃나무 아래에서 있었다.
이엘리는 애써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서 뭐해?”
“……”
자카리는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양 휘청거리는 모습이었다.
“이엔.”
그렇게 말하는 자카리의 목소리는 온통 쉬고 갈기갈기 갈라져 있었다.
이엘리를 응시하는 새파란 눈동자는, 단 한 번도 녹지 않은 빙하처럼 시렸다.
그 시선에 그녀는 자리에 얼어붙었다.
“나는.”
“……응?”
“언제나 실패만 하게 돼.”
그렇게 말하는 그의 낯은 허망했다.
스스로에 대한 환멸과 원망이 가득 찬 목소리로 말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려 했는데.”
자카리의 이성은 이미 조각조각 잘려 나간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