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건국 황제, 에반 리펜베르크.”
이엘리의 얼굴은 얼음으로 빚은 양 서늘했다.
그리고 이엘리는 홱 황녀를 돌아보았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여 굳어있던 황녀는, 이엘리의 절박한 시선에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황녀 전하, 사람들을 데리고 당장 여기서 도망쳐요.”
이엘리는 단호한 어조로 황녀에게 말했다.
이엘리의 말을 들은 황녀의 눈동자에 결의가 서렸다.
고개를 끄덕인 황녀는 곧 몸을 돌렸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덜덜 온몸을 떨고 있었다.
“이, 이건 도대체……”
“황제 폐하께서 왜 저러시는 거 지?”
자카리가 발현하는 겨울의 마법도, 황제가 개방한 ‘아샤의 축복’도 사람들은 모두 처음이었다.
그 말은 곧 고대의 마법에 취약하 다는 소리다.
또한 마력은 인간의 생명력과 반하는 힘이었다.
‘저 힘에 닿으면 안 돼.’
황녀는 본능적으로 그렇게 느꼈다.
그를 알고 있는 공작도 어떻게든 황제를 막는 것일 터.
“다들 이쪽으로 와요!”
황녀가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그 말에 사람들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황후는 황녀를 도와 사람들이 건물을 벗어날 수 있도록 돕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두 건물을 빠져 나갔을 때.
“세상에, 저게 무슨……”
“저희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 건 가요?”
사람들은 황망한 얼굴을 했다. 건 물 위쪽으로 일렁거리는 무형의 기운이 있었다.
마치 서로를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일렁이는 두 가지 기운.
사람들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것처럼 서서, 그 기묘한 광경을 두 눈 안에 담았다.
그와 동시에 광! 커다란 폭발음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꺄아악!”
“다들 뒤로 물러나요!”
황녀가 사람들을 지휘하여 뒤로 물렸다.
마치 북국에서 몰려온 것처럼 차가 운 바람이 온 사방을 휩쓸기 시작했다.
사시사철 기후가 온화한 남부에서는 거의 느낄 수조차 없는 바람이었다.
“……거, 거짓말.”
잠시 후, 황녀의 입술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사방이 쩌저정, 얼어붙기 시작했다.
차가운 바람 안쪽으로 새하얀 눈송이들이 뒤섞여 거대한 눈 폭풍이 되었다.
세계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이니스 홀에서 공작 부부와 에반은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이엘리, 아니 아샤 요정의 오래된 악몽. 낭만적인 포장지는 벗겨지고,
건국 전설은 칼날 같은 현실로 남았다. 그녀가 입을 연다.
“아샤는 단 한 번도 에반을 사랑한 적 없었어.”
그 말에 황제가 뻣뻣한 동작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엘리를 눈에 담은 채로, 활짝 웃는다.
“무슨 그런 서운한 말씀을 하시나, 나의 아샤.”
나의 아샤. 그 말을 듣자마자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저 존재는 더 이상 '황제’, 즉 ‘요 슈아’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회색 기사, ‘에반’은 이엘리를 향해 느른한 어조로 말했다.
“네가 날 사랑하여 너의 축복을 내게 남겼잖아.”
“뻔뻔한 소리를 하네, 네가 나의 일부를 빼앗아간 거잖아.”
이엘리는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에 반은 이엘리를 빤히 응시하는가 싶더니, 툭 대답을 뱉었다.
“사랑해서 그랬어.”
순간 그녀는 숨을 삼켰다.
사랑. 도대체 그 감정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오랜 기간 동안 사람을 얽어매나.
자신의 핏줄에 영혼을 고정시켜, 기나긴 시간 동안 변하지 않은 채 내려온 그 집착.
“사랑이라고?”
아샤 요정에게서 빼앗은 그녀의 혼의 일부, 즉 ‘아샤의 축복’이라 이름 붙인 그것을 매개로 했다.
아샤의 기억 일부가 담긴 영혼의 조각은 강력한 마력을 가지고 있었 고, 그리하여 황가에 전해져 내려오는 ‘아샤의 축복’이 완성되었다.
에반은 ‘아샤의 축복’이 각성될 때 마다, 잠들어있던 자신의 혼이 깨 어나는 주술을 걸었다.
‘아샤의 축복’을 각성하는 후손이 탄생할 때마다 회색 기사, 즉 ‘에반’의 혼이 부활했던 것이다.
“오로지 널 찾기 위해서, 널 기다리기 위해서, 너를 열렬히 사랑해서.”
마치 노래하듯이 에반은 그렇게 말했다.
요정이 가진 영혼의 조각인 ‘아샤의 축복’은 본디 인간에게 허용되지 않은 힘, 그 힘을 각성하는 후손이 천천히 미쳐 가는 건 에반에게 그리 중요한 일도 아니었다.
애초에 리펜베르크 황가 자체가 아샤 요정을 기다리기 위한 존재였으므로.
“아니, 너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야.”
이엘리는 질린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요슈아, 아니 에반의 눈동자가 집 요하게 그녀를 담는다.
“넌 언제나 내게 그렇게 말했지.”
“……에반.”
“하지만 사랑이란 감정은…… 각자 정의하는 방식이 다른 게 당연하잖아?”
그렇게 말하는 에반의 눈동자는 거의 까맣게 보이는 짙은 회색이었다.
반들거리는 그 시선이 이엘리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잠시 후, 그가 입술 끝을 말아 올려 미소를 지어 보인다.
“아샤, 난 말이지.”
“……”
“온전한 너를 갖고 싶어.”
그 말에 자카리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감히 누구를 갖네 마네 지껄이는 건가, 혼령 주제에.
“미친 새끼.”
자카리가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에반의 눈동자가 데 구루루 굴러 자카리를 본다.
“꼴 보기 싫은 은룡도 여기 있었군.”
에반은 입술 끝을 비죽이 들어 올리며 웃었다.
하지만 에반의 관심은 오로지 이엘리에게만 향해 있었다.
에반은 어깨를 으쓱이며 이엘리에게로 고개를 돌렸고, 나긋한 목소리 로 속삭인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의 아샤.”
“나의 아샤라고 하지 마, 끔찍한 작자 같으니라고.”
이엘리는 차갑게 말을 끊었다.
그녀의 냉정한 말을 들으면서도 에 반은 어깨를 으쓱일 뿐이다.
“난 너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을 갖고 싶어.”
“여전히 돌아 버린 인간이로구나, 너는.”
이엘리는 질색을 했다. 에반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건국 전설은 완벽히 에반의 입맛에 맞도록 재창조된 가짜다.
그렇지 않고서야, 각성한 에반을 본 순간부터 이렇게 역겨울 리 없다.
“하지만 아주 만약에…… 내가 너를 가질 수 없게 된다면.”
하지만 에반은 이미 자아도취 된 상태였다.
그는 마치 연극이라도 하듯 과장된 어투로 말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너를 죽이겠어.”
“개소리 지껄이지 마.”
분노한 자카리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에반은 여전히 기분 나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은룡, 넌 끼어들지 마. 이건 나와 아샤의 문제야.”
“뻔뻔하기 그지없군. 이엔은 내 아내야.”
그렇게 말한 자카리가 서늘한 눈매로 에반을 노려보았다.
그 표정에는 온기라곤 하나 없었다.
“내가 내 아내를, 눈앞에서 네까짓 악령에게 빼앗길 것 같나?”
“길고 짧은 건 대어 봐야 아는 법 이지.”
그렇게 대답한 에반이 이엘리를 빤 히 응시했다.
회색 눈동자에는 애정과 증오가 뒤 섞여 있었다.
“아샤.”
“……”
“나와 함께 가겠지, 넌?”
이엘리는 눈썹을 까닥 치켜 올렸다.
그녀의 입술에 비웃음이 서리며 그대로 고개를 기울인다.
“아니.”
“넌 언제나 내게 그렇게 잔인했 지.”
그렇게 말하는 에반의 얼굴에 잔인 한 미소가 퍼졌다.
에반은 제가 가진 모든 힘을 개방했다.
“……너와 함께할 수 없다면, 차라리 같이 죽겠어.”
순간 이엘리는 두 눈을 커다랗게 치떴다.
제국을 세운 최초의 황제, 인간을 넘어선 강대한 힘.
오랫동안 쌓여 있던 비틀린 애정과 아집.
그 모든 감정들이 이엘리를 향하여 모조리 쏟아지고 있었다.
쾅! 다시 한 번 힘이 폭발했다.
서리서리 쏟아지는 힘이 주변을 쩡 울렸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건물이 미친 듯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우수수 먼지가 쏟아지는 그 모습 사이로,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우왕 좌왕 움직였다.
“사, 살려 줘!”
“꺄아악!”
그 혼란스러운 광경을 바라보던 에반의 얼굴 위로 기괴한 미소가 퍼졌다.
짙은 소유욕과 비틀린 애정이 점철된 미소였다.
“이게 무슨 짓이야!”
이엘리는 반사적으로 힘을 끌어내 어 그 힘을 막았다.
“큭!”
이엘리가 신음을 삼켰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에게 쏟아지던 모든 힘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반사적으로 허리를 편 그녀는 놀란 얼굴을 했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자카리의 뒷모습이 보였다.
“콜록!”
자카리가 거친 기침을 토해 내자 이엘리는 기절할 것처럼 놀라고 말았다.
그녀 자신을 향하고 있던 모든 힘 이 그에게 온전히 쏟아진 것이다.
오래되어 강대한 집착과 저주까지 도 모조리.
“자카리!”
깜짝 놀란 이엘리가 자카리의 팔을 끌어안았다.
거칠게 기침을 토하는 자카리의 입술 사이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그 순간, 자카리가 가졌던 ‘무언가’ 가 파삭 소리와 함께 깨져 나갔다.
“……더는 싫어.”
신음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린 자카리가 허리를 곧게 편 채 오만한 시선을 내렸다.
차가운 겨울의 힘이 몰아닥친다.
순식간에 인간의 선을 넘어 버린 자카리는, 이제 사람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자연재해처럼 느껴졌다.
담담한 그 눈동자를 응시하던 에반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은룡!”
에반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발악하 기 시작했지만, 자카리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엘리는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잠시 후, 자카리가 그녀를 가만히 돌아본다.
“이엔.”
“……자카리?”
이엘리는 멍하니 자카리와 시선을 맞추었다.
새파란 눈동자는 감정조차 한 조각 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투명한 그 눈동자가 이엘리를 똑바로 들여다보는가 싶더니, 희미 하게 미소했다.
“이런 세계를 굳이 살려야 할까?”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까지 널 위해 참아왔어. 네가 슬퍼할 테니까. 하지만……”
자카리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었다.
그가 새파란 유리알처럼 말간 시선이 그녀를 보며 확언했다.
“그 어떤 것도 너에 우선할 수는 없어.”
이엘리의 머릿속에 날카로운 경종이 울렸다.
자카리는 손가락을 탁 튕기는 것만으로 에반의 힘을 밀어냈다.
순식간에 파훼되는 그 힘.
과과쾅! 뒤로 밀려난 에반이 벽에 부딪쳐 쓰러졌다.
“억, 헉, 어억…… 괴물, 괴물 새끼!”
에반은 그 자리에서 벌레처럼 구르더니, 발작하듯 고함을 지른다.
쿨럭쿨럭 기침이 토해져 나왔다.
검은 피를 왈칵 토해 낸 에반이 비틀대며 기어가기 시작했다.
자카리는 손끝을 까닥거렸다.
“아아악!”
커다란 손이 에반을 짓누르는 것처럼 그의 몸이 바닥에 납작 억눌렸다.
흡사 벌레를 밝아 죽이는 맹수 같았다.
그렇게 행동하는 자카리의 얼굴엔 표정이라고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자, 자카리. 그만, 저 사람의 몸은 황제 폐하니까……”
“이미 에반이 모두 잠식했어. 황제의 영혼은 이미 죽었다는 걸 너도 알잖아?”
“하지만……”
그 말은 사실이었기에 그녀는 입술만을 짓씹었다.
그녀를 안에 담은 채 침묵하는 푸른 시선.
“이 세계는 네게 있어 하등의 도움 이 되지 않아.”
그렇게 말하는 자카리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얼굴은 흔들리지 않는 진 실을 말하듯이 담담했다.
“하찮은 미물들이 감히 너에게 소유욕을 보이고.”
자연재해와도 같은 압도적인 강함, 그리고 고귀함을 가진 용에게 있어 이 세계는 마치 장난감처럼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망가뜨리고 싶었던 이 세계를 건드리지 않았던 건, 오로지 이엘리가 자신의 곁에 있어서 였다.
하지만 이 세계는, 그녀에게 손을 댐으로써 선을 이미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