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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화 (162/196)

162화

론도 후작의 얼굴은 무섭도록 얼어 붙어있었다.

질문을 들은 황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 짐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보통,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에는 ‘의심’이라는 단어가 붙지 않죠.”

론도 후작은 냉철한 표정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주변에 모여 앉아 있던 귀족들이 술렁거렸다.

“론도 후작님께서……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사실이라니, 그렇다면 폐하께서 정말로 그렇게 행동하신 증거라도 있다는 말씀인가요?”

젠장. 황제는 입술을 당겨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론도 후작가는 귀족 가문들 중에서도 상당히 명망 있는 가문이었다.

제도 귀족의 대표 격인 후작이 저렇게 말하니, 다들 흔들릴 수밖에.

‘이 상황, 내게 전혀 유리하지 않은데.’

황제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게다가 최근 귀족들의 동태도 심상치 않았다.

후작가가 황제에게 대놓고 반발하는 것은 물론이고, 황제 또한 최근에 이성적이지 못한 행동을 자주 보였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귀족들이 황제에게 가지게 된 불신은 이제 슬슬 폭발하 기 직전이었다.

“황제 페하께서 ‘아샤의 축복’을 타고나신 이유는, 국민을 보살피기 위해서 아닙니까.”

황녀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황제는 눈에 날을 세워 황녀를 노려 보았다.

“폐하께서 받으신 그 축복은, 개인의 마음대로 휘두르기 위해 주어진 힘이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분위기는 이미 황녀에게 동조하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황녀는 마른침을 삼켰다. 참 이상했다.

지금까지 황녀는 언제나 제 오라비 인 황제를 두려워하는 삶을 살았는 데.

‘이번에는 무섭지 않아.’

모든 것을 제대로 된 방향으로 돌려놓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황녀가 입을 열었다.

“하물며 제국의 어머니인 황후 페하까지 암시를 걸어 멋대로 조종하려 하시다니요.”

그 말에, 그 자리에  모인사람들은 모두 경악하고 말았다.

황후는 제국의 어머니라는 그 위치를 제외하더라도 론도 후작가의 단 한 명뿐인 영양이었다.

론도 후작가 또한 제도 귀족들의 대표이자, 제국에서 단 셋밖에 없는 후작가였다.

함부로 암시를 걸어 조종할 대상이 아니었다.

“그 말이 사실입니까?”

“세상에, 사람을 조종하다니요!”

사람들은 혼란에 빠져 왁자하게 지 껄여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황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녀 전하의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그 말에 사람들은 다시 놀랐다.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던 황후는 차분 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황제 페하께서는 제게 '아샤의 축복’을 이용하여 암시를 거셨습니다.”

“……”

“……”

차가운 물 같은 침묵이 흘렀다. 하긴, 믿기 어렵겠지.

황후는 비스듬히 웃어 보였다.

아무리 황제 폐하라 해도, 그렇게 막 나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터였다. 하나 이것이 진실이었다.

“그리고 제게 이 약을 주셨지요. 황녀께서 드실 음식에 섞으라는 뜻 이었습니다.”

황후의 손에 들린 유리병을 사람들은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반투명한 보라색 액체가 찰랑거리는 유리병.

그 액체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황후는 냉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전 하마터면 그 암시에 따를 뻔했 습니다.”

그 말에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황후가 말하는 것이 무슨 뜻을 가 지고 있는지, 모든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언제든지 자신도 그렇게 이용당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헤센바이츠 공작 부인께서 ‘아샤의 축복’을 파훼해 주시지 않았더라 면, 전 정말로.”

그 사실을 상기해 준 황후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 이후, 황후가 미간을 좁히며 말을 맺었다.

“황녀 전하의 목숨을 제 손으로 빼 앗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황후는 단호한 눈동자로 그들을 본다.

경악이 휘몰아쳐 사람들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또한 론도 후작가는 황위 계승권을 가진 황녀를 해한 죄로 멸문당했을 것이고요.”

이 일은 그대로 넘길 수 있는 일 이 아니었다.

“그리고 마침 이 자리에는 공작 부부께서 참석해 계십니다.”

그렇게 말한 황후가 슬쩍 공작 부부가 앉아 있는 로열석을 곁눈질했다.

이엘리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암시가 풀리자 황제의 속뜻은 순식 간에 파악이 가능했다. 너무 투명했으니까.

“만약 이 암시가 풀리지 않았더라 면, 전 제 행동을 공작 부부께서 지시했노라 증언했겠지요.”

황제는 이제 주먹을 꽉 움켜쥔 채, 그 자리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새하얗게 질린 그 얼굴이 만족스럽다.

황후가 빙그레 눈웃음을 지었다.

“완벽하게 폐하의 입맛에 맞는 과정 아닙니까?”

“황후.”

“폐하께서 황녀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건 저희도 이미 알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황후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드디어 저 지긋지긋한 황제와 연을 끊을 수 있다는 사실에, 황후는 내심으로는 꽤 즐거웠다.

지금껏 맞지 않은 옷을 입고 산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론도 후작가도 황제 폐하와 몇 번이고 대립했었죠.”

“그 입 다무시오!”

“황제께서 저를 대하는 최소한의 배려가 없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황제가 버럭 고함을 질렀으나, 황 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황제에게 되물을 뿐이었다.

“어떻게 제 아내이자 제국의 어머니인 저를, 이런 암살 사건에 이용 하려 한단 말입니까?”

“……!”

황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황후의 그 말을 받아서, 황녀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지금껏 폐하께서 국정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계셨던 것, 알고 있습니다.”

황제가 홱 황녀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황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에게 조목조목 따져 물었다.

“헤센바이츠 공작 부인에게 보이는 비이성적인 관심도 그렇습니다.”

황녀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오랫동안 품어 왔던 말이었다.

그만큼 날카롭게 폐부를 찌른다.

“이렇게 선을 넘은 행위는 역시, 용서받아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안네로제, 그 입 닥치지 못해!”

어느새 평소의 여유로운 태도를 모 두 잃어버린 황제가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황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황녀 또한 지나치게 오래 참아 왔 던 것이다.

황녀는 사나운 기세로 일갈을 했다.

“언제까지 황제 폐하의 이성적이지 못한 행동 때문에, 제국이 피해를 입어야 합니까?”

“네가 감히 나에게!”

와락 화를 내던 황제가 문득 어깨를 굳혔다.

주변 공기가 제게 적대적임을 느끼고 만 것이다.

“폐하, 무어라 말씀 좀 해 주십시오!”

“해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평소 황가와 대립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입을 다물고 있던 사람들까지, 모두 한 목소리를 내어 황제를 질책했다.

황제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었다.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 있었다.

‘이건 아니야.’

황제의 혼탁한 회색 눈동자가 딱딱 하게 굳어졌다.

그는 황제였다.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지존의 자리에  오른 자.

어떤 사람도 황제에게 반기를 들어서는 안 된다.

미물들은 그의 말에 복종해야만 한다.

그의 권위는 절대 무너져서는 안 되었다.

그런데.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이건 부당해.’

혼란에 빠진 황제의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맞아, 이건 모두 부당한 일이야.’

“……”

그 말을 들은 황제가 멍하니 시선을 들어 올렸다.

당신은 누구지? 그렇게 물어보려 하던 때.

‘내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마치 황제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누군가가 대답했다.

그러고는 유혹하듯 속살거린다.

‘넌 제국의 황제야. 이 너른 영토를 통치하는 주인이자 군주지.’

“뭐야, 너.”

‘그런데 그런 네게 사람들이 반발하고 있지 않나.’

누군가는 황제에게 달콤한 목소리 로 대답했다.

한편, 사람들은 갑자기 허공을 바라보며 횡설수설하는 황제를 당황하여 바라보았다.

황제의 기이한 행동은, 광인의 그것 같았다.

‘어때. 내가 이 모든 상황을 바꿔 줄 수 있는데.’

그때, 목소리만 인지되는 누군가가 선심을 쓰듯 그에게 말했다.

웃음 섞인 목소리로 속삭인다.

‘나와 손을 잡지 않겠어?’

그리고 황제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목소리를 거부하지 않는다.

거부할 이유도 없거니와, 그 목소리만 따르면 무엇이든지 잘 풀릴 것 같은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이제…… 어떤 것도 필요 없어.”

그렇게 말하는 황제의 표정은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다.

황제는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에게는 아샤만 있으면 돼.”

아샤? 순간 이엘리는 놀란 얼굴을 했다.

아샤라니, 여기서 그 이름이 왜 튀 어나오는 거지?

‘잘 생각했어.’

그렇게 대답하는 목소리는 굉장히 기쁜 것처럼 들렸다.

황제는 누군가와 손을 맞잡기라도 하는 것처럼 허공에 손을 뻗었다.

황제의 입술이 휘어지는 그 순간. 쾅! 강대한 힘이 폭주했다.

 순간 이니스 홀은 거대한 혼란 속 에 빠져 버렸다.

마치 미친 사람처럼 횡설수설하던 황제에게서, 폭발하듯이 거대한 힘 이 사방으로 뻗어 나온 것이다.

자카리는 반사적으로 힘을 펼쳐 내어 황제가 폭주하는 힘을 막았다.

그가 미리 막지 않았더라면 인명 피해가 발생했을지도 모른다.

“자카리!”

놀란 이엘리는 자카리의 팔을 붙들었다.

그가 잔뜩 미간을 좁히면서 황제를 노려보았다.

“지금, 저 작자. 이상해.”

얕은 신음을 흘리며 자카리가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가 툭툭 끊겼다. 거의 정신을 놓아 버린 것 같은 황제가 그 자리에서 휘청거렸다.

그와 동시에 황제에게서 퍼지는 힘 이 용트림 쳤다.

쾅!

황제를 중심으로 커다랗게 건물이 진동했다.

“까악!”

“으악, 이게 뭐야!”

사람들이 다시 비명을 내질렀다. 황제는 이제 완벽하게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황제의 옷이 마치 날개처럼 펄럭거렸다.

희번덕거리는 눈동자가 천천히 치 솟아 군중들을 쏘아보자, 그를 중심으로 날카로운 바람이 미친 듯이 불어닥쳤다.

마치 잘 갈린 칼날처럼 예리한 바 람에, 사람들의 피부에 미세하게 상 처가 남을 정도였다.

“큭!”

자카리가 숨을 삼켰고, 이엘리는 멍하니 황제를 응시했다.

잠시 후,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강제적으로 힘이 개방된 거야.”

“힘이 개방됐다고?”

자카리가 다급한 어조로 그녀에게 되물었다.

이엘리는 입술을 당겨 물었다.

은룡 헤센바이츠가 했던 말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회색 기사에게서 이엘리의 일부를 되찾아야 한다는 그 말.

“아샤의 축복…… 내가 잃어버렸던 나의 일부.”

“그게 무슨 소리야, 이엔!”

자카리의 외침에 이엘리는 눈을 깜 빡였다.

흩어진 퍼즐이 조각조각 맞춰지듯이 기억이 돌아오고 있었다.

딱딱 자리를 채우는 기억들. 그녀는 빠른 말씨로 자카리에게 설명했다.

“지금 저 사람은 더 이상 황제가 아니야.”

“그럼 누구인데?”

“회색 기사.”

그 말에 자카리는 순간 침묵했다.

이 땅에 리펜베르크의 이름을 붙인 자, 은룡 헤센바이츠와 대립한 자, 아샤 요정의 사랑을 쟁취하여 축복을 얻은 자, 그리고 오래된 건국 전 설의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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