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 화
“황후 폐하의 탓이 아니예요. 그보다, 뭔가 이상했던 적이 없었나요?”
그 질문에 황후는 멈칫 어깨를 굳혔다.
커다랗게 숨을 삼키는가 싶더니, 황후가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께서 저를 찾아오셨 어요.”
솔직히 말하면 그리 반갑지 않은 만남이었다.
무엇보다도 황제가 황후를 찾아온 것 자체가 의외였다.
그때 나눴던 대화를 어떻게든 떠올려 보기 위해 황후는 미간을 좁혔다.
‘그런데…… 생각이 안 나.’
황후는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히 황제가 찾아왔었다.
하지만 그 순간부터 기억 일부가 잘려 나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기억나는 것은 당시의 소름 끼쳤던 기분 뿐이었다.
누군가가 영혼 가장 깊숙한 곳까지 후벼 내어, 그 안쪽에 끔찍한 무언 가를 강제로 심어 놓은 것 같은 느낌. 맞아, 그랬었다.
“그때 무슨 대화를 했는지는 정확 히 기억나지 않아요. 하지만……”
단 하나 기억나는 건, 그 끔찍한 걸 어떻게든 거부하려 했었던 자신.
저도 모르게 되물었었다.
‘제, 제가 왜 그래야…..’
‘할 수 있죠?’
황후를 똑바로 바라보던 황제의 회색 눈동자.
뱀처럼 빛나던 시선.
회색 시선을 보는 순간 이성은 까맣게 날아가고, 황제의 말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한다는 묘한 확신만 남았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당연히 그러셔야지.’
만족스럽게 웃고 있던 황제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리고 황제가 손에 쥐여 준 약병 까지도.
황제의 속삭임이 또렷하게 남았다. 황녀의 음료에 약물을 타기만 하면 모든 일은 끝난다 했다.
“폐하의 눈을 보는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요.”
황후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 기묘한 기분을 무어라 설명해야 할까.
스스로의 의지가 강제적으로 거세 되고 남의 의지로 몸이 움직이는 그런 느낌.
황후는 긴 숨을 토해 내며 말했다.
“무조건 황제 폐하의 명령을 따라야 할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요.”
이엘리의 눈동자가 서늘해 졌다.
황후가 느낀 모든 감각이 암시에 걸렸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폐하의 명령은 절대적이었어요. 그분이 세계의 진리이고, 기준인 것 같았죠.”
그렇게 말하던 황후의 목소리 끝이 토막토막 끊겼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다.
“그래서, 그래서 저는……”
“이건 황후 폐하 탓이 아니예요.”
이엘리는 단호하게 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암시에 걸려 있었던 사람이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리 없지 않나.
황후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던 이엘리는 힘을 주어 말을 이었다.
“오히려 이게 기회일지도 몰라요.”
자카리는 냉철하게 판단을 내리는 제 아내를 가만히 응시했다.
이엘리는 생긋 눈웃음을 쳤다.
“황제 폐하께서 ‘아샤의 축복’을 사사로이 이용했다는 증인이 생긴 거잖아요.”
리펜베르크 황가에 물려져 내려오는 오래된 고대의 마법, ‘아샤의 축복’. 타인에게서 쉽게 호의를 얻고, 타인의 마음을 조종할 수 있는 주술.
그 힘으로 누군가를 조종하여 뜻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한 것은, 기나긴 황가의 역사 속에서도 이번이 처 음이었다.
이엘리는 말을 맺었다.
“물론 황후 폐하께서 증언해 주셔 야 하겠지만요.”
이엘리의 그 말에, 황후가 얼굴을 가렸던 손을 내렸다.
그러고는 입술을 당겨 문 채, 조심스레 묻는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거죠?”
“황후 폐하께서는 제국의 어머니 이시자, 제도 귀족들의 수장이신 론도 후작님의 하나뿐인 외동딸이세요. 황후께서 마음을 단단히 붙드시면, 이번에야 말로 황제 폐하를 얽어멜 수 있어요.”
이엘리의 확고한 목소리에 흔들리 던 황후의 눈동자가 순간 또렷해졌다.
“지금 황제께서는 고대의 마법인 ‘아샤의 축복’을 함부로 활용하여, 무려 황후 폐하를 이용해 황녀 전하를 암살하려 하신 거예요. 게다가 그 암살 대상은 황위 계승권을 가진 분이시죠.”
조목조목 따져 말하는 그 말을 들으며, 황후 또한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이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는 기본적으로 명철한 사람이었다.
혼란에 빠져 있음에도 금방 이성을 되찾는다.
“이 사실이 밝혀진다면, 정계의 귀족들도 모두 등을 돌릴 거예요. 다만……”
“……다만?”
“론도 후작께서 저희를 도와주셔야 해요.”
이엘리는 힘을 주어 말을 맺었다. 혼란에 빠져 있던 황후의 얼굴에 점 차 단호한 빛이 서렸다.
“좋아요.”
“네?, ,
황후가 저렇게 선선히 돕겠다고 말 할 줄은 몰랐기에, 이엘리는 먼저 제안해 놓고도 약간 당황해 버렸다.
그와 동시에 이엘리는 깊은 감사함을 느꼈다.
그래도 황가와 대립하는 일인데, 황후는 그녀를 돕는다고 말해 주었다.
그녀가 자신을 얼마나 믿어 주는지 알 것 같은 느낌이었다.
황후는 이엘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제가 설득할게요.”
“황후 폐하, 그렇게 쉽게 결정하실 일은 아니예요.”
“괜찮아요.”
황후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가문의 흥망이 걸린 일임에도 저런 모습에, 그녀가 걱정될 정도다.
“하지만 황가와 적대하게 될 텐데요.”
“황가와의 적대요?”
황후가 피식 웃었다.
비스듬히 시선을 기울이는 황후의 표정은 처음으로 활기를 되찾아 자신만만했다.
예전 그녀가 ‘론도 후작 영애’의 이름 아래에서 자유로웠던 때 지었던 표정이었다.
“저와 황제 폐하와의 결혼은 오로 지 폐하의 의지만으로 진행된 거였어요.”
황후는 허리를 곧게 펴고 목을 똑바로 세웠다.
당당한 그 모습은 후작 영애의 자신감이었다.
“우리 가문이 원하지 않는 결혼을, 황가에서 강제로 진행했던 바로 그 때부터.”
오랫동안 생각해 왔었다. 언제까지 이런 출구조차 없는 결혼에 묶여 스스로를 죽이고 살아야 하나.
한때는 가문에 대한 책임감으로 결혼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먼저 배신한 쪽은 황제였다.
“황제 폐하와 우리 가문은 언젠가 갈라져야 할 관계였어요.”
“……”
“게다가 먼저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 건, 우리 가문이 아니라 오히려 폐하이지 않나요.”
황후의 얼굴은 얼음으로 빚어낸 조각상인 양 사늘했다.
황후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정계에서의 관계는 둘째 치더라 도……”
그 침착한 목소리에는 짙은 실망감 이 배어있었다.
일말의 기대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만약 절 아내로서 정말로 존중하셨다면, 제게 암시까지 걸어 조 종하지는 않으셨겠죠.”
이엘리는 황후가 내뱉는 그 말에 차마 반박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그건 폐하의 선택이었어요. 그러니 론도 후작가도 이제 선택해야겠지요.”
그렇게 말한 황후가 이엘리를 향해 생긋 웃어 보였다.
그 얼굴은 이미 마음을 결정한 것 같았다.
“그러니까 공작 부인께서는 심적 부담을 가지실 필요 없답니다.”
말을 맺은 황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엘리와 자카리를 번갈아 바라본 황후가 말을 잇는다.
“그럼 두 분,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제 아버지를 모시고 올 테니까요.”
“황후 폐하, 정말 감사합니다.”
“오히려 제가 감사하죠. 만약 공작 부인께서 저를 도와주시지 않았더라 면……”
황후는 무릎 위에 올려놓은 양손을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
드레스 자락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전 소중한 친구를 제 손으로 암살하게 됐을지도 모르니까요.”
황후의 목소리 끝은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이엘리와 자카리는 말없이 고개만을 끄덕거렸다.
그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공작 부부는 론도 후작에게 지금까지의 정황을 모두 설명해 주었다.
당연히 론도 후작은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그게 사실입니까?”
“저희가 론도 후작님께 거짓말을 해야 할 이유가 없지 않나요?”
이엘리는 오연하게 대답했다.
론도 후작은 손끝이 떨리는 것을 감추기 위하여 주먹을 쥐었다.
“그, 그렇다면…… ‘아샤의 축복’이 남용된다는 건.”
“언제든지 사람들이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이용당할 확률이 높다는 거 죠.”
이엘리는 잠시 말을 가다듬었다.
지금껏 황제에게 이용당하여 삶을 망친 이가 얼마나 많을까.
“바로 지금처럼 말이예요.”
황후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고, 론도 후작의 눈동자에 불꽃이 튀었다.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공작 부인의 말은 모두 사실이에 요.”
황후가 말을 덧붙였다.
떨리는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버지를 향해, 황후가 말을 이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제게 아샤의 축복을 이용해 암시를 거셨어요.”
감히 내 소중한 딸에게 암시를 걸었다니.
그 말을 들은 론도 후작은 어깨를 팽팽하게 당겼다.
“황녀 전하를 제 손으로 암살하고, 그 죄를 우리 가문에게 덮어씌우려 하셨죠.”
하마터면 가문이 멸문당 할 수도 있었을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황후는 서늘한 눈빛을 했다.
“그리고 우리 가문이 그렇게 행동 한 배후에는 헤센바이츠 공작가가 있다고 주장하려 했어요.”
그렇게 말한 황후가 이엘리를 슬쩍 돌아보았다.
날이 서 있던 눈동자가 약간은 부드러워졌다.
“공작 부인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전 아직도 암시에서 조차 풀려나지 못했을 거예요.”
공작 부인이 ‘아샤의 축복’을 파훼 하던 그때가 떠오른다.
황후를 얽어매고 있던 단단한 밧줄 이 풀리며, 순식간에 자유로워지던 그 느낌.
황녀는 쿵쾅쿵광 뛰는 가슴을 손으로 지그시 눌렀다.
“가장 소중한 친구를 제 손으로 죽일 뻔했다니…… 전 아직도 소름이 돋아요.”
그대로 황후는 가볍게 어깨를 떨었다.
후작은 대답할 말을 잃고 제 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버지.”
“……내 딸, 리체.”
그 말에 황후는 쓰게 미소 지었다.
오랜만에 들어 보는 그녀의 본래 이름이었다.
황후라는 직위에 짓밟혀 오랫동안 잊힌 이름.
아버지께서 불러 주시는 그 이름이 생경하면서도 그리웠다.
“아버지와 저도 이제 마음을 결정 할 때가 되지 않았나요?”
황후의 물음에 론도 후작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중한 딸이었다. 황후의 자리에 억지로 올라앉으면서 웃는 방법까지 까맣게 잊어버렸던 딸.
그런 딸이 황제의 수작에 빠져 죄를 저지를 뻔했고, 가문 또한 멸문의 길을 걸을 뻔했다.
이런 상황에서 후작이 선택할 건 하나뿐이다.
“공작 부부께 협조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엘리와 자카리는 담백하게 인사를 건넸다.
로열석 안에서의 짧은 회담은 그렇게 종료됐다.
* * *
그리고 다시 현재. 주변의 공기는 이제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황제는 당황한 낯을 했다.
“안네로저L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게냐!”
“말도 안 된다니요. 진심으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냉정한 표정으로 그렇게 맞받아치는 황녀를 보면서, 황제는 확 말문이 막혔다.
지금껏 소심한 얼굴로 황제의 말을 따르기만 하던 황녀였다.
내심 무시해 왔던 여동생이 저렇게 행동한다니.
'저 계집이 감히 내게 반발한다고?’
그 사실 자체가 황제에겐 정말 큰 충격이었다.
단 한 번도 제게 반항한 적 없던 황녀였는데, 이제 그녀는 또박또박 제 의견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된 것
이다.
바로 그때, 표정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황제를 향해 론도 후작이 입을 열었다.
“폐하.”
“뭡니까, 론도 후작?”
“폐하께서 하신 말씀을 책임지실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