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그건……!”
황제가 무어라 항변하려고 했다.
하지만 자카리는 여전히 단단하게 세운 벽을 허물지 않았다.
“폐하께서는 이미 몇 번이나.”
빙해처럼 새파란 눈동자가 황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안쪽의 황제는 약간 당황한 낯이다.
“제가 그어 두었던 최소한의 선을 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게 말한 자카리가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 끝에는 단호한 얼굴의 이엘리가 서 있었다.
황제가 제 아내의 납치 사건에 관 여했음을 알고 있다는 무언의 압박이며, 또한 황제와 더 이상 대화를 나눌 필요가 없음을 말하는 것이기 도했다.
황제가 입술을 잘근 당겨 물었다.
“……공작, 어째서 대화 자체를 거 부하려 하시는 겁니까?”
“두 가문의 관계가 이토록 엉망이 된 시발점은 폐하라고, 전 감히 생각합니다만.”
자카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황제에게 반박했다.
황제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해 버렸다.
“공작께서는 황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차리지 않으시는군요.”
대꾸할 말이 없어진 황제는 이제 예의 운운하기 시작했다.
엄연히 트집을 잡아 늘어지는 행동이었기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귀족들마저도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공작가와 황가의 관계는, 제 입으로 직접 인정하기는 뭣하지만 현재 최악입니다.”
자카리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 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공작가에 양해와 사죄를 구하기보다는 막무가내로 다가오셨지요.”
“막무가내라니! 어찌 황제에게 양해와 사죄를 운운한단 말인가!”
황제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자카리는 이제 한심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북부를 제국 밖의 존재로 만들었던 건 바로 폐하이십니다.”
정곡을 푹 찔러 오는 말에 황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북부에 부과한 세금. 그 문제가 이렇게 발목을 붙들 줄이야.
정치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된 빌미를 황제 자신이 주고 말았다.
“먼저 무례를 저질렀고, 그 무례 때문에 관계가 망가지고 만 거라면.”
자카리는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새파란 시선은 황제의 속을 모두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다.
“상식적으로 먼저 상대방의 의중부터 파악한 이후 행동하셔야 하는 게 아닙니까?”
“황제인 내가 이 정도로 먼저 굽혀 줬으면, 이쯤에서 공작도 굽혀야 하는 게 맞는 게지!”
황제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황제의 얄팍한 인내심은 이쯤에서 모조리 끊어져 버리고 말았다.
“폐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줄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습니다만, 막상 이렇게 듣게 되니.”
그런 황제를 말없이 바라보던 자카리는 이내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한다.
“역시 좀 실망스럽군요.”
“공작, 말조심하시오!”
“폐하께서 먼저 행동을 조심하지 않으셨는데, 저만 조심해야 할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당연하게 돌아오는 말에 황제는 말 문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황제는 속으로 욕을 뱉었다.
‘제기랄!’
가장 분한 건, 공작의 말이 내심 옳다고 생각하고 있는 황제 자신이었다.
가슴속 깊은 곳을 헤집어 놓는 공작에 대한 질투와, 그 질투를 감추기 위해 강제로 피어 올린 들불 같은 분노.
“황가의 상징이신 폐하께서 이런 식으로 행동하시다니.”
하지만 자카리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바짝 날이 선 냉소적인 말투였다.
공작가는 이미 황제의 무례함을 너무 오래 참았다.
그는 이제 직접적인 대립까지 불사 할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황가는 타 가문에 대한 예의는 잊어버린지 오래인가 봅니다.”
자카리는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입을이었다.
그때 보드라운 손이 자카리의 손을 쥐었다.
“자카리, 그만해.”
“……이엔.”
한껏 가시를 세웠던 자카리의 표정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그 이유는, 자카리를 똑바로 바라 보는 새싹 같은 연녹색 눈동자 때문이었다.
황제는 힐끔 이엘리를 바라보았다.
오만불손한 공작과 다르게, 그래도 공작 부인은 아직 황가를 대하는 예의를 알고 있군.
그가 속 편하게 생각하던 때였다.
“시간 낭비하지 마.”
가볍게 고개를 내저은 이엘리가 곧장 말을 내뱉었다.
황제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찌그러졌다.
“여기서 소모적인 말다툼을 하고 있느니.”
황제와의 대화를 단순히 ‘소모적인 말다툼’이라고 치부해 버린 이엘리가 사납게 미소 지었다.
“차라리 일찍 돌아가서 휴식이라도 취하는 편이 훨씬 더 낫겠어.”
“그래, 이엔. 네 말이 맞는 것 같네.”
이엘리의 말에, 자카리는 솜털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가 빙긋 마주 웃었다.
“역시 내 아내는 현명해.”
“그저 사실을 말한 것뿐인걸.”
가볍게 어깨를 으쓱여 보인 이엘리는 보란 듯이 자카리의 팔을 끌어안았다.
누가 보아도 공작 부부의 다정한 금슬을 과시하기 위한 태도였다.
그리고 얼이 빠진 황제를 향해 생긋 눈웃음을 친다.
“그럼, 폐하.”
“헤, 헤센바이츠 공작 부인.”
“저희는 몸이 고단하여, 이만 물러 나겠습니다.”
낭랑하게 입을 연 이엘리는 자카리의 팔을 끌어안은 손에 힘을 준 후 그대로 말을 잇는다.
“부디 좋은 시간 보내시기를.”
“이게 무슨……!”
하지만 그녀는 황제의 말 따위 더 들을 생각조차 없었다.
공작 부부는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 * *
이번 전야제의 주인공이나 다름없었던 공작 부부가 전야제 초반에 자리를 비워 버렸다.
아무리 황제 일가가 전야제가 끝날 때까지 머무르고 있었다지만, 공작부부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분위기 자체가 전혀 달랐다.
험악한 얼굴을 한 황제로 인해 황녀와 황후가 필사적으로 분위기를 완화시키기 위해 노력했기에, 전야 제가 무사히 종료될 수 있었다.
“정말 피곤하네요……”
전야제가 끝난 이후, 방으로 돌아 가던 황후는 지친 얼굴로 황녀에게 소곤거렸다.
데친 배추처럼 축 늘어진 황녀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그래도 황제 폐하께서 그렇게 행동하셔서는 안 됐는데.”
황후가 한숨을 섞어 중얼거렸다.
엄연히 황가가 먼저 무례를 저지른 입장에서, 공작가에게 그런 식으로 굴어서는 안 됐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황후는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 사실 폐하께서 대화가 통하시는 분은 아니지만요.”
황제가 변할 거란 기대를 품느니, 차라리 내일 태양이 서쪽에서 뜨기를 바라는 게 나을 터다.
“그건…… 그렇죠.”
황녀도 황후의 말에 동의했다.
두 여자는 각자의 방에 돌아가기 전에,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잘 자요.”
“황후 폐하도 좋은 밤 되세요.”
두 여자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의 끝은 조금 씁쓸해 보였다.
어쨌거나 험난한 황궁 생활에서 유일한 친구이자 동지는 눈앞의 상대 밖에 없었으므로. 그들의 삶은 고단했다.
방 안에 홀로 앉아서 오늘 전야제의 일을 곱씹는 황제의 얼굴은 그리 편하지 못했다.
“……안 되겠어.”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황제는 결 국,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런 패배감에 계속 젖어있을 수는 없었다.
헤센바이츠 공작에 대한 열등감과 질투는 이제 악몽 속 괴물처럼 몸을 부풀린 채였다.
황제는 이미 그 괴물에게 마음을 빼앗겼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아무래도 빨리 일을 진행해야겠어.’
처음에는 조금만 더 기다려서 안전 하게 일을 진행하자고 생각했지만, 이제 그게 아니었다.
지금 당장 이 열패감을 해결하지 않으면 돌아 버릴 것 같았다.
가슴을 꾹꾹 조이는 수많은 감정 들.
그 위로 방점을 찍는 이엘리의 경멸에 찬 얼굴. 결국 황제는 황후를 찾아가기로 결정했다.
* * *
“폐하?”
밤늦게 찾아온 황제를 보며, 황후는 눈살을 찌푸렸다.
황제는 황후에게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황후.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제게요?”
황후는 멈칫했다.
지금껏 황제가 황후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의 황제의 태도는 지나치게 부드러웠다.
게다가 상호 존대라니, 지금까지 황제에게 저런 배려를 찾아볼 수 있었던 적이나 있나.
급격한 변화는 기쁨보다는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럼요.”
“……”
“부부가 단둘이 오랜만에 오붓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도 필요하지 않겠 습니까.”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황후를 향하여 황제는 나긋하게 말을 이었다.
황후가 입술을 깨물었다.
“……저희가 언제부터 그런 오붓한 대화를 나눌 정도로 친밀한 관계였 습니까?”
“그렇게 말하시니 굉장히 섭섭합니다, 황후.”
황제는 슬쩍 눈썹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그러고는 마치 협박하듯이 제 아내에게 입을 열었다.
“론도 후작이 짐에게 불온한 태도를 취하는 건, 황후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겠지요?”
황후는 기가 막혔다.
론도 후작이 그렇게 행동하는 건 모두 황제 때문이었다.
소중한 딸을 허울뿐인 황후 자리에 앉힌 것으로도 모자라, 최근에 황제는 귀족들을 압박하는 정책을 펴고 있었다.
중앙 정계의 대표 격인 론도 후작이 황제와 대립하게 되는 것은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따지러 온 것은 아닙니다.”
뱀이 풀숲 아래의 은밀한 그늘을 스쳐 지나가듯 매끄러운 목소리였다.
황제가 황후를 불렀다.
“황후.”
“예, 폐하.”
“여기 보십시오.”
황제의 느른한 목소리에 황후는 무심결에 시선을 돌렸다.
황제의 회색 눈이 기이하게 빛났다.
“황후께서는 안네로제와 친근한 관계를 맺고 계시지요.”
“……폐하?”
황후는 순간 온몸을 스치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누군가가 차가운 손으로 벗은 등을 쓰다듬는 느낌이었다.
순식간에 온몸이 강제로 발가벗겨 지고, 의식의 가장 깊숙한 곳을 강 제로 드러내는 기분 나쁜 감각. 하
지만 황제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니 황후께서는 안네로제의 음식에 약 정도는 간단히 섞을 수 있을 겁니다.”
그 목소리를 듣던 황후의 어깨가 빳빳하게 굳었다.
지금, 뭐라고? 황후는 와락 미간을 구겼다.
“제, 제가 왜 그래야……”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대답이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황제는 슬며시 눈살을 찌푸렸다.
황후는 지금, 자신의 암시에 반항하고 있었다.
황제는 다시 한 번 힘을 주어 말을 이었다.
“할 수 있죠?”
“……”
황후의 눈동자가 순간 몽롱해졌다.
온 세상이 물렁물렁하게 느껴지는 반면에, 황제의 목소리만이 또렷하게 귀에 와닿았다.
가장 은밀한 곳에 침입한 무언가가 그녀의 의지와 마음을 지배하기 시 작했다.
약간의 이물감을 느끼긴 했으나, 황후는 금세 그 이물감에 적응하고 말았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당연히 그러셔야지.”
그제야 황제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는 멍한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 * *
아카데미의 행사가 진행되는 일주일 동안 학생들은 소규모로 제각기의 전시를 진행한다.
이엘리가 후원하는 학생들의 행사 가 열리는 날은 행사의 둘째 날이었다.
‘그리고 오늘 황제 일가가, 내가 후원하는 학생들이 여는 아카데미 행사에 참석하기로 했지.’
아침 일찍 일어나 행사를 관람할 준비를 하던 이엘리는, 문득 불쾌한 사실 하나를 기억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