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두 눈을 반짝이는 순진한 딸아이의 질문에 노련한 귀부인은 부채를 펼 쳐 입을 가리며 말했다.
“하지만 뭐…… 이번 방문으로 아 카데미의 행사는 전례 없는 호황을 누리게 될 거야.”
귀부인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국의 어버이인 황제와 황후가 참석했고, 유일한 황위 계승권자인 황녀도 함께했다.
무엇보다도 그런 황제 일가와 견주어 모자람 없는 헤센바이츠 공작가가 지원을 하고 있다.
이만한 경우는 아마 아카데미가 창설된 이래로 처음일 터다.
“연회에 참석한 귀족들의 눈에도 뜨일 수 있고, 잘하면 후원도 새로 받을 수 있을 테니까.”
“그, 그런 건가요?”
“그런 거란다, 아가.”
아직은 사교계에 대해 감을 잡지 못한 딸아이였다.
귀부인은 상냥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었다.
“너도 사교계에 오래 몸담기 위해 서는 이런 물밑 세력 다툼에 민감해 져야 해.”
영애는 잔뜩 긴장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부채를 접어 톡톡 치며 귀부인이 말했다.
“글쎄, 이번 기회에 우리 가문도 한둘쯤 재능 있는 학생을 지원할까 싶기도 하고……”
귀부인은 슬쩍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번 연회에는 아카데미의 교수들 과 학생들도 당연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수많은 귀족들 사이에서 대부분의 학생들은 상당히 긴장한 표정이었다.
“이번 행사에 참여한 학생들은 꽤나 좋겠어.”
귀부인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호황을 불러일으킨 공작 부인의 수완에, 그녀를 포함한 귀족들은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연회가 시작되 겠구나.”
헤센바이츠 공작 부인에 대해서는 귀족 사회에서도 여러 소문이 한창이었다.
낮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황제와 공작의 마음을 동시에 사로잡은 꽃 같은 미녀.
공작과의 이혼과 재결합, 그 와중 에 황제가 공작 부인에게 몇 번이고 구애했던 것까지 모두 호사가들의 입을 즐겁게 했었다.
게다가 최근에는 납치 사건과 북부 봉쇄령에 대한 이야기로 제국이 떠 들썩해지지 않았나.
고위 귀족들과 다르게 그녀를 실제 로 만날 기회가 없었던 중소 귀족들은 소문의 공작 부인에 대하여 상당 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궁금함을 못 이긴 귀족들이 연회장의 정문을 흘끔거리며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공작 부인은 현재, 황제와 만 난다는 사실에 신경이 상당히 예민 해진 상태였다.
“으, 정말 싫어.”
이엘리는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며 중얼거렸다.
그녀를 에스코트하던 자카리가 질문을 던졌다.
“왜 그렇게 기분이 안 좋아?”
“세상에서 제일 보기 싫은 인간을 만나야 하는데, 그럼 기분이 좋겠어?”
잔뜩 미간을 구긴 이엘리가 자카리를 돌아보았다.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준 그녀가 툴툴거린다.
“아니, 그 인간은 뭐 하러 아카데미까지 온다는 거야? 그냥 제도에나 있지.”
이엘리는 황제에 대한 적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자카리는 희미한 기쁨을 느꼈다.
황제를 만나느라 느껴야 하는 불쾌 감과는 별개로, 이엘리가 황제를 싫어한다는 것 자체는 기분이 좋았다.
“……뭐, 그래도 지금은 표정을 구기고 있으면 안 되는 상황이니까.”
한숨을 푹 쉰 이엘리는 허리를 곧 게 펴고 고개를 똑바로 치켜들었다.
어린아이처럼 투덜거리던 모습은 간데없이, 순식간에 우아한 귀부인으로 탈바꿈한다.
자카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리 이엔, 갑자기 흠잡을 데 없는 귀부인이 되어 버렸잖아?”
자카리가 장난스럽게 그녀의 뺨을 톡 건드렸다.
푸른 눈동자가 애정을 담고 그녀를 응시한다.
“뭐라는 거야, 난 원래 흠잡을 곳 이라곤 없었거든?”
이엘리가 새침한 눈초리로 자카리를 흘겨보았다.
그런 제 아내가 사랑스러워, 자카리는 또다시 웃음을 베어 물고 말았다.
잠시 후, 공작 부부는 한껏 금슬을 과시하며 연회장에 입장했다.
공작 부부가 연회장에 입장하는 순 간, 연회장 안쪽은 바람에 휘말린 호수 표면처럼 한껏 술렁거렸다.
그 정도로 공작 부부의 존재감은 대단했다.
황가나 대귀족가에서 주최하는 공식 연회가 아니었기에 시종이 직접 입장을 고하지는 않았음에도, 입장
하자마자 그들에게 시선이 몰렸다.
“드디어 공작 부부께서 오셨네요.”
“다들 어떻게든 눈도장이라도 한번 찍으려고 난리인걸요.”
귀족들은 다시 한 번 소곤소곤 목소리를 낮추어 대화를 나누었다. 사실 그럴 만도 했다.
제국 유일의 공작가이자 북부의 지 배자, 황가와도 견줄 수 있을 세력 가는 역시 유혹적인 법이니까.
“그건 그렇고 공작 부부께서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신 건, 납치 사건 이후로 처음이지요?”
공작 부인의 납치로 인해 북부에 대규모 봉쇄령이 내려졌던 것은 두고두고 회자되는 이야기였다.
이후 황가는 북부에 세금을 부과하는 방식으로 맞대응했으나, 공작가에는 타격이 딱히 없었다.
“맞아요. 여러 일화가 있으신 분이 시니, 어떤 분이실지 조금 궁금하기는 하네요.”
“황제 폐하에게도 자기의 의견을 굽히지 않는다는 소문은 들었어요.”
“아마도 주관이 확실하신 분인가 보지요?”
사실 이엘리를 바라보는 귀족들의 시선은 호의적이지만은 않았다.
그들에게 헤센바이츠 공작 부인은 대귀족가의 안주인이었고, 또한 공작과 황제의 사랑을 동시에 받았다.
게다가 황제와 망설임 없이 대립하 거나, 다른 이의 시선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여성 예술가들을 지 원하는 모습도 특별했다.
그랬기에 공작 부인이 콧대가 높을 거라는 나름대로의 편견이 있던 터였다.
“헤센바이츠 공작 각하, 그리고 공작 부인을 뵙습니다.”
하지만 그 편견은 순식간에 눈 녹 듯 사라지고 말았다.
용기를 낸 귀부인 하나가 공작 부부에게 정중하게 건넨 인사에 공작 부인이 살가운 목소리로 받아 준 것이다.
“어머나, 안녕하세요.”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정말 영광이예요.”
“아니예요, 오히려 제가 더 반갑지요. 내내 북부에 있었기에 이런 만남자체가 드물었답니다.”
공작 부인은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오히려 무뚝뚝한 건 공작 쪽이었다.
마치 공작 부인을 홀로 독점이라도 하고 싶다는 양, 제 아내에게 인사를 건네는 모든 사람들을 찬 시선으로 훑는다.
“자카리.”
보다 못한 공작 부인이 팔꿈치로 제 남편의 허리춤을 쿡쿡 찔렀다.
그가 그제야 뚱하니 입을 연다.
“반갑습니다.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무척 기쁘군요.”
비록 말투는 정중했으나, 그 표정이며 태도가 시큰둥하다는 것쯤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공작 각하께서는 계속 공작 부인 만 바라보고 계시네.’
인사를 한 귀부인은 흘끔 공작을 곁눈질했다.
공작의 눈은 오로지 공작 부인에게 향해 있었다.
“이번 아카데미 행사도 무척 기대 가 된답니다.”
“그러실 만도 하죠, 이번에 공작 부인께서 후원하시는 학생들이 많이 들 나오니까요.”
“부끄럽지만 제가 지원한 학생들이 열정이 넘치거든요. 후원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휴, 내가 못 살아. 공작 부인은 딱 그런 표정을 지으면서 대화의 주도권을 가져갔다.
공작은 제 아내가 대화하는 모습을 옆에서 빤히 지켜볼 따름이었다.
아내를 응시하는 공작의 눈빛이 어 찌나 달콤한지, 공작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귀부인의 입 안까지 달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적어도 공작 각하와 공작 부인의 금슬이 좋다는 소문은 사실인가 보네.’
귀부인은 머쓱한 얼굴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 다시 한 번 연회장 안이 술렁거렸다.
“황제 폐하께서 도착하셨어요!”
“황후 폐하와 황녀 전하께서도 함께 입장하시네요!”
그 말을 듣자, 애써 생글생글 웃고 있던 공작 부인의 표정이 처음으로 굳어졌다.
공작 또한 마찬가지다.
순식간에 싸늘해진 분위기에, 공작 부부의 근처에 있던 귀족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런, 헤센바이츠 공작 부부를 여기서 뵙게 될 줄은 몰랐군요.”
그때 유들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공작 부부는 똑같은 표정으로 목소리의 주인공을 돌아보았다.
불쾌감 가득해 보이는 얼굴에 황제가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연다.
“제국의 태양인 황제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는 겁니까?”
“제국 유일의 공작에게 최소한의 예의도 지키지 않는 폐하께 그런 말을 듣고 싶지는 않군요.”
자카리는 칼로 얼음을 깎아 조각한 것처럼 서늘한 얼굴로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황제가 얼굴을 확 붉혔고, 그 모습에 경악한 사람들은 헛숨을 들이마셨다.
하지만 자카리는 싸늘하게 빈정거 릴 따름이었다.
“아마 폐하께서는 북부가 페하께 머리를 조아리고 알아서 기었으면하고 바라셨겠지요.”
“헤센바이츠 공!”
“그런데 오히려 북부가 알아서 잘 사니까, 꽤나 분하기라도 하셨나 봅니다.”
분노에 찬 황제가 왈칵 언성을 높였음에도 자카리는 눈썹 한 올조차 까딱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겁에 질려 둘의 눈치를 살필 정도였다.
자카리는 냉정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먼저 세금 조치를 해제하실 정도 였다면, 처음부터 시도를 하지 마시 지 그러셨습니까?”
“공, 말이 심하십니다!”
“말이 심한 게 먼저입니까, 행동이 심한 게 먼저입니까?”
눈을 가늘게 뜬 자카리가 삐딱하게 되물었다.
황제는 이제 목덜미까지 벌겋게 물 들인 채였다.
“먼저 심한 행동을 저지르신 쪽은 폐하인 것으로 압니다만.”
세금 관련 문제로 공작가와 황가의 사이는 이미 최악으로 치달아 있는 상태였다.
황제를 앞에 두었을 땐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던 자카리는, 이번에는 말을 가리지 않았다.
평소라면 자카리를 진정시켰을 이엘리 또한, 호의적이지 않은 눈빛으로 황제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가 이어 말했다.
“이미 북부에게 세금을 물린 점에서.”
기웃이 시선을 기울여 황제를 응시하는 그의 눈동자에는, 온기라고는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폐하께서 북부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모조리 티가 나지 않습이니까?”
그 물음은 정치적으로 날카롭게 파고드는 질문이었다.
이미 황제가 먼저 북부를 제국에서 제외한 게 아니냐는 뜻.
황제는 허를 찔린 얼굴을 했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건 공작의 오해일 뿐입니다.”
“오해라. 그렇다면……”
자카리가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황제를 마주 보았다.
자카리의 입술 끝이 비스듬히 올라간다.
“황가와 공작가 사이에는 이미, 오해가 너무 많이 쌓인 것이나 다름없군요.”
“……”
“……”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공작가와 황가가 냉전 상태라는 건 사실, 이 자리에 모인 모든 귀족들이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공작이 저렇게까지 냉랭하게 선을 그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그렇다면 오해부터 풀면 되지 않겠습니까.”
황제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공작이 깐깐하게 구는 게 귀찮기는 했지만, 어쨌든 공작가는 황가의 신하 아닌가.
신하가 주군의 말을 받드는 건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황제인 자신이 관대하게, 먼저 화해의 신호를 보내 주지 않나.
잘 풀릴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던 그때.
“아니요.”
뭐? 황제가 두 눈을 부릅떴다. 자카리는 매끄러운 동작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면서 말했다.
“황가와 공작가 사이의 오해를 풀 생각이셨다면, 처음부터 그리 행동 하셨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