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그렇게 좋아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데 모를 리가 없잖아.”
“그렇지만, 정말로 내가 후원한 사람들이 전시회까지 열게 될 수 있을 줄은 몰랐단 말이야.”
이엘리는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었다. 아카데미가 행사에 여성들도 포함시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사실 헤센바이츠 공작 부인이라는 후원자의 이름과, 그 후원자가 건네는 수많은 기부금들 때문이 아니라 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달라진 모습을 보는 건 역시 기쁘다.
“옳지 못한 것들이 한 번에 바뀔 수는 없어. 하지만……”
이엘리는 반짝이는 눈동자로 자카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드물게 활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런 변화가 모여 긍정적인 쪽으로 나아가게 될 테니까.”
그리고 자카리는 제 아내가 저런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믿고 거침없이 나아가는 이엘리.
자카리는 가볍게 웃으며 이엘리를 끌어안았다.
“네가 내 아내라서 정말 기뻐.”
“음,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너의 도움을 받은 거나 마찬가지지.”
자카리의 품에 기대앉은 채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어리둥절한 그를 향해 달콤하게 속 삭인다.
“난 운이 좋은 편이야.”
“운이 좋다고?”
“그럼, 이렇게 널 만났는 걸.”
이엘리는 다정한 어조로 대답했다. 눈을 깜빡이던 자카리는 푸스스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엘리는 진지한 낯이다.
자카리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이엘리는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사실, 귀족들 사이에서 아내의 행동을 이렇게나 지지해 주는 남편은 없는걸."
이엘리는 그녀의 살롱을 스쳐 간 수많은 귀부인들을 생각했다.
그들 중에서 이엘리처럼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귀부인은 아무도 없었다.
자카리는 이엘리를 완벽하게 믿었고, 이엘리가 옳다고 믿고 행동하는 것에도 공감해 주었다.
그녀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건 그 덕이다.
“오히려 운이 좋은 편은 내 쪽이야.”
하지만 자카리는 그녀의 이마에 슬쩍 입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푸른 눈은 드물게 진지하다.
“네가 없었더라면 난 세상이 이렇게 따스하다는 것도 몰랐을 테니까.”
“……자카리.”
이엘리는 조금 뭉클해졌다. 그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너무나도 잘 느껴진다.
때마침 마차가 멈췄다.
슬쩍 창밖을 내다보던 자카리는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손을 내밀며 씩 웃는다.
“내리실까요, 레이디?”
“배려 감사합니다, 신사님.”
이엘리 또한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손을 맞잡고 아카데미 안으로 들어갔다.
제국 아카데미는 장밋빛 벽돌로 차근차근 쌓아 올린 고색창연한 건물이었다.
그 규모도 굉장히 컸다. 이엘리는 조금 어색한 태도로 그녀가 후원해 준 학생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받았다.
‘사실 이렇게 인사치레를 할 생각 은 없었지만.’
머쓱한 그녀의 얼굴에 자카리는 지그시 웃음을 삼켰으나, 학생들은 여전히 진지한 낯이었다.
“공작 부인께서는 저희 아카데미에 서도 유명 인사세요.”
이엘리가 처음으로 후원을 해 준 바이올리니스트, 안나는 장난스러운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아, 그건……”
이엘리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별것도 아닌 일에 칭찬을 받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불공정한 일이 있고, 그녀는 그 일을 고칠 힘이 있었다.
그래서 그냥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인데.
“처음으로 여학생들을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잖아요.”
“전 그저, 남학생들만 아카데미에서 공부할 수 있는 건 불공평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예요.”
“맞아요. 그리고 그 불공평함을 가장 먼저 깨뜨려 주신 분이 바로 공작 부인이시죠.”
단호한 대답에 이엘리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안나는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번 전시회의 주제는, 저희들을 믿고 지지해 주신 공작 부인께 존경과 애정을 담아.”
응? 이엘리는 슬며시 안나를 마주 보았다.
안나는 이제 만면에 생글생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엘리’로 정했답니다.”
이엘리는 순간 발끝이 오므라드는 것 같은 간지러움을 느꼈다.
“……”
아니, 뭐라고? 농담이지? 그런 심 정을 담아 눈앞의 사람들을 바라보았지만, 그들은 진지한 얼굴로 이엘리를 마주 볼 뿐이었다.
“지, 진짜로요?”
“그럼요.”
“……”
이엘리는 다시 한 번 침묵했다.
세상에, 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다.
하지만 그녀 앞의 여학생들은 이엘리를 기대 어린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그녀는 결국 시선을 꺾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고마워요. 이번 행사, 기대할 게요.”
“감사합니다, 공작 부인.”
나이도, 외양도 다른 수많은 여학생들은 이엘리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차마 그 얼굴에 대고 자신의 민망함을 표하기는 어려워서, 이엘리는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뺨을 썰룩거리는 자카리를 곁눈질 로 쏘아본 이엘리가 툴툴거리며 말했다.
“자카리, 너 정말. 웃지 마.”
“풉……”
마치 풍선을 바늘로 콕 찔러 터뜨리듯이, 자카리의 입술 사이로 경쾌 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하하!”
이엘리는 뾰로통한 낯이 되었다.
한참 허리를 꺾으며 시원하게 웃던 자카리가 고개를 들었다.
“웃음 참는 거, 티 났어?”
“그렇게 뺨을 썰룩거리는데 모르는 게 오히려 바보지.”
이엘리는 뚱하니 대답했다.
어찌나 크게 웃었는지, 자카리의 눈가에는 눈물까지 고여 있을 정도였다.
손가락으로 눈물을 닦던 자카리가 이엘리를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가 다정하게 말한다.
“어쨌든 다들 네게 고마워하는 것 같더라.”
“글쎄, 난 불합리한 일을 두고 보 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그렇게 대답한 이엘리는 어깨만 으쓱거려 보일 따름이었다.
연녹색 눈동자가 가늘게 휘었다.
“기회는 공평하게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하지만 그 생각을 실제로 실천하는 사람은 많지 않잖아.”
자카리의 드물게 단호한 목소리를 듣던 이엘리는 콧잔등을 찌푸리며 미소했다.
다정한 공작 부부의 모습을 보며 후원받은 학생들은 흐뭇한 눈을 했다.
행사 시작까지 하루가 남아 있었다.
이엘리의 지원은 이번 아카데미 행사에서도 여러 곳에 녹아 있었다.
아무리 아카데미에 여학생들이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지만, 아직 아카데미는 여학생들에게 그리 호의적 이진 않았던 터였다.
'그래? 그렇다면 돈으로 해결하면 되지.’
하지만 당시 이엘리는 명쾌한 해결 책을 내놓았다.
돈으로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그런 마음이다.
그녀는 직접 전시관과 연주회장을 대관하는 방식으로 학생들의 전시회를 보조해 주었다.
‘세상에, 이니스 홀이라고요?’
특히 연주회를 위해서는 이니스 홀을 대관해 줬는데, 이니스 홀은 아카데미가 있는 도시인 에폴리에서도 가장 유명한 홀이었다.
이니스 홀에서 독주회를 열게 된 안나는 눈물을 글썽였다.
‘살면서 이니스 홀에서 독주회를 열게 될 줄은 몰랐어요…….’
‘그 대신 훌륭한 연주를 들려주세요, 알았죠?’
‘물론이지요!’
그때의 대화와, 안나의 반짝거리는 눈동자를 이엘리는 똑똑히 기억했다.
다만 그들의 연주회와 전시회가 ‘이엘리’라는 제 이름까지 달게 될 줄은 몰랐던 것뿐이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뭐, 그래도 다들 즐거워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야.”
다들 열정적으로 이번 행사를 준비했다는 것이 눈에 보였다.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예술을 마음 껏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주 어지지 않았던 여성 예술가들에게 있어, 그녀들만을 위한 행사 회관을 따로 마련하여 준다는 것 자체가 축 복과도 같은 일이었다.
“어쨌든 행사 준비는 훌륭하네.”
“다들 최선을 다해서 준비했을 테니까.”
이엘리는 자랑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그녀가 후원한 사람들이 이렇게 큰 발전을 이루었다.
‘후원자로서 조금은 기뻐해도 되겠지?’
이엘리는 생글생글 눈웃음을 쳤다.
자카리는 그런 제 아내를 다정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이엔, 에폴리에 온 이래로 너 계속 기분이 좋아 보여.”
“응, 좋아. 내 도움으로 저 사람들이 좀 더 원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게 된 거잖아.”
그렇게 말한 이엘리는 손에 든 로켓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그건 그녀가 후원해 준 학생 한명이 그녀에게 감사의 의미를 담아 선물한 것으로, 그녀의 초상화가 섬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이거, 저에게 주는 건가요?’
‘네. 감사의 마음을 담아서 그렸어요.’
그렇게 말한 학생의 얼굴은 양 뺨을 발그레하게 물들인 채였다.
‘처분은 마음대로 하셔도 좋아요, 다만 마음만 받아 주세요.’
‘소중하게 간직할게요. 정말 고마워요.’
‘아니예요. 저희에게 이런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공작 부인.’
진지한 얼굴로 말하며 고개를 꾸벅 숙이던 그 모습이 눈에 선연했다.
이엘리는 작게 웃었다.
“이거, 나한테 주면 안 돼?”
고개를 내밀어 초상화 속 그녀를 바라보던 그가 불쑥 말했다.
이엘리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응? 어디에 쓰려고?”
“내 아내의 그림이잖아. 잘 보관하려고.”
자카리의 담백한 대답에 이엘리는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면 자카리는 그녀에 관련 한 물건은 집착적으로 보관하곤 했다.
예전에 이엘리가 그렸던 스스로의 초상화까지, 아직도 액자에 넣어 집무실에 걸어 두지 않았나.
그런 애정이 누군가에게는 부담스럽게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난 너무 좋은걸.’
나도 역시 내 남편에게 콩깍지가 씐 지 오래인가 봐.
그녀는 그의 손에 목걸이를 쥐여 주었다.
“잘 보관해 줘야 돼, 알았지?”
“물론이야.”
이엘리는 가벼운 마음으로 자카리에게 초상화를 건네주었다.
솔직히 이엘리 자신보다도 자카리가 훨씬 더 잘 보관할 것이다.
공작 부부는 느긋한 마음으로 행사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보통 행사 전날에는, 행사 오픈을 기념하여 전야제가 치러진다.
보통은 학생들과 일부 교수진들만 참석하는 소규모 연회로 진행되지 만, 올해의 전야제는 생각보다 규모 가 훨씬 더 컸다.
“이번 전야제에는 헤센바이츠 공작 부부께서 참석하신다면서요?”
“맞아요. 아카데미 내에서 공작 부부께서 활보하시는 모습이 몇 번이나 목격됐대요.”
“이번에는 공작 부부께서, 공작 부인이 후원하시는 학생들을 찾아가 격려하셨다면서요?”
평소에는 신년 무도회에 참석하느라 바빠 아카데미의 전야제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귀족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번 전야제에는 모조리 참석하여 소곤소곤 대화를 나 누고 있었다.
“게다가 황제 페하와 황후 페하께서도 오신다고 하셨어요.”
“그뿐이겠어요? 황녀 전하까지도 참석 의사를 표하셨다고 하더라고요.”
“신년 무도회를 끝내자마자 세 분 황족께서 모두 참석하시다니……”
귀족들은 호기심이 가득한 눈초리 로 서로 의견을 교환했다.
아직 황제 부부와 공작 부부는 연 회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연회장 안에선 여러 가지 추측성 대화들이 난무하고 있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황가에서도 아카데미를 지원하시려는 뜻이실까요?”
“너도 참, 순진한 말을 하는구나. 아마 공작가문을 견제하시느라 그런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