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5화 (155/196)

155 화

‘사랑은 커녕, 관계 발전의 가능성 조차 보이지 않는 남편과 함께.’

단 한 번도 이런 삶을 원한 적은 없었는데.

황후는 숨을 삼켰다.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 사람은 변하지 않을 거야, 평생……’

그리고 나 또한 이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어야 하겠지.

황후가 그대로 숨을 크게 삼켰다.

“황후 폐하.”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 린 황후의 표정이 미세하게 풀어졌다.

황후가 이 삭막한 황궁에서 유일하게 믿고 있는 여인이 눈앞에서 있었다.

황후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황녀 전하.”

“괜찮으신지요.”

그 물음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포함 되어있었다.

황제에게 모욕적인 대우를 받는 것도 그렇고, 황제에 대해 나날이 실망감만 쌓아 가는 것도 그랬다. 그 뜻을 알아들은 황후는 미소를 지었다.

“황녀 전하만 하겠습니까.”

“……어째 우리의 삶은 언제나 편 하지를 못하네요.”

황녀가 메마른 미소를 지었다. 최 근 황실에서 황녀의 위치가 미묘해 지고 있었던 것이다.

헤센바이츠 공작가는 황제와는 다르게 황녀에게는 호의적인 자세를 취했고, 무엇보다도 이번 북부 봉쇄 령의 주역이기도 한 공작 부인과 황녀가 다져 온 두터운 우정에 황제는 잔뜩 날을 세웠다.

‘하지만…… 차라리 그 편이 나은 것일지도 모르겠어.’

황녀는 쓰게 웃었다.

황제는 공작가의 눈치를 살피느라 황녀를 건드리지 않고 있었다.

‘물론 그런 행동이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황녀는 냉정한 얼굴로 현 상황을 판단했다.

황제는 이미 자존심을 다쳤다. 거기에 미운털이 박혀, 화풀이 대상으로도 쓸모가 좋은 황녀 자신도 있다.

‘당분간은 몸조심 해야겠는걸.’

그때 황후가 한숨을 삼키는 황녀를 말끄러미 응시했다.

비스듬히 고개를 꺾은 황후가 피곤 한 어조로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언제쯤 정신을 차리실까요?”

“아직도 그런 기대를하고 계세 요?”

황녀의 냉소적인 대답에 황후는 납득한 얼굴을 했다.

두 여자는 서로에게 픽 웃어 버렸다.

“사람은 변하지 않아요. 이미 고귀한 자리에  계신 폐하라면 더욱 그러겠죠.”

“하긴, 기대를 품는 것 자체가 바 보 같은 짓이겠죠.”

황후는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누군가에게 기대를 걸어 그 사람이 나아진다면, 애초에 세상이 이렇게 불합리하지도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신년 무도회나 준비 해야겠어요.”

“도와 드릴까요?”

“괜찮아요. 그렇지 않아도 황제 폐하께서 요새 좀 신경이 날카로우시니까요.”

그렇게 말한 황후가 씩 웃었다.

아까 전의 무거운 표정과 다르게, 조금 편해 보이는 얼굴이다.

“트집이라도 잡히느니, 혼자 하는 편이 훨씬 나아요.”

“이런, 죄송하네요.”

“황녀께서 미안해하실 일은 아니 죠.”

고개를 가로저은 황후가 대답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고뇌에 공감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 안의 물건을 반 이상 깨부순 후에야 황제는 약간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주변은 온통 엉망이었다.

깨진 유리 조각이 구둣발 아래에서 바작바작 밟힌다. 황제는 지그시 입술을 물었다.

‘……그러고 보면.’

황제는 문득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요새 황제의 신경을 미세하게 건드리는 위화감이 있었다.

‘요새 왜 이렇게 초조하지.’

황제는 손을 들어 얼굴을 세게 문 질렀다.

황제는 가끔씩, 스스로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 기억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퍼뜩 정신을 차릴 때마다 자신은 어떤 일을 저지른 상태였고, 황제의 의지가 아닌, 다른 사람이 제 몸을 움직이는 것 같은 그 기이한 감각이 든다. 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제기랄, 신경이 너무 예민해.’

가끔 어의에게도 진찰을 받아 봤지 만, 근래 피곤하여 신경이 쇠약해지 신 것 같다는 흔해 빠진 대답만 내 놓을 뿐이었다.

황제는 신경질적인 낯이 되어 입술을 잘근거렸다.

‘약을 먹어도 제대도 낫는 기색이 보이질 않으니……’

젠장. 황제는 어의의 무능함에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지금 그의 신경은 마치 팽팽하게 당겨진 얇은 실 같았다.

누군가가 유리 조각으로 갉작거리는 느낌.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만 같은.

“……후우.”

황제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때는 강제로 공작 부인에게 생각을 돌리는 편이 좋았다.

이상하게 이엘리를 생각하면 마음

이 편해진다. 비록 이번 일은 공작의 방해로 실패했지만…….

“……”

그의 미간에 짙은 주름이 잡혔다. 이엘리.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어떻게든 그녀를 손안에 넣고 싶은 기이한 충동 이 든다.

그 충동이 옳은 건지 그렇지 않은 지, 그런 문제는 상관없었다.

‘그녀를 갖지 못하면 이대로 미쳐 버릴 것 같다는 느낌이 드니까.’

황제의 시선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어째서 이엘리는 제게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걸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오직 그녀만이.’

가끔씩 황제는 제가 그녀에게 집착 하는 이유가, 스스로의 감정이 아닌 타인의 감정을 대신 느끼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생각에 황제는 또다시 불쾌해졌다. 그는 애써 생각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혹시, 이것도 어떻게 보면 기회로 돌릴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어떻게든 이엘리의 생각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황제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요새 론도 후작가가 날 불쾌하게 했지.’

론도 후작가는 후작 영애를 황후로 들인 이래로, 내내 황가에게 불편한 낌새를 내비치고 있었다.

황후를 대하는 황제의 태도가 문제가 된 거지만, 황제는 제 잘못은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문제는 론도 후작은 제도 귀족들의 대표 격인 귀족이라는 거지.’

그래서 마음에도 들지 않는 영애를 황후로 들인 건데, 버릇없게 굴기는. 황제는 쯧 혀를 찼다.

‘게다가 안네로제, 그 계집 또한 마음에 안 들어.’

의자에 주저앉은 황제는 의자 팔걸이를 손가락을 세워 톡톡 두드렸다.

그가 눈을 가늘게 치켜뜬다.

‘그딴 계집이 황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다니……’

그러던 중, 황제의 입가에 위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턱을 된 황제가 느른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에……’ 

좋은 생각이 났다. 황위 계승권을 가져 눈엣가시인 황녀와, 시시각각 반기를 드는 론도 후작가를 동시에 치워 버릴 수 있는 방법.

게다가 그 죄를 공작가에게 뒤집어 씌울 수 있는 방식이다.

‘황녀를 황후가 암살한다면?’

로렌 백작 영애를 이용한 방식은 이미 한 번 실패하긴 했지만, 그 정도에 꺾일 황제가 아니었다.

론도 후작가와 헤센바이츠 공작가가 합작하여 황녀를 해코지한다면 재미있어지지 않겠나.

‘황후가 직접 일을 실행한다면 론도 후작도 발을 빼지는 못할 터.’

황제의 유혹에 빠져 직접 일을 저 질렀던 로렌 백작 영애도, 그 일의

대가를 치르고 가문이 멸문당하지 않았나.

공작가의 분노가 론도 후작가로 향 한다면 독을 독으로 없애는 일이 아닌가.

‘그리고 그 암살의 배후를 공작가 로 놓아둔다면……”

공작가가 정말로 일을 저지르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사람들이 그렇게 믿는 게 중요하다.

“……”

황제의 입가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비릿한 미소였다.

황제는 뱀 같은 두 눈동자를 번뜩 거렸다.

그때부터 황제는 차근차근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비록 한 번의 실패를 거치기는 했 지만, 황제 자신이 가진 ‘아샤의 축복’은 그 모든 실패의 기억을 덮을 정도로 강력한 힘이었다.

사람을 유혹하여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힘이라니.

이런 힘을 갖고 있으면서도 활용하지 않는 게 바보다.

‘황녀와 황후를 동시에 치우고 공작가를 처리하는 거야.’

황제는 입술 끝을 치켜 올리면서 싱긋 미소를 지었다.

상상만 해도 짜릿한 쾌감이 느껴졌다.

‘헤센바이츠 공작이 날 불쾌하게 만들지 않았더라면.’

황제는 지그시 미간을 좁혔다.

자카리 헤센바이츠.

마땅히 자신의 여자가 되었어야 할 이엘리를 곁에 두고 있는 남자.

오만한 북부의 지배자, 감히 황실에 반기를 들면서도 제 행동이 잘못 되었음을 인지하지조차 못하고 있는 남자.

자카리를 생각하자 질투심에 뱃속이 조여들었다.

‘……굳이 나도 이렇게까지 행동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자카리의 뛰어남과 황제의 이성적 이지 못한 행동은 전혀 연관성이 없었음에도, 황제는 당연하다는 것처럼 모든 문제를 자카리에게 몰아 버렸다.

말도 안 되는 판단이었지만, 황제는 이제 자신이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이를 물었다.

‘날 이렇게까지 몰아가다니.’

자카리가 그렇게 뛰어나지 않았더 라면.

그가 사랑하는 이엘리를 제 아내로 맞아들이지 않았더라면.

북부가 적당히 황가의 비위를 맞춰 주었더라면.

그랬다면 황제도 위험을 무릅쓰고 까지 ‘아샤의 축복’을 다시 사용할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황제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이런 마음을 먹게 된 것은 모두, 공작 탓이 아닌가.’

그러니 이건 모두 자카리의 잘못이었다.

황제는 두 눈동자를 뱀처럼 번뜩였다.

자신의 행동에 어떠한 개연성조차 없다는 것을 황제는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는 질투심에 어깨를 떨었다.

* * *

그리고 며칠 후.

황제는 직접 공작 부인이 후원하는 아카데미의 행사에 자신도 참석하겠 노라며 의사를 표시했다.

신년 무도회는 단 하루뿐이지만 아카데미의 행사는 일주일 이상 지속 되니까, 신년 무도회가 끝난 이후에 행사에 방문하겠다는 것이다.

이엘리와 자카리는 표정을 굳혔다.

“도대체 황제, 그 작자는 무슨 생각이지?”

“그건 나도 모르겠지만.”

자카리는 싸늘한 얼굴로 입술을 열었다.

기웃이 고개를 기울인 자카리가 차갑게 말을 잇는다.

“다른 건 몰라도 긍정적인 의미로 참석하는 게 아니라는 건 알겠어.”

“아무래도 그렇지.”

“조심하는 편이 좋겠는데.”

사실 황제에게 참석하지 말라고 할 명분도 없었다.

게다가 이번 행사에는 황제뿐 아니라, 황후와 황녀까지도 방문한다고 했다.

객관적으로 황가의 일원이 참석한 다는 건 아카데미에게 있어 영광이었기에, 두 사람이 왈가왈부할 수

있는 문제 또한 아니었다. 그들은 한숨을 삼켰다.

* * *

그렇게 행사의 날이 밝았다.

아카데미의 행사는 전통적으로 신 년에 시작하며, 전시회와 연주회까지 합작으로 진행하는 상당한 규모의 행사였다.

재학생들이 주로 활동하는 행사이 긴 하지만, 그들은 차후 미래의 제국 예술계를 지탱하게 될 사람들이다. 행사의 질은 굉장히 높았다.

'한때는 여성들은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없다고 하는 바람에, 학장과 싸우기까지 했는데.’

이엘리는 굉장히 감회가 새로웠다.

처음 이엘리가 여성들을 후원하여 아카데미에 입학시킬 때가 떠올라서 였다.

당시 아카데미 측에서는 여성은 이 곳에 입학할 수 없다며 난색을 표했었다.

‘그런 게 어디 있어? 안 되면 되게 해야지!’

그리하여 이엘리가 선택한 방법은, 학장에게 직접 편지까지 보내 가며 싸우는 거였다.

자카리는 이엘리가 지난한 싸움에서 마침내 승리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번 행사는 그 결과였다.

“뿌듯해 보이네, 이엔.”

“아, 티 나?”

이엘리는 발그레한 자신의 양 뺨을 손으로 감싸면서 생긋 웃었다. 자카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