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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화 (154/196)

154화

“알았어, 참석할게.”

“……그래.”

처음부터 이렇게 말할 걸 그랬네. 이엘리는 귀여움 반, 한심함 반을 담아 남편을 바라보았다.

어쨌거나 자카리는 가신 회의에 참석하기로 마음을 결정했다.

이엘리는 내심, 자신의 말 한 마디로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자카리를 귀엽다 여기면서도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엔, 내 크라바트가 풀어졌어.”

“……그래서 어쩌라고?”

“매 줘.”

그러니까 자카리가 저렇게 당당하게 요구하는 저런 행동 말이다.

가신 회의까지 15분밖에 남아 있지 않은데도, 자카리는 여전히 그녀에게 바짝 붙어있을 따름이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너도 크라바트 멜 줄 알잖아.”

이엘리는 제 남편의 크라바트에 대한 비밀을 이제 알고 있는 상태였다.

이엘리의 손을 어떻게든 타고 싶어 서, 지금까지 크라바트를 제대로 매 지 못하는 척하고 있었던 것까지도.

‘솔직히 나보다도 더 잘 매는 것 같던데.’

우연히 보게 된 자카리의 능숙한 손짓을 떠올리며, 이엘리는 뚱한 얼굴로 자카리를 응시했다.

“그래도 이엔, 네가 해 주는 게 좋아.”

자카리는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엘리는 미간을 찡그리면서 웃었다. 정말, 내가 못 살아.

“그래, 이리 와.”

이엘리가 손짓했다.

하얗고 고운 손이 크라바트를 어루만지고 정리한다.

제게 집중하는 이엘리의 얼굴을 자카리는 홀린 듯이 내려다보았다.

풍성하게 내리뜬 분홍색 속눈썹과 그 아래 반나마 감춰진 연녹색 눈동자.

그리고 흘끗 고개를 들어 올리며 그에게 씩 미소 짓는 얼굴까지.

“자, 다 됐다.”

“……” 

“자카리?”

이엘리는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그를 부른다.

자카리는 삽시간에 달아오르는 제 얼굴을 느꼈다.

아, 정말. 두근거려 죽을 것 같았다.

자카리는 평생 그녀에게 가슴이 설렐 자신이 있었다.

 가신 회의에 참석하긴 했지만 사실, 몸만 참석하고 정신은 참석하지 않은 것에 가까웠다.

왜냐하면 공작 각하께서는 회의를 하는 내내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었 으니까.

‘이엔.’

공작 각하의 시선은 창밖에 고정 되어 있었다.

햇볕이 따사롭게 내리찍는 오후, 화로를 가져다 둔 가제보 아래에서 공작 부인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공작의 입술에 미소가 서렸다.

“으음.”

“큼, 크흠……”

도무지 회의에 집중하지 못하는 공작을 보다 못해, 가신들은 서로에게 눈짓을 했다.

어떻게든 공작에게 말이라도 걸어 보라는 뜻이다.

사실 최근에 황가에서 저질렀던 세금 문제 때문에 비상소집으로 가신 회의가 열렸었고, 그때 중요한 안건은 대부분 다 처리하긴 했었다.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 한참 눈치를 살피던 가신 중 하나가 자카리에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각하, 죄송하지만.”

“음?”

자카리는 잠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시선을 들어 올렸다.

가신이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회의에 조금 집중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 미안하군.”

자카리는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턱을 괴면서 대답했다.

그와 동시에 새파란 시선은 다시 가제보 아래로 향했다.

그런 공작을 바라보면서, 가신들은 이번 회의가 길어질 것을 예감했다.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는 때, 자카리는 가신 회의를 끝내고 밖으로 나왔다.

그림을 마무리하고 막 물건들을 정리하던 그녀는, 제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눈치채고 고개를 들었다.

“자카리?”

“응, 나야.”

자카리는 당연하게 그녀의 이마에 키스부터했다.

고개를 숙인 자카리가 차분하게 입을 연다.

“좋지 못한 소식이 하나 있는데.”

“뭔데?”

이엘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젤을 정돈하고 스케치북 따위를 함께 챙 기던 그가 말을 이었다.

“황실의 신년 무도회 초대장이, 북부의 일부 귀족들에게도 도착했다고 해.”

“……황제가 북부 귀족들에게, 감히?”

이엘리는 눈매를 좁혔다. 자카리도 불쾌한 얼굴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그는 한숨을 삼켰다.

“그리고.”

“더 있어?”

“물론이지.”

그렇게 말한 자카리가 이엘리에게 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

금박으로 화려한 무늬가 찍혀 있는 빳빳한 질감의 고급 종이.

이엘리는 반사적으로 미간을 구겼다. 그가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전에 집사에게서 받았어.”

“……이건.”

“무려 황실에서 보내온 신년 무도 회의 초대장이지.”

자카리의 눈동자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신년 무도회. 이엘리는 고개를 기 울이며 그를 보았다.

“무슨 생각으로 초대한 걸까?”

“글쎄……”

자카리는 말끝을 흐렸다. 사실 그는 자신이 황제에게 보낸 세 납치범의 목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엘리에게는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황제가 자카리가 보냈던 그 경고를 보고도 이렇게 행동하는 건.

'오기를 부리는 건가.’

자카리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그는 드물게 냉정한 얼굴이 되어 생각에 빠졌다. 이엘리가 물었다.

“거절할 거지?”

“물론이야.”

자카리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엘리 또한 동감이었다.

황제가 그따위 짓을 저지른 것을 알고 있는데도, 황제의 얼굴을 보고 싶을 리 없다.

하지만 문제는 거절할 이유가 마땅잖다는 거다.

“하지만 대놓고 거절하는 건 역시 모양새가 좋지 않겠지.”

“뭐 어때, 그냥 거절해도.”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하는 데.”

이엘리는 뚱한 얼굴이 되었다. 기분상으로는 그냥 거절해 버려도 상관없을 것 같다. 하지만…….

“황녀 전하가 마음에 걸려서.”

“……아.”

그녀의 대답을 들은 자카리는 멈칫했다.

그녀는 소중한 친구를 위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만약에 우리가 함부로 행동했다 가, 황녀 전하께 불똥이 튀면 어떡해.”

“그렇구나.”

“미안, 이런 반응이어서. 하지만 황제, 그 작자는 이성적인 사람은 아니니까.”

자카리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그에게 그녀와 같은 친구라고는 없었고, 친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 해서 이엘리의

친구 관계에 훼방을 놓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제대로 된 거절 이유를 내 놓았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말을 꺼내 놓은 이엘리가 곰곰이 고민에 잠겼다.

거절할 만한 이유가 하나 있긴했다.

“사실 나, 초대장을 하나 받은 게 있거든.”

“초대장?”

“응. 내가 여성 예술가들을 계속 지원해 왔던 건 알고 있지?”

이엘리의 물음에 자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이올리니스트인 안나를 시작으로 이엘리는 수많은 여성들을 후원해 오곤했다.

이엘리는 최근, 자신이 후원한 예술가들의 초대장을 받았다.

“이번에 아카데미에서 예술 관련 행사를 연다고 했거든.”

“전시회?”

“응. 그래도 내가 후원했으니까, 한 번쯤 얼굴을 비추는 건 어떤가 생각하고 있었는데.”

자카리가 워낙 그녀를 감싸고돌았 기에 방문이 어려우려나 생각 했었는데, 오히려 일이 이렇게 되니 잘된 것 같다.

황실의 신년 무도회를 거절하고 그 쪽을 방문하면 되니까. 그녀가 말했다.

“마침 시기도 얼추 맞아. 그 행사 도 신년에 맞춰서 시작된다고 하고.”

“규모가 좀 있는 행사인가 봐?”

“응. 미술과 음악 등을 통틀어서 치르는 거라고 하더라고.”

이엘리의 대답을 들은 자카리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카리는 차분하게 답했다.

“나쁜 핑계는 아니네.”

“그렇지? 내가 후원을 하고 있어 어쩔 수 없이 참석했다고 해도 되니까.”

이엘리는 빙그레 웃었다.

그런 이엘리를 말끄러미 바라보던 자카리가 불쑥 물었다.

“이엔.”

“응?”

“황녀 전하가 그렇게 소중해?”

“뭐, 친구니까……?”

눈동자를 굴리던 이엘리는 살짝 뺨을 긁적거렸다.

자카리는 뾰로통한 얼굴이 되어서 말했다.

“이거 조금 질투 나는걸.”

“왜?”

“나에게는 너밖에 없는데.”

그렇게 말한 자카리가 그녀를 자신의 품 안에 끌어안았다.

나긋한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네게는 다른 소중한 사람도 있다는 게 말이야.”

“하지만 내게 있어 네가 제일 소중 하다는 건…… 너 자신이 더 잘 알잖아?”

어리광을 부리는 자카리의 품에 고개를 기대며 그녀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마 난 황녀 전하가 없어도 살 수 있겠지.”

“이엔.”

“하지만 네가 없으면 난 살 수 없어.”

당연하다는 것처럼 흘러나오는 대답에 자카리는 지그시 입술을 당겨 물었다.

이엘리는 언제나 그의 불안감을 꿰 뚫어 보고, 가장 듣고 싶은 대답을 해 준다. 사랑하는 제 아내.

그가 웃었다.

*   *   * 

 신년 무도회는 황실의 가장 큰 행 사 중 하나로써, 고위 귀족들은 물론이고 황족들 또한 보통 새해를 황 궁에서 맞이하곤 했다.

신년 무도회에 황실의 초대장을 직접 받은 것 자체가 가문의 영광으로 받아들여졌다.

황실이 그 가문을 얼마나 중하게 생각하는지를 증명하기 때문이었다.

“헤센바이츠 공작가에서 이번 신년 무도회의 초대를 거절 했다면서요?”

“그러게요. 아무리 그래도 황제 폐하께서 직접 초대장을 보내신 건데 말이예요.”

그러므로 공작가가 이번에 황실의 초대를 거절한 건 꽤나 충격적인 일이었다.

공작가가 내세운 이유 자체는 명확했다.

공작 부인이 납치라는 불미스러운 일을 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몸 또한 아직 제대로 회복되지 않았다는 거였다.

황제는 당연히 그 이유를 납득할 수 없었다.

“감히 황실의 초대를 거절해?!”

황제의 신경질적인 태도는 날이 갈 수록 더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황제가 자존심이 상한 이유는 한 가지 더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공작 부부가 신년 무도회를 제치고 다른 행사에 참석 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그들은 아카데미에 입학한 후원자 들의 행사에 방문하겠노라고 전해 왔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황제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속내를 공작에게 들킨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공작이 보내왔던 세 납치범들의 머 리가 떠올랐다.

“젠장!”

명확한 경고의 의미를 가지는 그 머리를 받고도 황제는 공작가에게 초대장을 보냈다.

자신의 관대함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공작가에서는 초대장을 간단하게 거절했다.

“……폐하.”

“뭐야, 황후인가!”

황제는 숨을 쌔근쌔근 몰아쉬었다. 어느새 방 안에 들어온 황후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무슨 용건인가, 도대체!”

한 나라의 황후이자 자신의 반려를 대하는 언사라고 하기에는, 존중이라고는 단 하나조차 남아 있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 모습을 본 황후는 입술을 짓씹었다.

그녀는 오래된 피로감을 또다시 느꼈다.

“신년 무도회 준비에 대해 말씀드리려 합니다만.”

“그딴 건 알아서 해도 되지 않나!”

“……예, 폐하.”

황후의 눈빛은 그저 고요했다. 그건 제 남편에게 어떠한 기대도 남아 있지 않은 눈빛이었다.

“그럼 전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황제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황후는 방 밖으로 빠져나왔다.

와장창! 물건이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를 듣던 황후의 표정이 처 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주먹을 말아 쥔다.

‘언제까지.’

황후는 머리가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현실에 대한 무력감이 차근차근 황 후를 물어 삼킨다.

‘언제까지 이런 삶을 살아야 하는 걸까.’

아무 발전도 없는 삶.

이대로 고귀한 자리에  고여 천천히 썩어 가야 하는 삶.

너무 피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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