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다들 자신이 가진 황제라는 지위 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지만, 내심으로는 론도 후작의 말에 동의하고 있다는 것이 모조리 티가 났다.
황제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가 벌떡 일어난다.
“오늘 알현은 여기서 파하겠네!”
그렇게 외친 황제는 알현실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뒤에 남은 귀족들은 황망한 얼굴이 되었다.
“도대체, 황제 폐하께서는……”
귀족 중 하나가 저도 모르게 신음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론도 후작이 작게 주의를 주었다.
“말씀 조심하시오, 폐하께서는 제국의 황제이십니다.”
“죄, 죄송합니다.”
귀족이 찔끔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후작은 내심 그 말에 동의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씁쓸한 기분이 되어 버렸다.
무엇보다 후작 스스로도, 황녀가 제위를 이었더라면 좋았을지도 모른 다는 불충한 생각을 하지 않았나.
후작은 손을 들어 피로한 낯을 문 지르고는 그대로 눈을 감는다.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될 는지 모르겠군.’
아무래도 황녀와 황후에게 이번 일을 전해 주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그렇게 마음을 정리한 후작이 성큼 성큼 걸음을 옮겼다.
* * *
모든 것이 통제되지 않으며, 그의 명령을 거역하고 있었다.
그는 제국의 황제였고 만인 위에 군림하는 존재였음에도.
집무실로 돌아온 황제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었다.
“제기랄!”
황제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 기분에 커다랗게 욕설을 내뱉었다.
계속해서 구석으로 몰리는 기분이었다.
황제의 행동을 정하는 가장 큰 감정의 기반은 바로 ‘질투’였다.
“헤센바이츠 공작, 그 작자!”
언제나 자카리는 황제의 걸림돌이었다.
무언가를 이루려 할 때마다 그 작 자가 끼어들어 빼앗아 간다.
마땅히 황제 자신이 누렸어야 했던 이엘리도, 명예도, 사람들의 찬사도 모두.
그것이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가슴을 태우는 들불 같은 분노.
질투가 장작이 되어 그 불길을 지폈다.
“아아아악!”
황제는 이성을 잃고 쩌렁쩌렁한 고함을 내질렀다.
와장창! 물건들이 벽에 부딪쳐 깨 져 나갔다.
“허억, 허억……”
집무실의 모든 물건을 박살 내고 나서야 황제는 약간 진정했다.
분노에 차 파르르 떨던 황제가 그대로 집무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이런 더러운 기분을 해소하기 위해 서는 여자를 안아야 했다.
황제에게 있어 여자란 존중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제 발밑에 두고 멋대로 굴리는 존재였다.
“이리 와!”
황제는 마주친 시녀들 중 아무나 골라 손을 잡아끌었다.
공포에 질린 시녀가 몸을 움츠렸다.
“폐, 폐하!”
“네까짓 시녀마저도 내 말을 무시하는 게냐!”
실랑이가 이루어지고, 시녀는 황제의 손에 의해 방 안으로 끌려 들어 갔다.
궁내의 사람들에게는 모두 익숙한 일이었다.
황제가 시녀와 함께 밤을 보내고 버리는 것도, 황후에겐 접근조차 하지 않는 것도.
그리고 황제가 황후에게 함부로 대 하지 못하는 이유는 후작가라는 배 경이 있어서 라는 것까지, 모두.
하룻밤을 보내고 버림받는 시녀들을 돕는 건 오히려 황후와 황녀였다.
“……또 그런 일이 있었나.”
뒤늦게야 그 일을 듣게 된 황후와 황녀는 참담한 얼굴을 했다.
황제의 포악함은 날로달로 진화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새로 등장한 희생자를 보살피는 한편, 답답한 속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힘이 있었더라면, 나에게 기 회가 주어졌더 라면.’
그리고 황녀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황녀의 처지와 저 시녀들의 처지는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여자, 그리고 서녀. 허울뿐인 황위 계승자.
그나마 아름다운 외모가 있어, 결혼 동맹 시장에서의 쓸모를 인정받아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있는 처지였다.
황녀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나라면 여자들이 저렇게 당하는 세상을 만들지 않을 텐데.’
어째서 여성들은 여성이라는 이유 만으로, 저러한 피해를 겪으며 살아 가야 할까.
문득 헤센바이츠 공작 부인이 떠올랐다.
언제나 당당하고 여성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는 공작 부인.
하나 여성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공작 부인의 모습마저도 뒤에서 험담하는 귀족들이 상당히 많았다.
‘하지만 공작 부인은 그들의 시선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지.’
황녀 자신도 그렇게 살고 싶었다. 약자를 보호하고 존중하며, 단순히 성별만으로 차별받는 여성들을 도와 주고 싶었다.
피해받는 여성들을 적극적으로 돕고 싶었다.
‘내가 만약에 황제가 될 수 있다면.’
황녀 스스로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결국 황제가 되어야했다.
황녀는 입술을 사리 물었다.
‘그렇다면, 이 제국을 그 누구보다 도 아끼고 사랑할 수 있을 텐데……’
헛된 꿈임을 안다. 그럼에도 자신 이 황제가 된다는 상상을 할 때마다
황녀는 제 심장이 두근거리며 뛰는 것을 느꼈다.
난 더욱 잘할 수 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던 황녀는 숨을 삼켰다.
* * *
이번 사건은 론도 후작을 필두로 한 제도 귀족과 황제의 사이가 악화 되는 데에 큰 일조를 했다.
무엇보다 귀족들은 황제가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하며 대하고 있는지 잘 알게 되었다.
언제든지 제국 밖으로 밀어낼 수 있는 체스 말 같은 존재들.
그런 대우가 기분 좋을 리 없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너무 독선적이십니다.”
“귀족들을 어떻게 이렇게 무시하실 수 있는지……”
북부 귀족들은 물론이고, 제도 귀족들의 불만까지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공작가에서 편지가 날아들었다.
‘폐하께서 북부를 제국에서 독립시키실 생각이시라면, 저희 또한 기꺼 이 받아들이겠습니다.’
공작의 친서가 가진 내용은 곧 황제의 행동 여하에 따라 북부가 제국에서 떨어져 나갈 것이며, 왕작 또 한 거머렬 것을 시사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쪽은 결국 황제가 되고 만 것이다.
“이런 오만불손한 작자 같으니라고!”
황제는 분을 못 이기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그럼에도 먼저 꺾여야 하는 쪽은 북부가 아닌 황가였다.
북부는 제도와의 문제를 견딜 수 있되, 제도는 북부와의 문제를 견딜 수 있는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황제는 세금 관련 조치를 거 둬들이고, 직접 황제의 친서를 보내 북부를 달랬다.
어떻게든 하지 않으려는 황제를 설 득해 낸 것은 론도 후작이었다.
“이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페하께서는 정말로 북부를 잃게 됩니다.”
그 조언에 황제는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북부가 정말로 왕작을 되찾으면 문제가 되는 쪽은 황가 측이었 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친서까지 보냈음에도 북부는 상한 감정을 쉬이 풀어 주지 않았다.
결국 황가와 공작가 사이는 냉전 상태에 접어들고 말았다.
19. 긴 겨울의 끝
이제 완연한 겨울이 되었다. 이엘리는 완전히 건강을 회복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예전보다 상태가 훨씬 더 나았다.
푹 쉬고 음식도 잔뜩 먹은 덕분에 뺨에 통통하게 살이 올라 반질거렸다.
“이엔, 왔어?”
“응!”
쪼르르 달려간 이엘리는 자카리의 품에 폭 안겼다.
자카리도 당연하다는 것처럼 그녀를 받아 안아 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엘리의 최근 취미는 제 남편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거였다.
“내가 쫓아다녀서 귀찮지는 않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네, 너.”
자카리가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헝클었다.
그녀도 자카리와 시선을 맞추며 웃었다.
“요새 생각하고 있는 게 있는데……”
“응?”
“남편이 생긴다는 건 정말 좋은 것 같아.”
뜬금없는 이엘리의 말에 자카리는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이엘리는 당연한 얼굴로 답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독점할 수 있는 권리가 생긴거잖아.”
“그 말은 즉.”
자카리는 장난스럽게 이엘리를 내려다보았다.
새파란 눈동자가 부드러운 곡선으로 휘어졌다.
“내가 좋아서 날 쫓아다닌다는 소 리지?”
“당연하지. 내가 내 남편이 아니면 누구를 또 좋아하겠어?”
이엘리의 말을 들은 자카리는 홱 시선을 돌렸다.
“……”
손을 들어 입가를 가리는 자카리의 귓바퀴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를 좀 놀려 주려 했을 뿐인데 자신이 더 설레 버렸다.
“흐응.”
그런 자카리를 빤히 바라보던 이엘리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뻗어 자카리의 손을 덥석 쥔다.
자카리가 달아오른 얼굴로 이엘리를 내려다보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 이며 대답했다.
“자카리는 내 남편이니까.”
“……이엔?”
“내 남편의 손 정도는 마음대로 잡아도 되지?”
그렇게 말한 이엘리는 씩 웃어 보였다.
자카리는 새삼스럽게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자각하고 말았다.
이엘리는 자카리의 손을 쥐고 꼬물 꼬물 손장난을 쳤고, 자카리는 심장 소리가 그녀에게 들릴까 전전긍긍했다.
그러던 중, 그녀는 별생각 없이 그에게 물었다.
“그건 그렇고 오늘 가신 회의가 있는 날 아니야?”
“응, 맞아.”
“……근데 왜 아직도 나갈 준비를 안하고 있는 거야?”
이엘리는 기가 막힌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자카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대답해 주었다.
“아, 그거? 미룰까 고민 중이거든.”
“미룰까 고민 중이라니?”
얘가 정말 장난치나. 이엘리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가신 회의는 북부의 모든 가신들이 모여 치르는 대형 회의였다.
그나마도 분기별로 한 번씩 진행하며 가신 전체가 공작성에 모이는 데.
“하지만 이엔이 이렇게 건강해진 게 얼마 만인데……”
자카리는 아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거 아냐. 이엘리는 뚱한 얼굴로 자카리를 흘겨보았다.
“난 매번 건강했거든?”
“이번에 납치까지 당했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자카리는 정색했다.
그런 제 남편을 바라보며 이엘리는 미간을 구겼다.
이엘리가 곧 항변했다.
“아니, 납치와 건강 상태에 관련한 상관관계는 거의 없는 것 같아.”
“그래도 몸과 마음, 둘 다 놀랐을 거 아니야.”
“지금까지 내가 쉰 건 도대체 무엇으로 보고?”
그렇게 말한 이엘리가 눈매를 슬쩍 좁혔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뻔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 회의를 취소하면 가신들은 어떡하라고.”
“하루 공작성에서 묵고 내일 회의 하면 되지.”
아니, 가신들은 따로 일정이 없겠니? 가끔 보면 자카리도 막무가내인 구석이 있었다.
아니, 실은 저런 오만한 성격이 기 본일지 모른다.
그녀를 앞에 둘 때만 다소 누그러지는 것뿐일지도.
“안 돼. 난 다른 사람에게 민폐 끼 치는 남자는 싫어.”
대답한 이엘리가 힐끗 시계를 돌아 보았다. 다행히도 가신 회의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 있었다.
“얼른 준비하자. 아직 한 시간 남았으니까.”
“하지만 너랑 떨어지기 싫은데.”
자카리가 작게 칭얼거렸다.
어린애처럼 굴지 말라는 뜻을 담아 그녀는 남편의 뺨을 꼬집었다.
“어린애도 아니고, 정말.”
“……그래도.”
이엘리에게 뺨을 꼬집힌 게 뭐가 그리 좋은지 자카리는 피식 웃었다.
그가 애정을 담아 속삭인다.
“네가 이렇게 신경 써 주는 것 자 체가 기뻐.”
“그래, 그래.”
자카리와 시선을 맞춘 그녀가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자카리의 뺨을 손으로 꼬집으며 말한다.
“난 자기 할 일을 잘하는 남자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해.”
순간 자카리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자카리가 단 호한 어조로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