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날을 세운 칼날처럼 날카로운 눈동자를 한 청년.
얼음으로 빚은 양 냉철한 두뇌를 가진 귀공자.
“북부는 당분간 비축해 둔 식량으로 버틸 수 있을 겁니다. 아마 그럴 생각일 테지요.”
후작은 한숨을 삼키면서 말을 이었다.
제도보다 더 탄탄한 경제를 유지하고 있을 정도로, 북부의 경제 규모는 제도와 견주어도 전혀 모자라지 않았다.
“그러니까 결국 이번 세금 문제를 유지한다 한들 북부에게는 큰 타격이 가지 않아요.”
답답한 마음에 론도 후작은 길게 설명을 이어 나갔다.
황녀와 황후는 나란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이미 북부를 방문해 보았 고, 북부가 얼마나 부유한 땅인지도 잘 알았다. 이미 피부로 경험했으니까.
론도 후작은 품위 따위는 모두 내 팽개치고 가슴을 퍽퍽 치고 싶은 심 정이었다.
“……우선 황제 폐하께 작금의 사태에 대해 말씀을 들어 보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요, 귀족 여러분의 노고가 크 시네요.”
정치에 참여할 수 없는 황녀는 고 작 그런 말 밖에 하지 못했다.
후작은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
“과연 희망적인 결과가 나올지는 모르겠지만요.”
한숨을 내쉰 후작이 고개를 내저으면서 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을 보던 황후가 중얼거렸다.
“이번 일, 잘 풀릴까요?”
“……글쎄요.”
이번에도 자존심 때문에 황제는 사고를 치고 말았다.
황녀는 위가 쿡쿡 쑤셔 오는 걸 느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안 될 것 같지만요.”
황녀는 반쯤 포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의 오라비는 오만함과 자존심으로는 제국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사람이 아닌가.
또한 백성들보다는 스스로의 자존심이 훨씬 더 중요한 사람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던 황녀는 입술을 짓 씹었다.
요슈아는 황제의 자리에 걸맞지 않았다.
황제는 불쾌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사실 황제의 입장에서는 그럴 만도 했다.
이른 아침부터 귀족들이 몰려와, 감히 이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이 인 자신을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이른 아침부터 귀족들이 몰려와 짐을 알현하는 이유가 도 대체 뭔가?”
황제는 불쾌감을 감추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평소 행동은 그렇게나 굼뜨던 귀족 들이, 아침부터 황궁에 입궁해 알현 신청을 넣고 알현실에 대기까지하고 있었다니.
아무래도 뭔가 속셈이 있는 것 같은데, 그 속셈이 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황제는 두 눈을 가늘게 치떴다.
“폐하, 폐하께서 직접 북부에게 세금을 물리기로 결정하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잠시 후, 귀족들을 대표하여 론도 후작이 입을 열었다.
정중하긴 하지만 날이 선 목소리였다.
“어째서 이런 커다란 문제를 저희와는 일절 상의 없이 진행하셨습니까?”
고작 이런 별것조차 아닌 문제 때 문에 쫓아온 거란 말인가.
황제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오만불손한 북부에게 황가가 합당 한 처벌을 내리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닌가?”
황제는 당연하다는 얼굴이 되어 그렇게 말했다.
귀족들은 예의조차 잊어버린 채로 기가 막힌 표정을 짓고 말았다.
황가의 자존심은 둘째 치고, 이건 눈앞의 귀족들까지 무시하는 처사였다.
“큰 처벌도 아니고, 고작 북부에게 세금을 물리는 문제일세.”
헤센바이츠 공작가는 귀족가 중에 서도 가장 강력하고 신분 높은 가문이었다.
제도의 귀족들을 대표하는 가문은 론도 후작가였지만, 그런 론도 후작 가도 헤센바이츠 공작가가 제도에 들어올 때면 귀족들의 대표 자리를 공작가에게 넘길 정도로.
그런 가문에게 이런 무례를 저지른 다니.
‘도대체 폐하께서는 귀족들을 어떻게 생각하시는 거지?’
귀족들이 그런 의문을 갖게 된 것 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가장 신분 높고 강력한 귀족에게도 저런 대우였으니, 그 아래에 있는 다른 귀족들은 어떻게 대할 것인지 눈에 보인다.
“그런데 왜 다들 이렇게 몰려와 짐을 귀찮게 하는 게지?”
오히려 뻔뻔하게 묻는 그 모습에 귀족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폐하.”
하지만 이대로 눈 감고 넘어가기에는 지나치게 큰일이다.
론도 후작이 결연하게 입을 열었다.
“이번 세금 문제로 큰 피해를 입는 쪽은 북부가 아니라.”
황제가 미간을 찌푸리며 론도 후작을 마주 보았다.
하지만 론도 후작은 끗끗하게 말을 이었다.
“오히려 제도 쪽이라고 생각합니다.”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군, 후작.”
옳은 말을 하고 있음에도 쓸데없는 소리라며 일축하는 황제였다.
후작은 돌아 버릴 것 같았다.
“근래 겨울이 무척 추워졌습니다. 북부에서 전량 독점하여 공급하는 모피의 필요량도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고요. 모피 가격이 그나마 균등하게 유지되는 이유는 모두 북부 덕분입니다.”
그러나 론도 후작은 최대한 이성적으로 현재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적어도 황제와 같은 눈높이를 가지고 싶지는 않아서 였다.
황제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었다. 그가 비딱한 어조로 묻는다.
“지금 짐 앞에서 북부를 옹호하는 겐가?”
“북부를 옹호하는 게 아니라 현실을 자각시켜 드리는 겁니다.”
하지만 후작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고작 자존심 하나 때문에 이런 일을 벌이다니.
이번 문제는 황제 개인보다도 백성 들에게 더 큰 피해가 오는 일이다.
그것 만큼은 막아야했다.
“모피는 어쨌든 분류로는 사치품에 들어가니, 그렇다 치더라도.”
후작의 말에 황제가 미간을 꿈틀 구겼다.
후작의 말이 꽤나 거슬리는지, 써늘한 얼굴을 한다.
“북부는 그 이상으로 제도에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후작의 등 뒤에서 있던 귀족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약간 허를 찔린 표정을 했다.
고작해야 지금 말한 모피 정도만 들여오고 있는 줄 알았는데, 모피가 아닌 다른 요소가 더 있다고?
“북부는 양식 사업을 성공시켰고, 그로 인해 저렴한 해산물을 제도에 유통시키지 않습니까.”
“……”
황제는 입을 꾹 다물었다.
후작은 힐끔 황제의 눈치를 살폈 다.
이제 조금은 마음을 바꾸려나?
“……하지만 북부는 이제 곡물 수입을 할 수 없게 되지 않나.”
그러나 그것은 후작의 오산이었다.
황제가 당연하다는 얼굴로 대답한 것이다.
마치 떼를 쓰는 어린아이 같은 태 도에 후작의 표정이 금세 딱딱해 졌다.
씩 웃음을 지은 황제가 말을 이었다.
“식량이 없는 영지는 무너질 수밖에 없어, 우리는 침착하게 기다리기 만 하면 되네.”
지금 뭐라 지껄이시는 겁니까? 후작은 할 수만 있다면 황제에게 쏘아 붙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폐하, 그건 상대가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식량이 모자랄 때나 가능한 방법입니다.”
기가 찬 후작이 황제의 말에 반박했다.
“하지만 북부는 비축하고 있는 식량이 상당합니다.”
황제는 제 대답이 상당히 이성적이며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들어오는 반박에 저렇게 표정을 찡그리지 않을 테니까.
후작은 답답함을 간신히 눌러 참았다.
“남부에서 곡물을 들여오지 않아도 꽤 오래 버틸 수 있을 겁니다.”
대신 후작은 눈앞의 사실을 설명하는 걸로 황제를 향해 상당한 심적 폭력을 행사하기로 했다.
“고작 몇 달 정도 세금을 부과한다하여 꺾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계속해서 세금을 부과하면 그만 아닌가?”
그러나 황제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어떻게 저렇게 속 편한 생각을 할 수가 있지? 정말로 저 사람이 이 제국의 어버이이자 만민을 다스리는 황제가 맞는 건가? 후작은 기겁했다.
“폐하, 북부에 세금을 부과한다는 건 그만큼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정치적 부담이라니, 세수는 국가의 기본 아닌가.”
“북부와 제국은 같은 제국이고, 제국 내에서 이런 불합리한 세금을 매기는 건 위험합니다.”
고집을 부리는 황제에게 후작은 달래듯이 말을 이었다.
저도 모르게 귀족들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론도 후작이 아니었다면 귀족들은 황제 앞에서 입도 벙긋하지 못했을 터였다.
“이 문제가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 지 폐하께서는 정녕 모르십니까?”
론도 후작이 날카로운 어조로 황제에게 따져 물었다.
황제는 뚱한 얼굴로 후작을 마주 보았다.
“북부에 세금을 부과한다는 것은 북부가 제국의 일원이 아니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가!”
순간 황제가 와락 성을 냈다.
북부가 제국에서 벗어나 독립한다는 건 황제의 역린 이었으니까.
“북부는 제국의 일부야, 감히 그따위 해석을 하다니! 이 오만한……!”
후작은 냉정한 얼굴로 황제를 마주 보았다.
설마 이 문제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던 건가.
“같은 나라 내에서 세금을 부과하는 건, 지금껏 전례가 없었던 일이니까요.”
하지만 오히려 잘됐다고 론도 후작은 생각했다.
황제를 설득하기 위해서라면, 차라리 이 문제를 짚고 넘어가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황제의 드높은 자존심을 어떻게든 건드려 보는 것.
“북부가 제국에서 독립할 수 있는 근거를 주고 싶으신 겁니까?”
그러므로 후작은 차분한 어조로 황제에게 되물었다.
“게다가 북부에서도 제도 측에 세금을 부과하겠다며 맞불을 놓았습니다.”
“북부가 감히 제도에게 세금을 부 과해? 무례하고 불손한 것들!”
“이건 바로, 공작가가 황가에게 굽히지 않겠다는 뜻을 표하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후작은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간신히 삼켰다.
벽과 대화하는 기분이다. 답답해 죽을 것 같다.
“그리고 정말로 북부가 독립한다 면, 불리해지는 쪽은 황가가 아닙니까?”
“……”
황제는 처음으로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북부가 제국에서 가지고 있는 위치는 굉장히 중요했다.
지리적인 위치와 정치적인 위치 모두.
북부는 제국에서 가장 영토가 넓은 지역이었으며,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야만족과 잇닿은 방패 역할을 하지 않나.
“……조금 더 생각해 보고 다시 한 번 회의를 소집하겠네.”
결국 황제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후작과 귀족들은 그 미온적인 태도가 답답했다.
“폐하! 이 문제는 고민하시거나 고집을 부리실 일이 아닙니다!”
저도 모르게 후작은 언성을 높였다.
어째서 황제가 문제를 질질 끌어 대는지 이해가 안 간다.
“한시바삐 북부와의 관계를 정상화 시키셔야…….!”
“지금 제국의 어버이인 황제에게 목소리를 높이는 겐가!”
황제는 왈칵 성을 냈다. 후작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저런 식으로 자신의 위치를 과시하며 고집을 부린다는 그 행동자체가, 황제로서 걸맞 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죄송합니다. 잠시 이성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눈앞의 이기적이고 철없는 사내는 그래도 제국의 황제였다.
후작은 입술을 깨물었다.
‘차라리 황녀 전하께서 제위를 이으셨다면.’
저도 모르게 후작은 그렇게 생각했다.
영민하고 상황 판단이 빠른 황녀.
만약 황녀가 제위를 이었더라면 제국은 좀 더 나은 나라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후작은 그 생각을 애써 묻었다.
‘……불충한 생각이다. 하지만……’
자꾸만 그런 욕심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숨을 쌕쌕 몰아쉬던 황제는 주변을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