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그 와중에 이엘리는 익숙한 디저트 하나를 발견했다.
자카리가 눈웃음을 치면서 대답해 주었다.
“카페 로랑의 롤케이크야.”
첫눈처럼 새하얀 크림을 가득 넣은 롤케이크 안쪽에는 빨간 딸기가 구슬처럼 콕 박혀 있었다.
“오랜만에 먹고 싶다고 했었잖아?”
“그, 그랬었지.”
하지만 그냥 그것도 별생각 없이 말한 것뿐이었는데.
지금 이엘리의 침상 주변에는 간식 거리가 넘쳐 나도 너무 넘쳐 났다.
“……정말 고마워.”
마치 주인에게 제가 가장 아끼는 장난감을 물어다 주고, 칭찬을 요구하는 강아지 같은 자카리의 눈빛을 보며 이엘리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녀는 얌전히 차려진 음식을 모두 배 속에 집어넣기로 했다.
두 사람은 도시락을 말끔히 먹어 치운 이후 하릴 없이 빈둥거렸다.
내내 꿀벌처럼 열심히 일하던 공작 부부였기에, 이런 휴식은 사실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오늘도 자카리는 자신의 아내를 품 안에 가둬 넣은 채,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도록 했다.
이엘리는 어린아이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자카리. 자?”
자카리의 품에서 꼼지락거리던 이엘리는 문득 자카리의 얼굴을 올려 다보았다.
아까 전부터 농담을 걸며 웃음을 터뜨리는 때가 점차 줄어든다 싶더니, 이제 그는 두 눈을 곱게 닫고 있었다.
“……음, 자나 보네.”
하지만 이렇게 자면 불편할 텐데. 이엘리는 미간을 좁혔다.
자카리는 지금 그녀를 등 뒤에서 끌어안은 채 고개를 앞으로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목이 뻐근할 것이 신경 쓰였다.
“으으.”
이엘리는 혼신의 노력 끝에 자카리를 깨우지 않고 그 품에서 빠져나오는 것에 성공했다.
자카리의 고개를 제 쪽으로 살짝 끌어당기자, 그의 몸이 스르르 바닥에 무너졌다.
그 모습을 본 그녀가 웃었다.
‘귀여워.’
이엘리의 무릎을 베고 잠든 자카리의 얼굴은 마치 순진한 아이 같았다.
눈처럼 하얀 피부 위로 긴 속눈썹이 열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녀는 사내답지 않게 말랑말랑 보드라운 뺨을 손가락으로 쿡 찌르다 가, 그의 이마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주었다.
‘이렇게 잠든 모습을 보는 거, 오랜만이야.’
이엘리는 흐뭇한 얼굴이 되었다.
자카리의 이마에 쪽 입을 맞춘 그녀가 조그맣게 소곤거렸다.
“잘 자.”
이엘리는 손 그늘을 만들어 자카리의 눈가에 쏟아지는 햇빛을 가려 주었다. 따스한 오후였다.
자카리는 분홍색 꽃잎들이 눈처럼 휘날리는 장소에서 있었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엘리가 이야기해 주었던 바로 그 장소였다.
거대한 아샤 나무 아래로 은발청안의 남자가 서 있었다.
“……뭐야, 당신.”
자카리는 비딱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남자의 긴 은발이 바람에 떠밀려 부드럽게 흩날렸다.
‘ ‘현재의 나’를 여기서 만나 보는 건 처음이군.’
새파란 눈동자는 자카리를 똑바로 바라보는가 싶더니 부드럽게 휘어졌다.
자카리는 그 미소를 보며 기분이 수직으로 하강하는 것을 느꼈다.
정말 나랑 똑같이 생겼군. 기분 나쁘게.
“누가 ‘현재의 나’야?”
‘현재의 존재들은 일단 부정부터하고 보는군.’
남자는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 말을 들으며, 자카리는 자신의 아내 또한 남자의 말에 자신과 같은 반응을 했음을 깨달았다.
역시 부부는 같은 마음인 거야. 자카리는 씩 웃었다.
“내가 당신과 같은 존재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자카리는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자카리는 저 겨울의 용인지, 조상 님인지, 혹은 자신의 과거인지 모를 저 작자에게 굉장히 유감이 많았다.
자카리는 사납게 시선을 빛내며 쏘아붙였다.
“그보다 당신, 감히 내 아내에게 그딴 흔적이나 남기고.”
남자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두 눈을 가늘게 뜬 자카리는 남자에게 차게 되물었다.
“죽고 싶어?”
‘……주술을 말하는 건가.’
“그래, 그거.”
자카리는 이엘리의 손등에 남아 있는 아샤꽃 문양만 생각하면 속이 뒤 집혔다.
나도 내 아내에게 그런 흔적은 한 번도 남겨 보지 못했는데, 저 망할 작자가 먼저!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지워 줄까?’
“누가 지워 달라고 했나?”
뭐 어쩌라는 것인지. 이제 남자는 딱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픽 웃었다.
‘어쨌든 그런 반응인 걸 보니, 넌 그녀를 무척 사랑하나 보군.’
“당연하지. 온 세상을 부수고 단둘 이 있고 싶을 정도야.”
자카리는 뭘 그런 당연한 것을 묻나, 그런 표정이 되어 말했다. 남자 가 되물었다.
‘그러면 그녀가 기뻐하지 않을 텐데?’
“알아. 그래서 참고 있는 거고.”
자카리는 뚱하니 대답했다.
남자는 자카리를 이해한다는 양, 차분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예전에 그런 충동에 시달렸 던 적이 있었지.’
“그런 충동?”
‘그래, 세계를 부수어 버리고 싶었던 중동.’
자카리는 멈칫했다.
남자가 말하고 있는 그 충동은 자카리가 한때 느꼈던 그 충동과 같았다.
그 충동을 이해하고 있는 존재가 세상에 또 있을 줄 몰랐다.
압도적인 소유욕, 그리고 만물을 소멸시켜 버리고 싶은 그 감각. 오로지 이엘리와 이 세계에 단둘이 남아 있고 싶은 절박한 기분.
‘그러니까 뭐든지 후회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도록 해.’
“……너.”
‘그녀를 돌려받기까지……”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입술에 희미 한 미소가 스쳤다.
너무 오래 바람에 시달린 나무처럼, 지치고 피로한 얼굴.
그럼에도 애정을 버리지 못한 그 다정한 목소리가 자카리의 귀에 스쳤다.
'너와 나는 너무 오래 기다렸으니까.’
“그게 무슨 뜻이야.”
‘너와 나는 결국 한 인물의 과거와 현재지.’
자카리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남자는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후 나직한 어조로 말한다.
‘그리고 그 모든 시간 동안, 우리는 오직 그녀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이야.’
“그녀라 하면……”
‘우리의 아샤 말이지.’
자카리의 눈빛이 싸늘하게 빛났다.
턱을 당긴 자카리가 남자를 쏘아보며 단호하게 답한다.
“우리의 아샤가 아니야. 내 이엘리 지.”
남자는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저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겨울의 은룡 헤센바이츠와 봄의 요정 아샤는 이미 지난 과거였다.
현재의 삶은 이엘리와 자카리가 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넌 내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
“그게 무슨 뜻이지?”
‘너만큼은…… 세계를 파괴하려는 그 충동에 휩쓸리지 말라는 뜻이야.’
그 경고를 들은 자카리는 어깨를 굳혔다.
그 목소리와 눈빛은 이미 한 번 세계를 망가뜨리려 했던 자의 것이었다.
자카리는 무언가 더 물어보려고 했 지만, 남자는 제 할 말은 모두 끝났 다는 것처럼 소매를 펄럭였다.
자카리는 순식간에 그 세계 밖으로 밀려 나갔다.
어느새 세상은 진홍색 황혼으로 물들어있었다.
고개를 갸웃 기울인 채 제 남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던 그녀는, 상냥한 목소리로 자카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잘 잤어?”
“으응……”
이엘리를 올려다보던 자카리는 그대로 조그맣게 웃었다.
이엘리가 자카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무슨 꿈을 꾸었기에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아?”
“……남의 아내에게 질척거린 조상님을 만나 뵙고 왔지.”
이엘리는 눈을 동그랗게 치떴다. 설마, 자카리도 그 은룡을 만난 건 가. 그녀가 얼른 되물었다.
“그래서 뭐라고 하셨는데?”
“글쎄.”
자카리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세계를 파괴하려는 충동에 휩쓸리지 말라는 경고를 들었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대신 자카리는 그녀의 목을 안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으음……”
깊숙하게 이어지는 키스에 그녀의 목 안에서 달콤한 신음 소리가 들렸다. 자카리가 속삭였다.
“사랑해, 이엔.”
“……뭐?”
“사랑한다고.”
느닷없는 사랑 고백을 들은 이엘리는 살짝 뺨을 붉혔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렇게 말하 면서도 싫지는 않은 눈치다.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며 자카리는 자신의 불안함을 꾹꾹 눌렀다.
* * *
자카리의 불안함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발현했다.
느닷없이 황가에서 북부와 제도를 왕래하는 상인들에게 높은 세금을 물게 한 것이다.
보통 같은 제국 안의 영지는 서로 세금을 면제하거나 적은 세금만을 물린다.
명목상 북부와 제도도 같은 제국이니까 지금껏 세금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정말 너무합니다!”
마르텔 경은 분한 마음에 왈칵 언성을 높였다.
황제는 별안간, 북부를 기반으로 하여 제도를 오가는 상인들에게 거의 국가 간의 관세와 같은 비율의 세금을 물리기로 결정한 것이다.
당연히 부당한 처사였고, 무엇보다도 상인들의 생활에 직격탄이 가해졌다.
북부의 상인들은 각자 자신들의 영주들에게 찾아가 지금 일에 대해 읍소했고, 북부의 귀족들은 긴급회의 에 들어갔다.
“황제가 드디어 막 나가기로 결정 했나 보군.”
턱을 어루만지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자카리는 이윽고, 냉정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건…… 엄연히 보복의 의미를 가진 행동인 것 같은데.”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마르텔 경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카리를 마주 보았다.
평소 정치에는 관심 없이 기사단을 관리하는 일에 집중하던 그였지만, 지금의 일은 그 중요도가 달랐다.
현재 황제가 보이는 태도는, 정치에 대해 별다른 식견이 없는 마르텔 경조차 답답하게 만들었다.
제국 만민의 아버지라는 지위가 울 고 갈 일이다.
적어도 눈 가리고 아웅은 해 줘야 할 게 아닌가, 북부 사람들은 제국의 국민이 아니라는 소린가?
“우선 가신 회의를 소집해 두었으니까, 거기서 좀 의견을 나누어 볼 생각이야.”
몸을 일으킨 자카리가 불안한 낯이 된 마르텔 경과 시선을 맞춘다.
씩 미소 짓는 얼굴은 평소와 다름 없이 여유로웠기에, 마르텔 경은 상황에 맞지 않게 약간이나마 안도하고 말았다.
자카리가 침착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아마 황제는 이번 세금 조치를 통해, 어떻게든 북부가 조아리기를 바 라는 것 같지만.”
“……각하.”
“난 황제의 뜻대로 일이 쉽게 흘러 가도록 두지는 않을 생각이야.”
그렇게 말하는 자카리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 * *
“자카리, 황가가 세금을 올렸다고 들었어. 사실이야?“
그날 저녁, 이엘리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카리에게 물었다.
그가 불안해하는 그녀를 달래 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이엔.”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네가 걱정할 일은 없게 만들 테니까.”
단호하게 말한 자카리가 그녀의 뺨을 살짝 어루만졌다.
이엘리를 대하는 자카리의 손길은 언제나처럼 다정하기만 하다.
그녀의 이마에 짧게 키스한 자카리가 그녀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그녀는 그의 따스한 품에 고개를 기댔다. 황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 * *
북부의 귀족들은 모두 공작성으로 집결했다.
“도대체 황제 폐하께서 무슨 생각으로 행동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정말로 북부와 적대 관계를 만드시려는 것일까요?”
귀족들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북부에 영지를 가진 귀족들이었으니, 노골적으로 북부를 배척 하는 행동을 긍정적으로 여길 수 있을 리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