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황녀는 부드럽지만 꺾이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엘리는 조용히 고개만을 끄덕였다.
“정말 고마워요. 공작가의 호의로 푹 쉴 수 있었어요.”
진심이 담긴 인사를 남긴 황녀가 쌕 웃었다.
그러고는 가볍지만 진지한 어조로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폐하께서도 단 하나, 옳은 추측을 하신 건 있어요.”
“그건 무엇인가요?”
“별 건 아니고요. 그냥 가끔씩……”
황녀의 회색 시선이 먼 곳을 바라 보는 것처럼 아득해진다.
황녀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라면 이 제국을 좀 더 아끼고 사랑할 수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든다는 거죠.”
“그건……”
“역시 제가 쓸데없는 소리를 했 죠?”
그렇게 말한 황녀는 푹 쉬라는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급히 황녀를 붙들었다.
“황녀 전하!”
“네?”
“쓸데없는 소리가 아니예요.”
이엘리는 황녀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이엘리는 단호한 목소리로 황녀에게 못 박듯 말했다.
“저는 전하께서 훨씬 더 잘하실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고마워요.”
황녀는 처음으로 양 뺨을 가볍게 물들였다.
까닥 고개를 숙여 보인 그녀가 밝게 웃어 보였다.
“저는 언제나 공작 부인에게 힘만 얻고 가네요.”
“황녀 전하께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면, 전 그것으로도 족하니까요.”
이엘리의 말에 황녀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여자는 서로를 향한 단단한 유대감을 느꼈다.
따스한 우정과 동질감으로 이루어 진 관계.
그리고 이튿날, 황녀는 제도로 떠 났다.
황녀를 배웅한 이엘리는 다소 묘한 기분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때 자카리가 등 뒤에서 이엘리를 끌어안았다.
놀라지도 않고 이엘리가 남편을 돌아보자, 자카리는 그녀에게 키스했다.
“이엔, 황녀 전하께서 떠나셔서 섭섭해?”
“조금은.”
이엘리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마음을 나눈 친구가 떠났는데 허전 하지 않을 리가 없다.
그는 살짝 코끝을 찡그리는가 싶더니 아내의 이마에 제 이마를 톡 기댔다. 장난스럽게 소곤거린다.
“그래도 내가 있으니까 참아.”
“뭐야, 그게.”
자카리의 애교 섞인 목소리에 이엘리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문득 이엘리는 정원을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면 납치당했을 때, 계절 에 맞지 않는 아샤꽃을 피워 내곤 했었지.
‘내가 아샤 요정이라니.’
이엘리는 미심쩍은 기분이 되어, 야트막한 장식 울타리를 휘감은 들 장미 덩굴을 톡 건드려 보았다.
그와 동시에 새하얀 들장미가 토도독 꽃망울을 터뜨렸다.
겨울에 가까운 날씨에 화사하게 피어난 들장미는 계절과는 거리가 먼 아름다움을 뽐낸다.
자카리는 경악한 표정이 되었다.
“이엔? 이거 설마.”
“어, 응…… 내가 한 거 맞아.”
이엘리는 머쓱한 얼굴로 자카리를 올려다보았다.
자카리는 눈을 깜빡거리다 말고 중얼거렸다.
“사실 예전에도 네가 전설 속 아샤 요정이랑 닮았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으엑, 그게 무슨 소리야.”
이엘리는 몸서리를 쳤다.
와, 손발이 오그라들다 못해 사라 질 것 같아. 하지만 자카리는 진지했다.
“그런데 네가 진짜로 아샤 요정이었다니.”
그렇게 말하며 그녀를 바라보는 자카리의 시선에는 애정만이 가득 차 있어서, 이엘리는 머쓱해지고 말았다.
저 시선은 뭐지. 마치 어린아이를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은 그런 뿌듯한 시선.
“하지만 이엔.”
“응?”
“고민이 있다면 내게도 털어놓아 주면 기쁠 거야.”
양손을 들어 이엘리의 뺨을 가볍게 감싸 안으며 자카리가 말했다.
이엘리는 눈을 깜빡였다.
“나, 고민 있어 보여?”
“그거야 네 표정만 봐도 딱 보이니까.”
“그게……”
이엘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이엘리는 자카리에게 하나 말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녀가 잃어버린 조각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녀는 아직 완벽하지 않으며, ‘회색 기사’에게 잃어버린 조각을 되찾아야 한다는 그 말.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 그녀는 미간을 좁혔다.
“……그냥.”
“이엔?”
“아무것도 아니야.”
그녀는 씩 미소 지었다.
자카리는 의심스러운 얼굴을 했지 만, 그녀는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내가 기억을 잃었다고 했지. 그리고 회색 기사가 나의 일부를 빼앗아 갔다고.’
그랬었다. 그녀는 힐끔 제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그 위엔 아샤꽃무늬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
앞으로 난,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엘리는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 * *
그렇게 헤센바이츠 공작성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제 딸이 납치되었다는 사실에 기겁한 블랑쳇 자작 부부는, 며칠 동안 공작성에 체류하기로 했다.
이엘리는 또 한 번 잔소리 감옥에 갇혔다.
“이것아, 너 때문에 북부 전체가 봉쇄되었었다니까?!”
“아니, 엄마! 저 제가 잘못한 거 없다니까요?!”
이엘리는 블랑쳇 자작 부인과 악악거리며 입씨름을 하고 있었다.
자카리는 웃는 얼굴로 두 모녀의 실랑이를 지켜보았다.
평소 어른스러운 이엘리였지만, 부모 밑에서는 소녀의 낯이 된다.
“누가 네가 잘못했대!?”
“그런데 왜 저한테 성질이예요!”
“걱정했으니까 그렇지, 엄마 마음도 몰라!?”
두 모녀는 다시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그 말다툼 자체가 서로를 사랑하고 있음을 여실히 드러내 주 었기에, 자카리는 그 모습마저도 눈 물겹도록 아름답게 보였다.
괜히 제 딸에게 뾰족하게 굴던 자작 부인의 눈에 글썽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제 딸을 와락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야, 우리 이엔.”
“……엄마, 뭐 이런 거 갖고 울고 그래.”
이엘리는 어머니의 눈물을 닦아주며 웃었다.
곁에서 있던 블랑쳇 자작도 마찬 가지였다.
그는 코끝이 찡했는지, 시선을 괜 히 하늘로 올리며 아내와 딸의 다정한 모습을 모른 척하고 있었다.
“아무튼 당분간은 너, 이상한 데 나다니고 그럴 생각 하지 마.”
“아니, 애초에 저 이상한 곳에 나 다닌 적 없었는데요?”
“이엘리 너 정말!”
조금 감동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던 두 모녀는 다시 악악거리기 시작했다.
이엘리의 뺨을 힘껏 꼬집으며 자작 부인은 잔소리를 건넸고, 이엘리도 그에 맞서 언성을 높였다.
그 평화로운 광경을 보며 자카리는 그만 웃어 버렸다.
언제까지나 이런 평화가 유지되기를 자카리는 기원했다.
이후 이엘리가 누리는 일상은 아주 평화롭고, 아주 풍요로웠다.
이엘리가 요새 하는 일은 고작해야 침대에 누워 손닿는 곳에 놓인 그녀 취향의 간식을 집어 먹거나, 느긋하게 산책을 하는 정도였다.
공작성 사람들은 안주인을 세심하게 신경 썼다.
그도 그럴 게, 그녀가 잠들어 있던 당시의 모습은…….
“완전히 살얼음판이었거든요.”
안주인 곁에 붙어 앉은 메리가 단 정적으로 말했다.
초콜릿을 오물거리던 그녀는 조금 놀랐다.
“그 정도였어?”
“네, 그 정도였어요.”
이엘리는 머쓱해졌다.
하긴 자신은 자카리와 결혼 생활을 하면서 몇 번이나 쓰러졌었고, 그때 마다 자카리는 살벌한 표정이 되어 서 공작성의 분위기를 한없이 가라 앉히곤 했었다.
“미안해.”
“아뇨, 안주인 마님의 잘못은 아니 죠.”
메리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대답했다.
어쩐지 그녀가 자카리에 대해 심대 한 유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 이엘리는 슬쩍 눈치를 살폈다.
그나마 이런 분위기가 만들어진 게 훨씬 나았다.
‘우리가 이혼했던 그 당시에는, 아예 숨조차 편히 쉬지 못했다고 하니까.’
이엘리는 성의 없이 손가락을 들어 초콜릿 상자를 뒤적였다.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요.”
그녀가 새 초콜릿을 꺼내 한입에 쏙 집어넣으며 말했다.
들어온 사람은 공작성의 집사였다. 저 사람이 웬일이지? 초콜릿 안에 든 아몬드를 오독오독 씹으며 그녀가 물었다.
“무슨 일이예요?”
“안주인 마님의 몸 상태는 어떠하 신지 여쭤 보려고 왔습니다.”
“제 몸 상태요?”
초콜릿을 삼킨 이엘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저 무뚝뚝한 집사가 내 몸 상태를 살피려고 여기까지 왔다고? 집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엘리를 바라보더니, 만면에 활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말 다행입니다.”
그 목소리에 짙은 안도감이 스며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건 이엘리의 착각일까. 집사가 말했다.
“이제 각하께서도 조금 덜 날카롭 게 구시겠군요.”
“그래서 내가 괜찮은지 상태를 확인하려고 여기에 온 거예요?”
텅 빈 초콜릿 상자를 옆으로 치우 면서 이엘리가 되물었다.
집사는 슬쩍 눈썹을 치켜 올렸다.
“물론이죠. 안주인 마님의 건강 상태는 집사로서 당연히 챙겨야 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맙긴 한 데…… 자카리가 무서워서 그런 건 아니고요?”
“절대로 아닙니다.”
집사가 정색하며 이엘리에게 대답했다.
이엘리는 키득키득 웃으며 곱게 눈매를 접어 내린다.
“아하, 그렇구나. 그러니까 나 걱정해서와 준 거지요? 고마워요.”
“그, 그게.”
“세상에, 지금 안주인을 걱정하면서 부끄러워하는 거예요?”
이엘리는 짓궂은 목소리로 장난스 럽게 말했다.
집사는 좀 민망해졌는지 흠흠 헛기침을 했다.
“아무튼 몸조리 잘하십시오.”
“이렇게 누워서 간식만 먹다 보면 살찌겠는걸요.”
“마님께서는 살 좀 찌셔도 됩니다.”
단호하게 말한 집사가 방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엘리가 쿡쿡 웃었다.
공작 부부는 오랜만에 정원으로 산책에 나섰다.
손에는 온갖 음식을 바리바리 챙겨 넣은 도시락 바구니까지 들고 있는 상태였다.
따뜻한 옷을 몇 겹이나 껴입은 채, 이엘리는 미간을 좁혔다.
“난 그냥 햇볕이 따스하다고 했을 뿐인데.”
“알아. 그냥 내가 내 아내를 모시 밖에서 도시락을 먹고 싶었을 뿐 이야.”
자카리가 어깨를 으쓱거리자, 이엘리는 뚱한 얼굴을 했다.
아니, 그냥 햇살이 따뜻하다는 이 유로 밖에서 도시락까지 먹는 이 행동력은 도대체 뭐냐고.
공작성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도시락이요? 걱정 마십시오, 마님 이 좋아하는 음식만 골라 만들어 드릴 테니까요!’
아니, 그런 의욕까지는 필요 없어.
아무래도 이엘리가 최근 납치 사건에 휘말린 이래로, 공작성 사람들은 그들의 안주인 마님을 더욱 싸고 돌았다.
자카리가 그녀에게 미소했다.
“이리 와, 이엔.”
“응.”
이엘리는 사뿐사뿐 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도시락을 먹기로 한 장소는 정원에 만들어져 있는 가제보 안이었다.
햇빛을 머금어 상앗빛으로 빛나는 가제보 안쪽에는 화로가 불타고 있었다.
“화로까지 준비해 뒀네?”
“햇빛은 따사로워도 날씨 자체는 차가우니까.”
자카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테이블 위로 체크무늬 천을 펼친다.
이엘리는 다시 공작성 사람들의 행동력에 감탄했다.
화로와 테이블과 접이식 의자는 물론이고, 화로의 불길이 잘 닿는 곳에는 긴 의자까지 마련해 두지 않았 나.
정말이지 오붓한 데이트를 위한 최적의 장소였다.
“여기 앉아.”
“응, 고마워.”
이엘리는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자카리는 그녀의 무릎에 손수 냅킨을 펼쳐 주고, 테이블 위로 가지런히 식기를 놓았다.
차곡차곡 차려지는 음식들은 도시락이라 하기에 미안할 정도다.
“어, 이 롤케이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