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8화 (148/196)

148화

이미 공작에게 모든 상황에 대해 설명을 들은 탓이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그녀는 영민한 사람이었다.

‘내 오라버니가 아니라면 이 모든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이 없어.’

로렌 백작 영애를 유혹함으로써 로렌 백작가문을 뒤에서 움직이고, 암살자를 잠입시킨다.

무엇보다도 공작 부인을 향한 집요한 집착은 어떠한가.

그 모든 조건이 황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제 오라버니가 저지른 짓이잖아요.”

단호한 얼굴은 현실을 모두 알고 있는 자 특유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엘리는 말을 삼켰다.

“정말로 미안해요. 전 언제나 공작 부인에게 큰 도움을 얻고 있는데.”

황녀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 표정이 너무 괴로워 보여서, 이엘리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공작 부인은 황가 때문에 항상 피해만 받으시네요.”

“괜찮아요, 한두 번도 아닌데요 뭐.”

이엘리는 어떻게든 황녀를 달래 주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을 잘못 선택했는지, 황녀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져 버렸다.

하아,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이는 통에 이엘리는 기겁했다.

“……하지만 제 오라버니도 정말 이해가 안 가요.”

그때 황녀가 손을 들어 이마를 짚으며 입을 열었다.

앓는 소리를 섞어, 황녀가 작게 중얼댄다.

“공작께서 북부 전체에 봉쇄령을 내릴 정도로 중요한 사안을 어떻게 그렇게……”

“어, 음. 그랬죠, 북부에 봉쇄령이 내려졌었죠……”

이엘리는 좀 민망해졌다. 그래도 자신 때문에 북부 전체를 봉쇄한 건 너무 과한 처사 아닌가.

“아무리 제국의 지존이시라지만, 이젠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이엘리를 앞에 둔 황녀는 여러모로 머릿속이 복잡한 것 같았다.

그녀가 한숨을 섞어 입술을 열었다.

“이제 슬슬 황궁으로 돌아가야 할 텐데, 저도 어떻게 해야 할지.”

“……저, 황녀 전하.”

그런 황녀를 가만히 보던 이엘리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황녀에게 제안할 게 있어서였다.

“그러고 보니 말씀드릴 게 있어요.”

“제게요?”

황녀가 의아한 얼굴로 이엘리를 마주 보았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엘리는 말을 꺼냈다.

“혹시 공작령에 계속 머무실 생각은 없으세요?”

“공작령에 머문다고요?”

“네. 황녀 전하께서 마음이 내키신 다면 그렇게 하셔도 돼요.”

이엘리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우리 때문에 그렇게 피해를 입었는데도 공작 부인은 여전히 자신을 배려하고 있었다.

황녀는 코끝이 찡해지는 걸 느꼈다.

이엘리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차피 폐하께서는 황녀께서 공작가와 친밀하건 그렇지 않건, 계속 경계하실 거예요.”

이엘리는 한숨을 삼켰다.

이번 일을 통해, 그녀는 황녀와 황제의 관계를 똑똑히 알게 되었다.

“게다가 이번 납치 사건에서 전 납치만 당했지만…… 황녀 전하께서는.”

황녀는 납치가 아니라 거의 살해 위협을 당하지 않았나.

이엘리는 황녀에게 칼을 들이밀던 그 작자들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했다.

그건 위협하려는 동작이 아니었다. 상대를 죽이려는 의도가 명확한 동작이었다.

아마도 그들이 그렇게 행동한 이유는 아마도 황제의 명령 때문이리라.

“……황제 폐하의 명령이 아니었다 면 그 누가 감히 황녀 전하께 칼을 휘두를 수 있을까요?”

“……”

“그렇다면 차라리 공작가의 보호를 받으시며 사시는 게 나을지도 몰라요.”

황녀는 말없이 이엘리를 마주 보았다.

이엘리는 마른침을 삼켰다.

솔직히 이런 제안이 황녀에게 무례 할 수 있다는 건 알고 있다.

황녀가 헤센바이츠의 보호 아래에 산다는 건, 황녀가 ‘공작가와 결탁했다’는 타인의 의심을 무릅쓸 수 있다는 것 또한.

그럼에도 제안하는 그 이유는…….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에요. 다만 전……”

이엘리는 잠시 머뭇거렸다.

연녹색 눈동자가 황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곧장 말을 덧붙였다.

“……전하께서 위험해지시는 그 상황이 싫어요.”

황녀는 속을 알 수 없는 눈동자로 이엘리를 응시한다.

이엘리는 마른침을 삼켰다.

“저는…… 황녀 전하를.”

이엘리는 주먹을 가만히 움켜쥐었다.

이런 내밀한 속내를 이야기하는 이는 자카리 외로는 황녀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엘리는 황녀와의 수 많은 기억들을 떠올렸다.

결혼 동맹의 쓸모를 이야기하며 서글프게 웃던 황녀.

공작의 죽음을 미리 언질해 주던 황녀. 그 호의를 기억한다.

“소중한 친구로 생각하니까요.”

진심이었다. 친구라는 그 단어가 이상하게 낯간지럽게 느껴진다.

황녀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저도 공작 부인을 가장 소중 한 친구로 생각해요.”

그 이후, 황녀는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손을 뻗은 황녀가 이엘리의 손등을 가만히 움켜쥐었다.

“그 말씀 믿어요. 정말로 기뻐요.”

그렇게 말하는 황녀의 얼굴에는 진심만이 가득했다.

황녀는 다정한 어조로 그녀에게 답했다.

“제게 그렇게 말해 주셔서 고마워 요.”

“혹시 저희가 불편해질까 봐, 그것을 걱정하시고 계신 거라면 괜찮아 요.”

진심이었다. 이미 자카리와도 이 문제는 모두 대화를 끝내 놓았다.

“아니예요, 저를 소중하게 생각해

주셨으니 부담을 무릅쓰고 제게 그런 제안을 해 주셨다는 거…… 알아 요.”

그렇게 말한 황녀가 곧게 고개를 들었다.

선명한 회색 눈동자는 상냥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괜찮아요. 전 이만 돌아갈 생각이예요.”

“전하, 하지만!”

“왜냐하면 저는 어쨌든 황위 계승 권을 가진 제국의 단 하나뿐인 황녀 이니까요.”

반사적으로 언성을 높이던 이엘리는 그 말을 들으면서 입술을 다물고 말았다. 황녀가 웃었다.

“그러니까 전, 제도를 지키는 게 옳다고 여겨요.”

그런 황녀를 보면서, 이엘리는 황제와 황녀가 근본적으로 다른 인간임을 느꼈다.

자신의 의무조차 제대로 행하지 않으면서 권리만을 휘두르려고 하는 황제.

그에 반해 단 한 조각의 권리조차 허용되지 않았으면서도 제 의무를 짊어지려 하는 황녀.

이엘리는 씁쓸한 기분을 느꼈다.

“특히 오라버니께서 저렇게 비이성 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을 때는…… 더더욱 말이예요.”

황녀는 제가 짊어진 책임감에 괴로워 하면서도 도망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책임감을 똑바로 마주한다.

만약 이엘리 자신이라면 저럴 수 있을까. 이엘리는 가만히 황녀를 눈 안에 담았다.

“게다가 황후께서도 제도에 홀로 계신 지 오래잖아요? 아마 꽤나 힘드시겠죠.”

황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눈매를 접었다.

가벼운 분위기였던 황녀는 이내 진 지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제가 공작가에 오래 머무르고 있을수록 상황은 더욱 나빠질 거예요.”

황녀가 가볍게 고개를 기울이며 말을 이었다.

황녀는 영민한 아가씨였고, 공작가와 황가 사이의 적대적인 관계를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

황제가 공작가에게 가진 적대감과 공작 부인에게 느끼는 집착은 상상 이상이었다.

가장 질이 나쁜 건 그 적대감엔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제 오라버니께서는 공작가에게 압박을 가하려 하실 테니까요.”

“그건……!”

“공작 부인이 절 소중한 친구로 말씀해 주셨듯이, 저에게도 공작 부인은 그런 사람이예요.”

황녀는 설핏 웃어 보였다.

손을 들어 그녀의 손등을 장난스럽게 두드리며 황녀는 말을 이었다.

“그런 소중한 친구에게 부담을 짊어지게하고 싶진 않아요.”

한 점 거짓 없는 진심이었다.

지금까지 이엘리에게 차고 넘치는 호의를 얻었다.

그 호의에 기대는 것도 좋지만, 그것도 일정 선이 있었다.

공작가에게 부담이 되는 일은하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황제 폐하께서 저렇게 행동하는 것도 두고 보기 어렵고요.”

“하지만 위험할지도 몰라요, 황녀 전하.”

이엘리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황녀는 부드럽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비록 제가 폐하의 눈엣가시인 건 맞지만, 이미 절 죽이려 했던 시도 가 한 번 실패했잖아요.”

이번에 황녀를 암살하려 했던 암살 시도를 이야기하는 것일 터였다.

이엘리는 눈을 깜빡였다.

“이곳은 헤센바이츠 공작령 내니까 공작가에게 덮어씌울 수 있지만, 제도는 달라요.”

황녀의 어조는 확고했다.

황녀는 잠시 생각에 골몰하는가 싶더니 또렷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제도에서 제가 이유 없는 죽음을 맞이한다면 분명 사람들도 황제 폐하를 의심할 테니까요.”

그 말은 곧, 귀족들도 황제가 제 여동생인 황녀를 마땅찮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자신의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상 정하는 모습이 좀 안타깝다. 황녀는 곧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론도 후작도 있으니까요.”

“……론도 후작만을 믿고 계셔도 괜찮겠어요?”

“아마 괜찮을 거예요. 론도 후작은 중앙 정계에서 꽤나 영향력이 있으면서도, 폐하께 호의적이지 않은 귀족이니까요.”

이엘리는 문득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론도 후작은, 제도에서 영향력을 가진 귀족이면서도 공작 부부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에도 주저하지 않았다.

황녀는 긴 한숨을 쉬었다.

“뭐, 소중한 딸을 페하께 강제로 빼앗겨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당연하지 만요.”

그렇게 말하는 황녀의 얼굴에 서글픔이 스쳤다.

이엘리는 숨을 삼켰다.

황녀가 이야기하고 있는 그 사람은 아마 황후일 것이다.

황제의 곁에서 천천히 말라비틀어 지고 있는 고귀한 여인.

“폐하께서는 론도 후작을 위시한 중앙 정계를 견제하고 계시니까.”

황녀는 잠시 눈동자를 굴렸다.

안네로제는 힘없는 황녀로서 숨을 죽이고 살아가야 하지만, 그게 정계 에 관심을 끊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정계 흐름에 신경을 곤두세 워야 한다.

“아마 당분간은 저도 안전할 거예요.”

이유는 간단하다. 힘없는 황녀는 언제든 정계의 흐름에 휩쓸려 이용 당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제가 공작가에 계속 머무르는 것 자체가 폐하께서 절 공격할 수 있는 요소가 돼요.”

“그 말씀은……”

“아마 공작 부인께서도 쉬이 추측 하실 수 있을 거예요.”

황녀가 차분한 얼굴로 이엘리를 마주 보았다.

황녀의 나긋한 목소리가 이엘리의 귀에 닿았다.

“제가 공작가와 합작하여 불온한 뜻을 가지고 있다거나, 그런 식으로요.”

그 말에 이엘리는 얕게 숨을 삼켰다.

황녀는 온기 한 점 남아 있지 않은 눈동자로 설명했다.

“제 뜻을 곡해할 수 있다는 거죠.”

곡해라. 이엘리는 단박에 황녀의 말이 내포하는 뜻을 이해했다.

공작가와 합작하여 황위를 쟁취하려 한다, 그런 의심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엘리가 내심 걱정하고 있던 문제와 같은 생각이었다.

더 나아간다면 황제의 필요에의 해, 황녀를 어떻게든 잘라 내기 위해 그렇게 몰아갈 수도 있다는 말.

황녀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뭐, 페하께서는 이성적인 분은 아니시니까 말이예요. 그러니……”

지금의 황녀는 냉철한 전략가였다.

각 상황에 대한 위험도를 계산하고 합리적인 답을 내린다.

“언제든지 공격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느니, 이쯤에서 제도로 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한 황녀의 표정이 약간 풀어졌다.

황녀는 이엘리를 향해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지금껏 제게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단둘뿐이었지만.”

“……”

“그래도 두 사람이 있어 주어서, 여기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아 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