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이엘리 또한 그의 품에 매달렸다. 다시는 널 혼자 외롭게 흘로 두지 않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엘리는 그에게 고개를 기댔다.
“난 아마도 너와 처음 만났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널 사랑했던 것 같아.”
이엘리는 달콤한 목소리로 조그맣게 소곤거렸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는 공평하게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는 거지.”
“……이엔.”
“우리는 영원히 함께야. 서로가 마지막 사람이 되는 거라고.”
이엘리는 힘을 주어 그렇게 말했다.
그 목소리를 듣던 자카리는 지극히 행복한 얼굴을 했다.
“그러니까 제발 떠나겠다느니, 내 게 미안하다느니 그런 소리 좀 하지 마.”
“그건……”
“사랑하는 사람이 매번 땅을 파고 있는 모습을 보는 거, 기분 좋은 일 아니다?”
이엘리는 입지 않게 투덜거렸다.
자카리는 살며시 웃었다.
그때 그녀가 살포시 미간을 좁혔다.
“어라, 너 우는 거야?”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어휴, 내 남편. 눈물도 많지.”
자카리의 눈가를 손으로 슥슥 닦아 주며 이엘리가 미소 지었다.
결국 그는 울며 웃어 버렸다.
두 사람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동안, 이엘리는 내내 자카리의 품에 안겨 있었다.
자카리는 한시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양, 제 아내의 뺨에 키스하고 나지막이 웃었다.
“이건 뭐야?”
그러던 중 자카리가 이엘리의 손등에 남은, 아샤꽃을 닮은 문양을 발 견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이엘리는 미간을 좁히며 생각했다.
‘그거, 역시 꿈은 아니었나 보네.’
그렇다면 아샤꽃잎이 수없이 휘날리던 그 세계는 물론이고, 자카리를 ‘현재의 나’라고 칭하던 은발의 푸른 눈을 가진 그 남자도 실제로 존
재한다는 소리지. 그녀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놀라지 마. 아까 내가 너의 그 기억을 봤을 때……”
이엘리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녀가 자카리의 기억을 보게 된 경위와, 그녀가 만났던 은발청안의 남자를.
또한 그 남자가 자신과 자카리가 무슨 관계인지 설명해 준 것까지도.
이엘리의 말을 귀 기울여 듣던 자카리는 대번 인상을 구겼다. 자카리는 불만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아니, 그래서 내 조상인지 뭔지 하는 그 작자가 너에게 이런 흔적을 남겼다고?”
……아니, 지금 그걸로 화낼 게 아니지 않아? 화내는 포인트가 잘못됐 다는 생각, 안 하는 거야?
“나도 못한 걸 그 작자가 먼저했다 이거야?”
“아니, 자카리.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게다가 멋대로 남의 기억을 보여줘? 이거 완전 날강도 아냐?”
이엘리는 그냥 얌전히 입을 다물기로했다.
자카리는 굉장히 화가 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사람을 멋대로 움직이는 것도 정도가 있지.”
“어, 그게.”
“그 작자가 물려준 힘 때문에 내가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그건 이엘리도 동감이었다. 그때 그가 입술을 당겨 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응?”
“하나 고마운 건 있네.”
자카리는 말을 툭 내뱉었다. 화가 난 기세가 조금 수그러든 것 같아,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뭔데?”
“그 용인지 뭔지가 아니었다면, 네가 이렇게 무사히 잠에서 깨는 것도 어려웠을 거 아냐.”
맞는 말이었다. 이엘리도 잘 모르긴 하지만, 그녀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던 이유도 그 용이 말하던 ‘각성’인가 하는 문제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젠장.”
이엘리는 도끼눈을 했다.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던 그가 화들짝 놀라 이엘리에게 사과했다.
“미, 미안해. 네 앞에서 욕을 하려 던 건 아닌데……”
“알아. 평소에는 욕 잘 안 하니까.”
뭐, 기사들에게 듣기로는 이엘리의 유무에 따라, 자카리는 거의 이중인 격 수준으로 언행이 바뀐다고는했다.
“아무튼, 내가 그 용을 만나고 네 기억을 보게 된 것 자체가……”
지금 상황을 설명할 적절한 말을 고르느라 이엘리는 살며시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가 말했다.
“너와 내가 연결되어있기 때문이래. 그, 뭐라고 해야 하지?”
“어떤 거?”
“그…… 그 용이 나에게 아샤 요정이라고 했으니까. 그리고 너도……”
그렇게 말하던 그녀는 저도 모르게 뺨을 붉히고 말았다.
아니, 건국 전설에서나 듣던 아샤 요정이 나라니.
정말 손발이 오그라든다. 난 그런 건 아이들의 동화에나 나올 줄 알았 단 말이야.
“그러고 보니, 아샤 요정이라.”
그녀의 말을 듣던 자카리가 문득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고 보니 궁금 했던 점이 하나 있었다.
“그러고 보면 그 아샤꽃들은 네가 피운 거야?”
“아샤꽃들?”
“너 구하러 갔을 때, 네 위치를 알려 주었던 그 아샤꽃들 말이야.”
“아, 응. 아마 그런 것 같아.”
이엘리는 머쓱한 낯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자카리는 입 안으로 끙 하는 앓는 소리를 냈다.
“젠장, 전설 속 이야기를 이런 방 식으로 현실에서 봐야 한다니.”
“어……”
“……그래도.”
자카리는 이엘리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다정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전을 간지럽 힌다.
“네가 무사히 돌아와서 정말 다행 이야.”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엘리는 활짝 웃었다.
그 웃는 얼굴을 보며 자카리는 생각했다. 어떻게든 그녀를 지키겠다고.
* * *
자카리는 오랜만에 초상화 방에 들렀다.
그가 부모님의 초상화 앞으로 저벅 저벅 다가가 입을 연다.
“아버지.”
방 안은 고요했다.
우리가 겪었던 모든 일은 과거의 일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초상화 속 아버지와 어머니의 표정 또한 그저 평온했다.
그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그가 속삭였다.
“이엔이…… 저와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에 관한 그 일을 알았어요.”
어머니의 죽음에 관련한 진실.
이엘리가 모든 것을 보았다고 고백 했을 때, 시야가 깜깜해지던 그 감각은 아직도 선연했다.
이엘리가 당장이라도 자신을 떠난 다 말하면 어떡하나, 그런 두려움에 목이 죄이는 것 같던 그 느낌.
하지만 이엘리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끌어안았다.
“그런데도 이엔은 저를 떠나지 않겠다고 했어요.”
그 사실이 숨 막히게 감격스러웠다.
제 모든 걸 알면서도 온전히 받아 들여 주는 단 한 사람.
“저를 사랑한다고 말해 줬습니다.”
그렇게 속삭이는 자카리의 목울대가 커다랗게 움직였다.
목이 멘 그는 작게 헛기침을 했다.
“살면서…… 제가 죽어서는 안 될 이유가 생길 거라고는 생각한 적도 없었는데.”
자카리가 지금껏 살아오던 세상은 언제나 차가웠다.
눈과 얼음, 서리로 쌓아 올린 싸늘한 세상.
온 세상은 절망에 차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온기를 나눠 주는 그녀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영원한 겨 울이었던 자카리의 세계에도 봄이 찾아들었다.
따스한 햇살, 활짝 핀 봄꽃.
“제가 죽으면 슬퍼해 줄 사람이 생긴다는 건, 이런 기분이군요.”
가장 내밀한 비밀까지 공유하고도 그를 사랑한다고 말해 주는 사람. 그를 떠나지 않을 사람.
“그러니까 전 이제부터 전력을 다해 살아남을 생각입니다.”
이엘리를 울리고 싶지 않았다.
자카리가 행동하는 모든 이유는 오로지 이엘리가 있어서 였다.
“그 애가 슬퍼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으니까요.”
이엘리는 언제나 환하게 웃는 얼굴 만하고 있었으면 좋겠다.
모든 힘겨운 일은 그 자신이 떠맡아도 좋았다.
따스한 봄 아래, 활짝 피어난 아샤꽃나무 하나.
자카리는 조그맣게 속삭였다.
“그거 아십니까, 아버지?”
초상화 속 아버지가 기웃이 자카리를 내려다보았다.
자카리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저는 처음으로…… 누군가와 행복 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한 자카리가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 끝에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 어린 자신을 그렸던 그림 이 놓여 있었다.
그 위에 덮어 둔 천을 거둘 용기는 아직 나지 않았다.
“……이엔은 제가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키겠습니다.”
아버지가 이엘리를 딸처럼 귀애했다는 사실은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
삭막했던 공작성에 웃음과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던, 아샤꽃을 닮은 사랑스러운 아가씨.
자카리는 진지하게 말했다.
“이 맹세를 하러 이 방에 들른 거 예요.”
착각일까, 초상화 속의 아버지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것도 같았다. 그가 환하게 웃었다.
“……그럼, 편히 쉬시기를.”
짧은 인사를 남긴 자카리가 초상화 방을 빠져나갔다.
방 안쪽으로 맑은 햇살이 비쳐 든다.
초상화 속의 전대 공작 부부는 부드립게 웃고 있었다.
아들의 결심을 응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오랜 시간 잠들어 있었다고는 믿어 지지 않을 만큼 이엘리의 몸은 가뿐했지만, 자카리는 불면 날아갈까 쥐 면 터질까 그녀를 애지중지 대했다.
“저기, 그 정도로 내 몸이 아픈 건 아닌데.”
“알아. 그래도 내가하고 싶어서 하는 거니까.”
자카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녀는 얌전히 침대에 누운 채 머쓱한 낯을 했다.
“나 건강한데……”
“이왕 쉬는 김에 푹 쉬라는 소리 지.”
뭔가 말이 좀 이상하지 않나? 이엘리는 눈동자를 굴렸으나 그녀의 남편은 완강했다.
그리하여 이엘리는 아주 오랜만에 긴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자카리는 그녀가 손가락 하나 까닥 하는 것조차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일조차 미루고 이엘리의 곁에 붙어 앉아 있었다.
‘뭐, 내 말은 쉴 필요가 없다는 뜻 이지만.’
그래도 자카리가 그녀를 소중하게 여기는 건 역시 기분이 좋았다.
이엘리는 마음 편히 현재의 휴식을 누리기로 결심했다.
그렇다하여 그저 놀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가장 먼저 만 나 봐야 할 사람이 한 명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녀 전하.”
이엘리는 침대에서 황녀를 맞이했다.
사실 그녀의 현 상태는 아주 건강 했기에, 굳이 안네로제를 침대에서 맞이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황녀와 자카리 두 사람이 완강히 저지했다.
“괜찮아요, 누워 계셔도.”
“맞아. 황녀 전하께서 괜찮다고 하 시는데 왜 굳이 일어나려고 그래?”
황녀의 말에 자카리는 기다렸다는 것처럼 동조했다.
아니, 나 안 아프다니까?
이엘리는 한숨을 삼켰지만, 왠지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건 두 사람의 기대를 동시에 배반하는 느낌이 들어 그대로 있기로했다.
“이엔.”
그녀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던 자카리가 씩 웃어 보였다.
“그럼 난 나가 볼 테니까, 전하와 함께 대화를 나누도록 해.”
“응, 고마워.”
이엘리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녀는 고맙다는 뜻으로 까닥 목례를 했다.
자카리는 밖으로 빠져나갔다.
달칵 문이 닫히자 이엘리와 황녀, 두 사람만이 남았다.
황녀가 입술을 열었다.
“미안해요.”
대뜸 사과부터 하는 황녀였다.
잠시 후 황녀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딘가 지친 미소였다.
“……공작 부인에게는 매번 미안하 다는 사과밖에 할 수 있는 말이 없네요.”
“황녀 전하. 저는 괜찮아요. 그러니……”
“그래도 제가 공작 부인에게 사죄 해야 한다는 건 변하지 않아요.”
황녀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황녀는 지금 깊은 자괴감에 빠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