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눈을 뜬 이엘리가 그대로 짧게 비틀거리자, 곁에 다가온 은발 청안의 남자가 그녀를 부축해 주었다.
그녀는 숨을 들이마셨다. 지금까지 바라본 기억들이 너무 선명해서 고통스러웠다.
“……거짓말.”
그녀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입술을 잘근잘근 짓씹던 그녀가 퍼뜩 고개를 들면서 애원했다.
“거짓말이죠? 거짓말이라고 해 줘요.”
“거짓이 아니라는 건, 너 자신이 더욱더 잘 알 텐데.”
“……”
이엘리는 헛숨을 삼켰다. 깨진 유 리 조각을 집어삼킨 것처럼 가슴속 이 아팠다.
자카리. 넌 지금까지 어떤 기분으로 내게 웃어 주었던 거니. 난, 바 보같이……
“……네가 이렇게 고통스러운지도 모르고……”
이엘리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뜨거운 눈물이 고여 시야가 흐릿해 진다.
그녀는 손을 들어 얼굴을 거칠게 닦아 냈다.
그는 이런 기억을 품은 채로 그녀에게 내내 웃어 주었다. 얼마나 아팠을까.
“나, 난. 그런 줄도 모르고.”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자가 그녀의 뺨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길고 우아한 손가락이 그녀의 눈물을 닦아 냈다.
따스한 체온이 눈가에 닿자, 그녀는 울음이 복받쳐 오르는 걸 느꼈다.
“자카리에게 나와 전대 공작 부인과는 다르다며 화만 냈어요.”
“……그건 네 탓이 아니야.”
“자카리가 나에게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 애가 무슨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고……”
그녀의 목소리 끝이 눈물에 가득 젖어 흐트러졌다.
자카리가 예민하게 굴었던 것은 당연했다.
“자카리는 어떻게 웃을 수 있는 거 죠? 나, 나라면……”
이엘리라면 그가 언제나 짓곤 하는 다정한 미소는 지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자카리가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녀를 계속 밀쳐 냈을 때.
매번 매달리며 그에게 날카로운 말만 쏘아 냈다.
모두 자카리의 탓이라며 매도했다. 하지만 내가 저런 과거가 있었다면,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나 라면, 저렇게 태연할 수 없었을 텐데.”
그녀는 흐느껴 울었다. 목 안쪽 깊은 곳에 뜨겁고 딱딱한 무언가가 걸린 느낌이었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 주던 남자는 이윽고 그녀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그녀는 그 품에 고개를 폭 기댔다.
자카리. 나의 자카리. 아무것도 몰랐던 게 너무 미안해. 너무, 너무 미안해…….
한참 흐느낀 후에야 그녀는 울음을 멈췄다.
그리고 달아오른 눈가로 남자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진다.
“……그러니까 당신은 겨울의 은룡이고, 자카리의 전생이자 조상님이다 이거죠?”
“굳이 따지자면 그런 셈이지.”
고개를 끄덕인 남자가 손을 내밀어 이엘리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살짝 눈가를 찡그렸다.
“아까 전에도 말했지만 아직 너의 각성은 완전하지 않아.”
“맞아요, 그런 말씀을 하셨죠.”
“네가 이 세계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한정 되어있으니, 빠르게 말할게.”
남자의 말씨가 조금 빨라졌다.
내가 우느라 너무 시간을 낭비한 건 아닐까. 이엘리는 조금 머쓱해졌다.
남자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다정 하게 웃었다.
그가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말을 잇는다.
“우선 네게 주술을 하나 남길 거야.”
“주술이요?”
“그래. 이 주술이 네가 힘을 각성 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군.”
그렇게 말한 남자가 이엘리의 손등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뭐지, 이건? 이엘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남자는 그대로 이엘리의 손등에 짧게 키스했다.
기겁한 이엘리가 목소리를 높였다.
“어, 뭐, 뭐야. 제 남편은 자카리……!”
“그렇게 따지자면 난 네 남편의 과거이지 않나.”
“그렇다고 해서 멋대로 키스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거든요!?”
이엘리가 발끈했다. 남자는 눈매를 접으며 웃었다.
미소가 담긴 눈동자는 그녀를 너무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시선이어서, 이엘리는 화를 내려던 것조차 잊은 채 입술을 당겨 물고 말았다.
“손등을 한번 살펴보도록 해.”
“손등이요? 왜……”
그렇게 되물으며 손등을 내려다보던 그녀는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꽃물이 든 것처럼 그녀의 손등 위 로 분홍색 꽃잎 무늬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섯 잎 꽃잎이 활짝 핀 그 모양 새였다.
“……이, 이건 뭐예요?”
“이 세계로 올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놨어.”
이엘리는 멍하니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세계라고? 여기, 그냥 내 상상이나 뭐 그런 게 아니었단 말이야?
분홍색 꽃잎이 팔랑거리는 주변을 둘러보던 이엘리는 기겁하고 말았다.
“잠깐만요, 이 장소가 실제로 있는 곳이란 말이예요?”
“그럼 거짓인 줄 알았나?”
남자는 희미하게 웃었다.
이엘리는 손등의 문양을 손가락으로 문질러 보았다. 지워질 리 없었다.
“이곳은 이 세계에 속해 있으면서 속해 있지 않은 공간이야.”
남자는 여상하게 말했다.
그녀가 눈을 깜빡였다. 이 세계에 속해 있으면서 속해 있지 않다니?
“마법으로 만들어졌지. 한때 우리가 영원히 행복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장소이기도 하고.”
이엘리는 자신이 등을 기댄 나무를 흘끗 올려다보았다.
성인 남성 여럿이 모여 끌어안아도 다 안을 수 없을 것 같은 거대한 나무의 둥치.
분홍색 꽃잎을 마치 화관처럼 머리에 인 나무는, 멀리서 보면 분홍색 꽃다발처럼 보였다.
남자는 나뭇등걸을 어루만졌다. 그 눈빛이 다정하다.
“이 나무가 아샤의 본체야.”
“아샤의 본체라고요?”
“그래. 나의 아샤…… 아, 그러니까 아샤 요정의 본체.”
그녀는 힐끔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마치 여신을 우러르는 신자처럼 나무를 올려다본다.
“아샤는 이 나무의 요정이지. 세계와 세계,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봄을 관장하는 여신.”
저 남자가 알쏭달쏭한 소리를 하는 건 이제 익숙해졌다.
“어쨌거나 이제 길은 열어 두었으니까.”
“그런가요?”
“그래. 네가 이곳에 돌아오고 싶으면……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어.”
그렇게 말한 남자는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살짝 튕겼다.
그녀를 바라보며 곱게 접히는 눈매는, 역시 자카리와 꼭 닮았다.
청명한 가을 하늘처럼 빛나는 눈동자가 그녀를 제 안에 담는다.
“지금 이 장소는 오직 너와 나를 위해 만들어진 곳이니까.”
애정이 담뿍 담긴 목소리로 말한 남자가 코끝을 찡그리며 웃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다.
“그럼 ‘현재의 나’를 잘 부탁한다, 나의 아샤.”
“거참, 전 아샤가 아니라니까요? 그리고 제 남편은 제가 잘 챙겨요!”
이엘리는 미간을 좁히며 밉지 않게 남자를 흘겨보았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그래, 난 그저 너희가 행복하기만을 바라.”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화사한 분 홍색 꽃잎이 마치 폭풍처럼 휘몰아 쳤다.
저기……!
그렇게 외치려던 이엘리는 반사적으로 눈을 꽉 내리감았다.
잠시 후, 그녀가 눈꺼풀을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아.”
이엘리는 멍하니 두 눈을 깜빡였다.
익숙한 천장이 눈앞에 있었다. 헤센바이츠 공작성이었다.
이엘리는 자리에 누운 채,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새파란 눈이 그녀를 똑바로 응시한다.
그 시선을 가만히 맞받던 그녀가 입술을 달싹였다.
“자카리?”
“……깨어났구나.”
자카리는 희미하게 미소를 짓는가 싶더니, 이윽고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오랫동안 비바람에 묻혀 있던 조각이 생명력을 얻어 움직이는 것 같은 그 모습.
그가 나직하게 질문했다.
“왜 울었어?”
“나?”
이엘리는 그제야 제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구나, 나 울었구나. 아마 자카리의 기억을 들여다보며 홀렸던 눈 물이 남아 있는 것일 터였다. 그녀는 숨을 들이마셨다.
‘자카리의 기억.’
그 처참한 기억을 떠올리면 심장이 꽉 조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모든 이에게 외면당하고도 숨을 죽였던 작은 소년.
겨울의 세계에 버려졌던 소년. 이엘리는 충동적으로 손을 뻗었다.
“있잖아, 자카리.”
그녀의 손끝이 자카리의 뺨을 쓸어 내렸다.
의아한 눈동자를 한 자카리에게 그녀가 속삭였다.
“……많이 힘들었지.”
“……”
그 말에 자카리는 그대로 얼어붙는 다.
이엘리는 짙은 죄책감을 느꼈으나, 그렇다 해서 그의 기억을 보았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
“봤어?”
잠시 후, 자카리는 토막토막 끊어 지는 목소리로 이엘리에게 물었다.
그 목소리는 그녀가 무엇을 보았는 지 이미 알고 있는 자의 목소리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봤구나.”
자카리의 표정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지금의 자카리는 바닷가 해변에 모래로 쌓은 성처럼 보였다.
금방이라도 파도에 휩쓸려 바스러질 것 같은.
이엘리는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잡았다.
“저기, 자카리.”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은 모두 불행해져.”
힘겹게 눈을 뜬 자카리가 건조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새파란 눈동자는 무척 괴로워 보였다.
“그러니까, 내가 널 욕심 냈던 것 자체가 잘못 이었던건지도 모르겠어.”
“왜 그런 말을 해?”
“지금까지 넌 내 곁에 있으면서 나쁜 일만 겪었잖아.”
그렇게 말한 자카리가 불안한 얼굴로이엘리를 응시했다.
“게다가…… 봤다면서.”
“……자카리.”
“내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나와 얽혀 그렇게 망가지셨어.”
자카리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도무지 그녀의 시선을 마주 볼 용 기가 나지 않았다.
“계속 두려웠어.”
자카리는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떨릴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목소리는 차분하게 나온다.
“네가 내 부모님처럼 망가질까 봐……”
“그런 거 아니라고 했잖아.”
이엘리는 억눌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가 어째서 저렇게 생각하는지 이젠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과거를 보았는데, 그가 가진 상실의 공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게 이상하다.
“그래서, 너를 떠나보냈을 때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 했는데.”
마치 여신에게 제 죄를 고백하는 신자처럼 자카리의 목소리는 참담했다.
그가 어깨를 떨며 말했다.
“네가 내게 돌아와 ‘곁에 있자’고 말해 줘서…… 정말 기뻤어.”
이엘리는 그 자리에 딱딱하게 굳은 채 자카리를 마주 보았다.
자카리는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다시는 너를 포기할 수 없다 고생각할 만큼.”
그 순간 이엘리는 와락 자카리를 끌어안았다.
평소라면 그녀를 마주 안아 왔을 자카리는, 쉬이 그녀에게 손을 대지 못했다.
그녀를 건드리는 것 자체가 죄스럽 다는 것처럼 굳어있을 뿐.
“자카리, 날 욕심내도 좋아.”
그의 품에 어린아이처럼 뺨을 비비 면서 그녀는 그에게 소곤거렸다.
신음 같은 대답이 들렸다.
“이엔.”
“왜냐하면 나도 너를 욕심내고 있으니까.”
그 말에 자카리가 어깨를 굳히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뺨에 짧게 키스하며 그녀는 속삭였다.
“내가 너를 좋아하니까, 이렇게……”
대답 대신 자카리는 얕은 숨을 뱉었다.
그녀가 살포시 눈매를 접으며 확고 하게 못을 박는다.
“……사랑하고 있으니까.”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는 연녹색 눈동자.
자카리는 그 눈동자를 눈이 부신 것처럼 내려다본다.
“그러니까 안아 줘.”
그녀가 조그맣게 속삭이는 순간, 단단한 두 팔이 이엘리를 와락 끌어 안았다.
영영 놓지 않겠다는 것처럼 절박하게 끌어안고 체온을 나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