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4화 (144/196)

144화

자카리는 멍하니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남자는 사나운 조소로 자카리를 내려다보았다.

자카리는 아직 어린 소년이다. 지금 제게 주어진 이 상황 자체를 납득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어렸다.

“당신까지 그럴 필요 없어요, 필 립.”

보다 못한 아델라이데가 그의 옷깃을 살짝 움켜쥔다.

그러고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남자를 끌어당겼다.

“그냥 빨리 떠나요. 아무도 없는 곳으로……”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곤,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나려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못 가요.”

“뭐?”

아델라이데가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자카리는 느릿하게 시선을 들어 올렸다.

새파란 눈동자가 기이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온 세계가 쩡, 소리와 함께 얼어 붙었다.

화사하게 피어있던 꽃들 또한 자카리가 발을 내딛자 서리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주변의 공기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피부를 찌르는 살기에 아델라이데의 낯이 차게 굳었다.

“너, 이렇게 또 괴물 같은 짓을!”

“어머니, 제발 가지 마세요.”

자카리는 눈물이 말라붙은 얼굴로 아델라이데를 빤히 응시했다.

그때 남자가 욕설을 뱉었다.

“젠장!”

“피, 필립?!”

깜짝 놀란 아델라이데가 제 연인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연인이라 믿고 있던 남자의 얼굴은 흉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의 손목을 잡았던 손을 놓아 버리며 남자가 뒤로 물러났다.

“아아, 아무리 보상이 훌륭하다고 해도... 이건 너무 위험하잖아.”

“……그게 무슨 말이예요?”

순간 아델라이데의 낯이 창백해졌다.

아차, 말실수했다. 남자의 얼굴 위로 그런 당혹감이 스쳐 지났다.

아델라이데가 남자에게 바짝 다가 서며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언성을 높여 묻는다.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고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보상이라니요, 그게 무슨……”

그렇게 외치던 아델라이데는 문득 멈칫했다.

그러고 보면 뭔가 이상했다.

그녀가 공작가와 혼인하고 자카리를 낳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필립은 단 한 번도 연락이 없었다.

그저 최근에 우연히 연락이 닿았 고, 다시 들불 같은 사랑에 빠져들었던 거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우연이었을까?’

지금껏 애써 눌러두었던 의심이 순 식간에 몸집을 불린다.

만약에 의도가 있어서 내게 접근했 던 거라면? 과거의 애정에 휩쓸려 현실을 보고 있지 못했던 거라면? 그녀는 입술을 짓씹었다.

“……당신.”

그때 자카리가 한 걸음 앞으로 내 디뎠다.

색유리처럼 투명한 시선이 남자를 똑바로 응시한다.

“가, 가까이 오지 마!”

폭주 직전에 놓인 자카리의 존재감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했다.

남자는 저도 모르게 아델라이데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어느새 그의 손엔 작은 단도가 들려 있었다. 그가 언성을 높였다.

“가까이 오면 아델을……!”

그 모습을 보던 자카리의 눈이 확 불타올랐다.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디며, 자카리가 말했다.

“어머니께.”

그 순간 봄과 어울리지 않는 싸늘한 북풍이 몰아닥쳤다.

시야를 가리며 거세게 쏟아지는 그 것들은 바로 눈이었다.

새하얀 눈보라가 온 세상을 뒤덮고, 구름 같은 입김이 퍼지기 시작했다.

“손대지 마.”

자카리의 눈동자가 반짝, 깨진 유 리처럼 날카롭게 반짝였다.

까닥, 손끝을 움직이는 그 순간.

“컥!”

남자의 입술에서 짧은 비명이 터졌다.

등 뒤에서 느닷없이 솟아난 커다란 얼음 조각이 남자의 몸을 꿰뚫었기 때문이었다.

남자의 입술 바깥으로 주르륵 핏덩 이가 흘러내렸다.

아델라이데를 움켜쥔 손에서 스르 륵 힘이 빠지는가 싶더니, 단도가 툭 떨어졌다.

그녀의 낯이 파리해졌다.

“이, 이게 무슨 짓이야!”

내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 건지. 아델라이데는 순간 지독한 공포에

빠져 버렸다.

그녀의 앞에서 있는 어린 소년이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렵고 무서운 무 언가로 보였다. 그녀가 발악했다.

“가, 가까이 다가오지 마!”

“어머니.”

“이 괴물!”

이성이 반쯤 나간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단도를 와락 움켜쥐었다.

“……가까이 가지 않을게요.”

온 세상을 겨울로 뒤덮은 주제에

자카리는 고요한 얼굴로 그렇게 말 한다.

눈물이 말라붙은 새하얀 얼굴은 제 어머니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잠시 후, 자카리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속삭였다.

“죄송해요.”

“내, 내가 무엇을, 지금 무엇을 보고……”

“정말 죄송해요, 어머니.”

그렇게 말한 자카리가 뒤돌아섰다. 차마 제 어머니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조차 두렵다는 것처럼.

어머니에게 버림받는 것을 견딜 수 없었기에 먼저 도망치는 것처럼.

아델라이데는 눈에 날을 세운 채 자카리의 뒷모습을 쏘아보았다.

머릿속이 새하얗다. 지금 내가 무엇을 본 거지.

“……필립.”

지독히도 건조한 목소리가 입술 새 로 흘러나왔다.

아델라이데는 뒤를 돌아보았다.

바닥에 나뒹구는 시체.

예전의 약혼자.

한때 열렬히 사랑했던 남자.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던 남자.

하얗게 성에가 낀 꽃송이들 사이로 남자의 피만이 유난히도 붉었다.

이미 죽어 버린 그.

‘저 괴물을 죽여야 해.’

아델라이데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건 인간으로서 느끼는 본능적인 감정이었다.

자연재해와도 같은 압도적인 존재, 인외에 선 존재.

그게 바로 그녀의 아들이었다. 그녀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직 괴물이 어릴 때, 그러니까지금…… 죽이지 않으면 안 돼.’

그녀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사랑했던 약혼자에 대해 복수하려는 심산은 아니다.

오히려 그녀가 인간이기에, 언젠가 인간을 멸할 수도 있을 끔찍한 재앙을 보며 느끼는 감정에 가깝다.

‘괴물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살아 남을 수 없어.’

아델라이데는 단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눈 폭풍 속에서 그녀는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내가 낳은 아이니까, 내가 책임져 야 해……”

세상에 이 괴물을 내보내서는 안 돼.

그 생각과 동시에 그녀는 단도를 휘둘렀다.

자카리의 몸이 그대로 무너졌다. 비명 하나조차 없었다.

온통 새하얀 세상 안쪽으로 붉은 피가 실선처럼 튕겨 오른다.

얼굴 위로 쏟아지는 뜨거운 감촉, 비릿한 냄새. 그녀는 느리게 눈을 깜빡거렸다.

“……자카리?”

잠시 후, 아델라이데의 입술 새로 쇳소리 비슷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절망에 빠진 초록색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바닥에 쓰러진 아이의 자그마한 몸.

그녀는 덜덜 떨며 무릎을 꿇었다.

“자, 자카리.”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뒤늦은 충격이 아델라이데의 몸 위로 벼락처럼 꽂혔다.

그녀는 어떻게든 자카리를 일으켜 보려했다.

힘없이 늘어지는 팔다리. 쿨럭쿨럭 쏟아져 나오는 핏덩이들.

“내가, 내가 널……”

시야가 흐릿해졌다. 점차 기세가 약해지는 눈발 때문이 아니었다.

뜨겁게 괴는 눈물 때문이었다. 손 안에 담뿍 묻는 피가 뜨거웠다.

가늘게 숨을 몰아쉬는 자카리를 보 자, 숨이 콱 막힌다.

“……아아, 자카리, 내가 너에 게……”

아델라이데는 더듬거리며 자카리를 불렀다.

그녀의 하얀 뺨 위로 주르륵 눈물이 홀러내렸다.

“내가, 너를……”

“어머니.”

그때, 기이하리만치 침착한 목소리 로 자카리가 아델라이데에게 속삭였다.

그녀가 다급한 동작으로 자카리를 끌어안았다.

가늘게 떨리는 손가락이 그녀의 눈 가를 닦았다.

그가 소곤거렸다.

“울지 마세요.”

“……자카리?”

“저만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어머니께서는, 행복하셨을…… 텐데.”

아델라이데는 누군가가 목을 조르는 것 같은 기분을 맛보았다.

자신이 아이에게 항상 퍼부었던 그 말을, 아이는 자신의 입으로 꺼내 놓고 있었다.

마치 그 매도가 절대적인 진실인 것처럼.

“죄송해요.”

“……”

“죄송해요, 어머니.”

자카리의 목소리가 토막토막 끊겼다.

출혈이 너무 심했다. 그가 온 힘을 다해 속삭였다.

“태어나서, 어머니를 괴롭게 해서…… 정말로, 죄송해요.”

마지막으로 미소를 지은 자카리가 눈을 감았다.

이엘리는 아연한 얼굴로 그 광경을 응시했다.

‘……이런 거였어.’

이엘리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당겨 물었다.

이 모든 것은 이미 지난 과거이며, 자카리의 기억일 뿐이다.

하지만 이 기억은 아직도 현재에 영향을 끼치고 있지 않나.

초상화 방에 걸린 그림이 생각났다.

새하얀 눈 폭풍 속, 피를 흘리던 자카리. 칼로 저며 내는 양 마음이 아파 왔다.

‘자카리.’

이엘리는 눈을 감았다. 지금 당장 자카리가 보고 싶었다.

그를 품 안에 가득 끌어안고, 얼마 나 고통스러웠느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기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주변 풍경이 일렁거렸다.

 아델라이데의 전 약혼자가 그녀에게 접근한 이유는 돈 때문이라고 했다.

전 약혼자는 도박 빚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익명의 누군가에게 그녀를 납치해서 데리고 오면 도박 빚을 갚아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고 했다.

그 뒤에 황가가 있으리라는 추측은 했지만 물적 증거는 없었다.

“……다 괜찮아질 거야, 아델라이데.”

테론은 부정을 저지른 그녀의 죄를 묻지 않았다.

그가 그녀에게 준 고통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당연하다고 여겼다.

대신 테론은 전 약혼자의 가문에게 일정 금액을 지불하고 소문을 무마했다.

감히 공작 부인을 희롱하려한 것 은 사실이었기에, 상대 또한 테론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나도 괜찮지 않아요.”

툭 말을 내뱉은 아델라이데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깊은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내가, 내가……”

한때 신록처럼 싱그러웠던 초록색 눈동자는 이제 까맣게 죽어있었다. 그녀가 작게 속삭였다.

“자카리를 죽이려 했어.”

“그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야.”

“그게 어째서 제 잘못이 아니에 요!?”

아델라이데는 번쩍 고개를 들어 남편을 노려보았다.

자카리가 아무리 입다 한들, 제가 배 아파 낳은 아들이었다. 아직 어린아이다.

그런 아이에게 칼을 휘두른 건 명백히 제 잘못이었다.

“자카리는 그 자리에서 폭주했어. 하마터면 당신을 죽일 뻔했지.”

하지만 테론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사나운 분노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그것만 생각하면……”

테론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아델라이데는 그런 그를 멍하니 올려다보며 질문했다.

“어째서…… 당신, 당신은 왜 내게 화내지 않아요?”

“아델라이데?”

“난 헤센바이츠의 후계자를 죽이려 했어요.”

아델라이데는 단언했다.

현재 자카리는 깊은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고집스럽게 정신을 차리지 않는 그 모습을 보며, 아델라이데는 뼈를 깎는 고통에 몸부림쳐야만 했다.

테론은 끝없는 죄책감에 빠져 눈물 만을 흘리는 그녀를 응시했다.

잠시 후, 그가 아델라이데에게 다가섰다.

“그거야……”

그녀는 젖은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새파란 시선. 아들과 꼭 닮은 눈동자가 그녀를 담고 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지.”

“테론.”

“아이는 얼마라도 가질 수 있어. 하지만 당신은 단 하나뿐이야.”

그렇게 말한 테론은 조심스럽게 아 델라이데를 끌어안았다.

아델라이데는 밭은 숨을 내뱉었다.

“……있잖아요, 테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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