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하지만 당신을 사랑해……”
진심이었다. 아델라이데는 지치고 피로한 얼굴로 테론을 흘끗 바라보 다가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델라이데는 몇 번의 사산을 거쳐 약해진 몸으로 간신히 자카리를 임신할 수 있었다.
아이를 배 속에 품고 있는 동안 그녀는 몇 번이나 혼절했고, 음식을 거부했다.
아이를 낳을 때는 정말로 죽을 뻔했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은발에 푸른 눈을 가진 미려한 외양의 사내아이였다.
“전 이제 공작 부인의 의무를 모두 다했어요.”
아델라이데는 이혼을 요구했다.
공작은 처음으로 그녀의 요구를 거절했다.
지금껏 아내의 요청을 모두 들어주던 그였지만, 그것만큼은 들어줄 수 없었다.
아델라이데는 배신감에 어깨를 떨었다.
아이만 낳으면 관계를 정리하고 떠 날 수 있으리라 여겼는데.
“어째서 절 떠나게 두지 않는 거죠?!”
“아델라이데, 난……”
“모든 의무를 끝냈잖아요!”
그녀는 언성을 높였다. 공작은 그런 그녀의 얼굴을 망연히 바라만 보았다.
아니다, 그런 게 아냐.
“제가 필요했던 이유는 결국 헤센바이츠의 후계를 갖기 위해서가 아닌가요?”
“그런 게 아니야.”
“그럼 뭔데요!”
그녀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온통 쉰 목소리로 공작은 그녀에게 답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해서.”
“하…… 뭐라고요?”
그 말을 들은 아델라이데는 키들키들 웃기 시작했다.
명백한 비웃음과 공작의 말을 전혀 믿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그 얼굴.
아델라이데의 마음은 이미 단단히 닫혀 있었다.
“사랑이라. 그렇다면 사랑은 참으로 끔찍한 감정이네요.”
아델라이데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제 남편의 새파란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소곤거린다.
“그거 아시나요, 테론?”
그녀는 이미 모든 희망을 포기한 얼굴이었다.
긴 속눈썹이 죽어 가는 나비처럼 파르르 떨렸다.
“제가 언젠가 목숨을 잃는다면.”
“……아델라이데.”
“당신이 저를 마음에 품고 있다고 말하는…… 사랑. 그래, 사랑 말이예요.”
녹음처럼 짙은 초록색 눈동자가 공작을 제 안에 담았다.
그녀는 입술 끝을 올리며 속삭였다.
“전 그 감정 때문에 지쳐서 죽게 될 거예요.”
그리고 아델라이데의 예언은 현실 이 되었다.
7년 후,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렸으니까.
두 부부에게는 불행하게도, 자카리는 겨울의 마법을 물려받은 채 태어났다.
눈과 얼음, 서리와 바람을 마음대로 다루는 아이는 검집 없는 칼날과 도 같았다.
힘을 다루는 것에 미숙한 모습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괴물처럼 보였다.
그리고 아델라이데는 제 아들을 견디지 못했다.
“내가 낳은 아이가 저런 괴물일 리가 없어!”
아델라이데는 몇 번이고 발작했다.
애정 없는 남편과의 사이에서,의 무감 때문에 목숨을 걸어가며 간신히 낳은 아이.
그런 아이가 괴물이야. 그녀의 연약한 정신은 점차 깎여 가고 있었다.
“내가 저 아이를 왜 낳았는데!”
걸음마만 간신히하고 있는 아이를 보며, 아델라이데가 느끼는 감정은 혐오와 공포뿐이었다.
“언제까지 공작가에 이렇게 얽매여 있어야 하지?!”
한편 공작도 마찬가지였다. 서서히 아이에게 애정이 식는 스스로를 느꼈다.
그의 애정은 한정되어있었고, 제 아내에게 퍼붓기에도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공작에게는 원망을 전가할 대상이 필요했다.
그리고 마침, 제 아들은 아내를 구석으로 몰고 가는 겨울의 마법을 타고난 괴물이었다.
“자카리, 물러나거라.”
“……네, 아버지.”
그를 볼 때마다 발악하는 어머니, 그리고 언제나 얼음장처럼 차가운 아버지.
그 사이에서 자카리는 포기부터 배우고 살았다.
공작가의 혈통에서 내려오는 겨울의 힘이란 그런 것이었다.
‘나는 괴물이야.’
자기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힘.
모두가 소년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힘.
스스로를 저주하고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겨울의 힘.
차라리 저주에 가까운 그 힘에, 자카리는 체념했다.
‘난 도대체 왜 태어난 걸까. 차라 리 태어나지 않는 게 나았을 텐데.’
그래도 공작은 아들을 최소한의 공작가의 후계자로 대했다.
자카리가 제 아내의 피를 타고났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제 아내를 닮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형식적으로나마 유지되던 부자 관계도 어느 때, 완전히 끝장 나고 말았다.
그 계기는 바로 아델라이데의 죽음이었다.
그 사건이 일어난 날은 평화로운 오후였다.
공작성을 혐오하는 아델라이데는 공작성 바깥으로 나들이를 자주 나가곤했다.
평소에는 혼자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했지만, 오늘은 드물게 자카리도 함께였다.
아델라이데는 어떻게든 자카리를 떼 놓으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무척 마땅찮은 얼굴이었다.
“……도대체 넌 왜 따라온다고 해서는.”
“얌전히 있을게요, 어머니.”
자카리는 조심스럽게 어머니의 눈치를 살폈다.
아델라이데는 불편한 낯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산책은 나 혼자 할 테니 귀찮게 굴지 마.”
자카리는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더 이상 제 아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창밖, 마차 너머를 바라보는 신록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반짝인다.
이엘리는 그 모습을 가만히 보았다.
‘뭐가 저렇게 기쁘신 거지?’
이엘리가 곁에서 아델라이데를 바라본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상냥한 성격이 긴 했지만, 아들과 남편에 한해서는 무척 신경질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오늘은….
‘……마치 무언가를 기대라도하고 계신 것처럼.’
그날, 아델라이데는 드물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조그맣게 콧노래를 부르는 어머니를 자카리는 힐끔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어머니. 언제나 웃고 계 시면 좋을 텐데. 자카리가 입을 열었다.
“어머니, 오늘 무척 기분이 좋아 보이세요.”
“맞아. 드디어 해방될 수 있을 테니까.”
“해방이요?”
어머니와의 대화가 이렇게 길어진 적은 없었다.
어머니의 변덕스러운 마음이 식을 까 두려워하면서도 자카리는 속으로 기뻐했다.
그런 자카리를 빤히 바라보던 그녀는 곧장 시선을 돌렸다.
“더 말 걸지 말렴, 시끄러우니까.”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던 자카리는 어머니의 냉랭한 반응에 금방 입을 다물었다.
그럼에도 어머니와 함께 있는 것 자체가 굉장히 기쁜지, 아직 앳된 얼굴 위로 환한 미소가 서려 있었다.
‘자카리.’
이엘리는 그 모습을 뒤에서 가만히 바라보았다.
자신은 애정 따위 받을 수 없다고 포기했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어머니의 애정을 갈구하는 그 모습이 안 타까웠다. 그녀가 입술을 물었다.
“넌 여기에 있어, 혼자 산책하고 올 거니까.”
이름 모를 들꽃이 가득 피어 한들 거리는 들판에서, 공작 부인은 매몰 차게 아들을 떼어 놓고 걸어갔다.
차라리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은 것 같은, 선을 그어 두는 그 뒷모습.
산들산들 걷는 가녀린 뒷모습 뒤로 다갈색 머리카락이 흐트러진다.
그 모습을 보던 자카리가 입술을 물었다.
‘어머니께서 길을 잃기라도 하시면……’
알고 있다. 어머니께서는 이미 성인이시고, 고작 산책 정도로 길을 잃지 않으실 거라는 건.
하지만 묘한 불안감이 자카리의 온 몸을 잠식했다.
보기 싫은 괴물인 자신은 그렇다 치고, 어째서 하녀들까지 모두 떼어 두고 가시는 거지?
어느새 자카리는 어머니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어머니?”
그리하여 자카리가 보게 된 건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광경이었다.
저 멀리서 한 대의 마차가 달려왔 고, 그 안에서 한 남자가 내렸다. 그 남자와 아델라이데는 서로를 있는 힘껏 포옹했다.
“나의 아델.”
“필립……”
아델라이데는 남자의 품에서 얕게 흐느꼈다.
남자는 소중하다는 듯 그녀를 끌어 안았다.
꽃잎이 한들한들 흔들리는 가운데, 두 사람은 완벽한 연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것을 본 자카리는 얼어붙었다.
‘거짓말.’
자카리 곁에서 있던 이엘리 또한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다면 전대 공작 부인께서는 결 국 예전 약혼자에게로 돌아가시기로 결심한 건가?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자카리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이엘리가 숨을 삼켰다.
자카리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희게 질려 있었다.
“……어, 어머니.”
자카리는 약간 말을 더듬었다. 처음이다.
어머니가 저렇게 즐겁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는 건.
“자카리?”
아델라이데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녀와 포옹하고 있던 남자도 흠칫 어깨를 굳혔다.
“어머니, 이게 무슨……”
“아델. 혼자 오기로 했잖아!”
남자가 언성을 높였다. 아델라이데는 입술을 짓씹었다.
연인의 품에서 빠져나온 아델라이데가 자카리에게로 걸어갔다.
온기라고는 전혀 남아 있지 않은 신록의 눈동자가 그를 내려다본다.
“자카리, 넌 나를 이해하겠지.”
“……어머니?”
“헤센바이츠 공작가에 대한 의무는 충분히 다했어.”
아델라이데는 입술 끝을 비틀며 웃었다.
그녀가 얼어붙은 자카리에게 냉랭 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후계인 너를 낳았잖니.”
“어머니, 지금 무슨 말씀을……”
“게다가 네가 괴물로 태어난 건 솔직히 내 탓도 아니잖니?”
그 날카로운 목소리에 이엘리마저 도 굳어 버렸다.
그녀가 공작가에 환멸을 품고 있다는 건 이엘리도 잘 알고 있었다.
공작가를 증오하는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여성이 무조건 모성애를 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자카리를 저버리면.
‘그러면 자카리는……”
이엘리는 반사적으로 자카리를 돌아보았다.
어머니가 그를 버리고 다른 남자와 도망친다.
그 광경을 눈앞에서 지켜보게 된 자카리는 과연…… 다음 순간, 이엘리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안 돼.’
자카리가 폭주하는 모습을 지금껏 몇 번이고 봤었던 이엘리였다.
지금의 자카리에게는 폭주의 전조 가 보였다.
새파란 눈동자가 절박하게 빛나고 있었다.
자카리는 간절한 어조로 애원했다.
“어머니, 제, 제발 떠나지 마세요.”
“네가 무슨 권리로 나를 붙드는 거니?”
하지만 아델라이데는 냉정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녀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이미 그녀는 공작가에게 해 줘야 할 의무를 다했다.
사랑이라는 이름하에 자신을 얽어 매던 남편은 물론이고, 괴물 같은 아들은 더 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과 떠나고 싶었다.
“……어머니.”
“어차피 잘난 공작가의 후계자니까, 난 없어도 되잖아?”
차가운 목소리로 쏘아붙이던 아델라이데는 확 어깨를 굳혔다.
자카리가 무릎을 꿇은 것이다.
“제발 가지 마세요. 제가 더 잘할 게요, 네?”
“난 네가 싫어! 네가 곁에 있는 것 자체가 혐오스러운데 어쩌란 말이야!”
아들의 애원을 차갑게 뿌리치며 그녀는 몸을 돌렸다.
자카리는 펑펑 울며 어머니를 붙들었다.
“어머니!”
“이것 놓지 못해!?”
그렇게 말하던 아델라이데의 곁으로 한 남자가 다가왔다.
자카리는 눈물에 젖은 얼굴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까 어머니와 함께 열렬한 포옹을 나누던 남자였다.
남자가 비뚜름하게 웃었다.
“소공작님. 그만 아델을 제게 보내 주시죠.”
“……”
“공작가와 소공작님의 이기심 때문 에, 언제까지 아델이 희생해야 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