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화
그저 긴장이 풀리고 피로가 쌓여 잠든 거라 했는데.
이엘리는 여전히 그에게 보석 같은 연녹색 눈동자를 보여 줄 생각을 않는다.
“내게 소중했던 사람들은 모두 날 떠났지.”
마른 입술 사이로, 잔뜩 쉬고 갈라 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되짚어 보면, 자카리의 인생은 꾸준히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있었다.
상실의 기억은 차곡차곡 쌓여, 가장 먼저 체념부터 배웠다.
“그리고 그 이유는 모두 나 때문이었어.”
자카리는 숨을 삼켰다.
누군가의 온기에 익숙하지 않았던 그 시간들.
부모조차도 두려워하고 경멸했던 자신의 힘.
모든 이에게 괴물이라 경멸당하면서 그것이 당연하다 여겼던 그 순간 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모든 것을 포기했다.
자신이 무언가를 포기하고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온기와 빛, 다사롭고 다정하고 보드라운 모든 것들은 제게 주어지지 않는 게 당연하다 여겼다.
“……그런 내가 너를 욕심냈던 것 자체가 잘못이었을까?”
자카리는 고개를 꺾으며 조그맣게 속삭였다.
포기할 수 없었던 단 하나, 이엘리.
그녀가 헤센바이츠의 일원이 되고, 그의 아내가 되며 희생해야 했던 많은 것들.
자신 때문에 겪어야만 했던 수많은 일들을 생각하면 죄책감으로 가슴이 조여 오는 것 같다.
하지만 가장 이기적인 건.
‘네가 괜찮다고 해 줬으니까.’
네가 내 곁에 남아 있겠다고 말해 줬으니까.
그 따스한 말에 의지하여, 평생 그녀를 놓지 않으리라 결심한 자신이었다.
이렇게까지 몰렸음에도, 그는 절대 그녀를 포기할 마음이 없었다.
“미안해.”
그러므로 이 사죄는 제 죄책감을 어떻게든 조금이나마 가볍게 해 보려는 것에 불과하다.
자신의 한심함에 자카리는 이를 물었다.
치미는 죄책감을 꾹꾹 억누르며, 그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이엘리는 눈을 뜸과 동시에,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어, 당신?”
왜냐하면 그녀의 앞에서 있는 존 재는 현실에 있을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길게 흩날리는 새하얀 은발 위로 분홍색 아샤꽃잎이 팔랑거리며 스쳤다.
남자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오랜만이구나, 나의 아샤.’
“왜 자꾸 저에게 당신의 아샤라고 하는 거예요?”
이엘리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양 허리에 손을 얹은 그녀가 삐딱한 시선으로 남자를 보았다.
“제 남편은 자카리거든요? 그리고 제 이름은 이엘리예요, 아샤가 아니라.”
정말, 사람 잘못 보셨다고요. 민폐예요.
그녀는 새초롬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남자는 여전히 상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남자는 한 걸음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그가 다정하게 소곤거린다.
‘알아. 그건 네 현재의 이름이지.’
“알쏭달쏭한 소리만 하시네요.”
이엘리는 뚱한 표정으로 남자를 흘 겨 보았다.
이런 식의 이해도 잘되지 않는 대화를 하는 건, 역시 그녀의 취향이 아니었다.
하지만 여전히 남자는 그녀를 바라 보며 제 할 말만 할 뿐이다.
‘네가 나와 이렇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건……”
자카리와 꼭 닮은 새파란 눈동자 위로 온기가 서렸다.
남자는 그녀를 향해 온화하게 말했다.
‘……드디어 네가 각성했다는 소리 구나.’
“자카리랑 꼭 닮은 외양을 가지셨으면서, 성격은 별로 비슷하지 않으신가 봐요.”
이제 이엘리는 빈정거리고 있었다.
그 정도로 그녀는 지금 상황 자체 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솔직히 말이지, 저쪽이 자카리의 먼 선조님이라고 해도.’
자카리에게 남겨 준 게 도대체 뭐가 있단 말인가.
빌어먹을 겨울의 힘 때문에 자카리의 마음고생이나 시키지 않았나.
그 힘 때문에 그가 괴물 취급을 받았던 것만 생각하면 이가 갈린다.
“제 남편은 그쪽보다 훨씬 더 다정하고 친절하다고요.”
남자는 웃는 낯으로 눈썹을 치켜을렸다.
하나 그녀는 전혀 기죽지 않았다.
꿈인데 뭐 어때?
“상황 설명도 잘해 주고요.”
이엘리는 얄법게 말을 덧붙였다. 저 남자가 자카리를 쏙 빼닮은 얼굴로 영문 모를 말만 지껄이는 것도 기분 나빴다.
사실 미운털이 박혀 그런 것 같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기로했다.
'네가 날 타인으로 인지하는 것도 당연하지. 하지만 역시 마음은 좀 아프군.’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남자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의 목소리는 약간 서글프게 들렸다.
‘넌 기억을 빼앗겼으니까.’
“……제가 기억을 빼앗겼다니요?”
순간 이엘리는 그 자리에 멈칫했다.
기억을 빼앗겼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연녹색 눈동자가 남자를 빤히 바라 보았다.
남자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 그대로야, 나의 아샤.’
“아니, 전 그쪽의 아샤가 아니라 고……!”
‘오래전에 넌 기억을 빼앗겼어.’
그 말을 들은 이엘리는 바짝 어깨를 긴장시켰다.
오래전에 기억을 빼앗겼다니? 남자는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자카리를 닮은, 아니, 똑같이 생긴 단아한 얼굴이 이엘리를 응시했다.
‘그래서 네 과거를 너라고 인지하지 못하는 거지.’
“과, 과거라니. 그건……”
‘넌 너 스스로를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그렇지?’
그 질문에 이엘리는 허를 찔린 낯을 했다.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언가 문제가 되나요?”
‘부정하지는 않는군.’
“그건 사실이기는 하니까요.”
이엘리는 툭 대답을 내뱉었다.
그녀가 다른 세상에서 온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죽기 전까지는 환생이란 걸 믿지 않았는데 몸으로 경험하게 됐다.
그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공격적인 태도를 보일 필 요는 없어.’
“그러면……”
‘애초부터 문제가 된다고 말하려 하지도 않았으니까.’
그 자리에 비스듬하게 선 채, 남자는 희미하게 웃었다.
남자는 여상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그리고 넌 실제로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 맞아.’
이엘리는 경계하는 눈초리로 남자를 마주 보았다.
남자의 태도는 무르익은 봄처럼 다 정한데도, 그녀는 여전히 혼란스럽기만 하다.
이엘리의 혼란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는 싱긋 미소했다.
‘다만 네 영혼이 최초로 태어난 곳 은 여기지.’
“수수께끼 같은 소리는 그만하 고……!”
‘물론 나도 좀 더 설명해 주고 싶지만, 시간이 없어.’
그렇게 말한 남자가 두 눈을 가늘 게 떴다.
시간이 없다니? 이엘리는 눈을 깜빡였다.
이 와중에도 남자에게서 자카리의 흔적을 찾는 자신이 싫었다.
하지만 자카리와 너무 닮았잖아, 저건.
‘넌 아직 각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너의 일부 또한 잃어버린 상태니까.’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이엘리는 눈썹을 찡그렸다. 너의 일부를 잃어버렸다니, 그렇다면 내 가 지금 온전하지 못한 상태이기라도 하다는 건가?
남자는 그녀를 제 눈 안에 가만히 담는가 싶더니, 그대로 설명했다.
‘불완전한 너는 나와의 만남을 오래 유지할 수 없다는 뜻이지.’
“제가 불완전 하다니요. 저는……”
‘어차피 조금 시간이 지나면 너도 알게 될 거야.’
남자는 그녀의 말을 툭 잘라 냈다.
새파란 눈동자가 그녀를 담은 채 고요히 안으로 침잠한다.
‘네가 완전해지기 위해서는 필히 해야 할 일도 있고.’
“그게 뭔데요?”
‘회색 기사에게서 너의 잃어버린 조각을 돌려받는 것.’
회색 기사? 이엘리는 움찔했다. 회색 기사라 하면 리펜베르크 황실의 선조를 이야기한다.
건국 전설에서 봄의 아샤 요정, 겨 울의 은룡 헤센바이츠와 더불어 한 자리를 차지하는 그 사람.
‘그런데 그 사람이 왜 여기서 튀어 나와?’
이엘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남자를 마주 보았다.
하지만 남자는 지금은 딱히 설명해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대신 그녀에게 진지한 표정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남자가 입술을 열었다.
‘네가 봐야 할 기억이 있어.’
“저기, 아까 전부터 대화를 따라가 기가 어렵거든요?”
이엘리는 포기했다는 뜻으로 양손을 들어 보였다.
그녀가 입술을 동그랗게 모으고 남자에게 묻는다.
“설명 좀 해 줄래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내가 봐야 할 기억이라니요?”
“현재의 나’를 얽매고 있는 기억이 지.’
‘현재’라. 그렇다면 '과거’도 있는 건가? 남자를 탐색하듯이 바라보던 이엘리는 재차 질문했다.
“‘현재의 나’라니, 그럼 당신은 ‘과거의 인물’인가요?”
‘당연하지. 이미 알고 있는 줄 알 았는데.’
반쯤 농담 삼아 던진 말에 남자는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어라, 진짜였어? 이엘리는 말문이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남자는 설핏 미소 지었다. 다정한 미소까지 자카리와 꼭 닮아 있었다.
‘이미 넌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잖아.’
“……겨울의 은룡, 헤센바이츠?”
‘정답.’
“……”
그럼 내가 전설 속의 남자를 보고 있다는 말이야?
이엘리는 약간 놀란 표정이 됐다.
아예 추측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상대에게 정답이라고 대답을 듣는 건 역시 기분이 다르다.
“정말로 그 헤센바이츠? 건국 전설에 나오는?”
‘그래, 맞아.’
이엘리는 의심 섞인 눈초리로 남자를 응시했다. 남자는 담담하게 이엘리의 시선을 맞받았다.
“……그렇다면 당신이 말하는 ‘현재의 나’는 도대체 누구인데요?”
잠시 후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질문을 던지면서도 왠지 무슨 대답이 나올지 알 것 같았다.
‘자카리 헤센바이츠.’
남자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 목소리엔 고저가 없었다. 그녀는 입술을 당겨 물었다.
역시 이 대답이 나올 거라고 생각 하긴 했지만, 실제로 듣자 정신적 충격이 상당하다.
“자카리가 현재의 당신이라고요?”
‘그래.’
“그렇다면 자카리는 과거에 겨울의 은룡, 헤센바이츠였고요?”
미심쩍은 질문에 남자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침착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답했다.
‘맞아. 환생의 고리를 거쳐서 지금의 그가 되었지.’
“장난치지 마세요!”
이엘리는 발끈하여 언성을 높였다.
지금까지 그녀의 남편이 얼마나 괴로웠는데, 저 민폐 덩어리 조상님이 자카리의 예전 모습이라고?
그녀는 끙, 입술 안으로 앓는 소리를 흘렸다.
‘……자카리랑 너무 닮았어.’
외양은 그렇다 치더라도 분위기와 성품까지도.
만약 자카리가 아무런 고통도 받지 않은 채 초월자가 되었다면 저런 남자가 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여유로우면서도 고적한 분위기. 무엇보다도…….
‘외로워 보이는 저 눈동자.’
자카리가 천성처럼 가지고 있는 짙은 고독.
갑옷처럼 온몸에 둘러 남을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아주 오래된 외로 움.
이엘리는 이마를 짚었다. 그래, 아니라고 현실 부정할 시간도 없다.
“……알겠어요. 장난이 아니라는 거죠?”
한숨을 내쉰 그녀가 손을 내리며 남자를 흘끗 바라보았다. 입술을 잘근거리면서 말을 잇는다.
“또한 우리에게는 시간도 얼마 없다고 했죠.”
‘그렇지.’
“좋아요.”
이엘리는 툭 대답을 내뱉었다.
형형한 연녹색 눈동자가 남자를 잡아먹을 것처럼 바라보았다.
“당신이 진짜로 겨울의 은룡인지, 공작가의 조상인지…… 그딴 건 난 잘 몰라요.”
이엘리는 단호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알 게 뭔가, 조상님들 때문에 자카리가 겪어야 했던 고통들을 생각해 보면 알미워 죽을 것 같다.
그런데 그 조상님이 자카리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