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난 더 이상 그대들을 용서하지 않을 거란 말일세.”
자카리의 분노는 바다 안쪽에 고요 하게 가라앉은 빙하 같은 분노였다.
바다 표면에 보이는 면적보다도 훨씬 더 크고 강력하다는 뜻이었다.
그 표정은 차분하되, 폭풍 직전의 차분함이었다.
“아무래도 그대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자카리가 씩 미소 지었다.
싸늘한 한기에, 평소 말이 많던 백작 부인마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쉽게도 그대의 딸은 내 말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군.”
그 말을 듣자마자 로렌 백작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홱 고개를 돌렸다.
로렌 백작의 시선 끝에는 안쓰러울 만큼 바들바들 떨고 있던 백작 영애 가 서 있었다.
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언성을 높였다.
“너, 도대체 무슨 짓을……!”
“공작 각하, 제발 용서해 주세요!”
바로 그 순간, 로렌 백작 영애가 그 자리에 납작하게 엎드렸다. 그녀는 곧 펑펑 울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절대로 의도적으로 그렇게 행동했던 건 아니었어요! 다만……!”
“용서?”
자카리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자카리의 눈동자는 온기라고는 하나도 없이 차갑기만 하다.
“용서라는 말을 입에 담는 걸 보니, 그대가 저지른 잘못이 어떤 것 인지 알긴 하나 보군.”
“다, 다시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이엘리에 관한 일에 한해서는, ‘만약’이란 없어.”
바로 그때, 기이하리만치 부드러운 목소리가 백작 영애의 귀에 내려앉았다.
백작 영애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자카리를 올려다보았다.
커다랗게 뜨인 눈동자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감히 공작가의 공작 부인을 납치 사주한 것에 대한 대가는 치를 준비 가 되어있겠지?”
“뭐라고!”
기겁한 로렌 백작 부부가 백작 영애를 노려보았다.
두 부부는 이구동성으로 고함을 내 질렀다.
“공작 부인의 납치 사건에 네가 관련되어있다는 말이야?!”
“죄송해요, 죄송해요! 정말로 그러려던 건 아니었어요, 그냥 무엇에 홀린 듯이……!”
“무엇에 홀린 듯이?”
그 말에 자카리가 처음으로 반응했다.
로렌 백작 영애는 눈물에 범벅이 된 낯을 들어을렸다.
“네, 저도 제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그렇군.”
자카리는 냉정하게 웃었다. 백작 영애가 움찔 어깨를 굳혔다.
자카리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난 그 이유를 알 것 같지만…… 어차피 증거는 없으니.”
“……가, 각하.”
“내게 뭔가 솔직히 고백할 게 있나?”
자카리는 마지막 자비를 베푸는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무엇이라도 입 밖에 꺼내 놓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로렌 백작 영애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없나 보군.”
“살려 주세요!”
로렌 백작 영애는 발작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살려 주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래서는 안 되는데 선을 넘었어요. 수많은 사죄의 말이 입 안을 뱅글뱅 글 돌고 있었다.
하지만 자카리는 그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써늘한 그 얼굴.
“그래야 할 이유가 없는 것 같군.”
너무 태연한 대답에, 세 사람은 멍 하니 자카리를 마주 보았다.
자카리는 서늘하게 웃어 보였다.
“왜냐하면 난, 지금까지 너무 많이 참았으니까.”
“각하, 제발……”
“더 이상 그대들에게 분노하고 실 망하는 감정 낭비도하고 싶지 않아.”
그건 완전히 상대방에게 기대를 접 고, 누군가를 포기한 자 특유의 표정이었다.
혈연이라는 이유로, 저 쓰레기 같은 작자들을 세상에 너무 오래 두었다.
자카리는 곧장 차갑게 말을 이었다.
“내 어머니에 대한 예의는 여기까지만 차려도 될 것 같군.”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난 같은 말을 여러 번하고 싶지 않아.”
그것이 로렌 백작 일가가 기억하는 마지막 말이었다.
그 순간, 겨울의 마법이 저택 전체를 뒤덮었다.
겨울의 가장 깊은 곳에서 끌어 올린 힘이 폭발했고, 이제 그곳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렇게 로렌 백작가문은 피붙이 하나 남지 않았다.
헤센바이츠 공작이 단신으로 저지른 멸문이었다.
공작 부인의 납치 사건은 북부에 스며들었던 친황제파 귀족들이 모두 제거되는 계기가 되었다.
* * *
그리고 며칠 후. 황제는 반갑지 않은 소식을 들었다.
“폐, 폐하!”
“무슨 일이지?”
평소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던 황궁의 시종장이 저렇게 이성을 잃고 허둥대는 모습이라니.
쓸데없는 소식이라면 당장 처벌을 내릴 것이리라.
내심 그렇게 생각한 황제가 턱을 쓸어내렸다.
“로렌 백작가가 멸문했습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린가, 말도 안 돼!”
권태로움이 가득 차 있던 황제의 얼굴에 충격이 가득 서렸다.
게다가 시종장의 말은 아직도 끝나 지 않았다.
“드, 듣기로 헤센바이츠 공작이 단신으로 그리했다고……”
“……뭐라고?”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소식에 황제의 얼굴이 온통 굳었다. 시종장이
조심스럽게 말을 잇는다.
“그리고 폐하께 선물이 진상되었습니다.”
“내게?”
“예. 헤센바이츠 공작가에서 진상한 선물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황제는 모든 것이 잘못되었음을 인지했다.
미간을 좁힌 황제가 명령했다.
“그 선물, 가져오게.”
“예, 폐하.”
시종장이 정중하게 고개를 조아렸다.
잠시 후 선물 상자가 방 안에 날라져 왔다.
금으로 만들고 보석으로 치장한 화려한 상자였다.
헤센바이츠의 부유함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번쩍거린다.
“……열어 보게.”
황제의 명에, 시종장은 있는 힘껏 상자 뚜껑을 잡아당겼다.
덜컹, 뚜껑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으아악!”
“아악!”
그 순간 황제의 입술에서 기괴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힘겹게 선물 상자의 뚜껑을 연 시 종장도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상자 안엔 황제가 골라 보냈던 세 사람의 목이 들어있었다.
“이런, 젠장!”
분에 못 이겨 황제가 고래고래 고 함을 질렀다.
그러고서도 꽉 막힌 속은 뚫리지 않았다.
로렌 백작가의 멸문, 그리고 공작 부인을 납치하기 위해 보냈던 세 사람의 수급.
황제가 북부에 넣어 두었던 모든 것을 잘라 냈다.
그로써 헤센바이츠 공작은 완벽하게 황제에게 경고한 것이다.
‘황제가 저지른 일임을 이미 알고 있다.’
목을 잘라 보낸다는 잔혹한 방식을 택한 것 또한 경고의 의미였다.
언제든 공작가가 황가에게 잔혹해 질 수 있다는 의미.
황제는 침음을 흘렸다.
일이 이런 식으로 실패할 줄은 상상조차 못했다.
‘공작의 외척이기도 한 로렌 백작가문을 제 손으로 멸문시켰을 줄이야.’
황제는 두 가지 이유를 추측할 수 있었다.
첫 번째는 그 누구라도 공작 부인에게 해를 끼치는 이는 용서하지 않겠다는 뜻이었고, 두 번째는 황가의 간섭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카, 카드가……”
그때 시종장이 기절할 것 같은 어 조로 중얼거렸다.
숨을 몰아쉬던 황제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카드라고?”
그러고 보니 잘 정돈된 수급 사이 로 카드가 하나 놓여 있었다.
황제는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낚아챘다.
고급 종이로 만들어져 금박이 찍힌 카드 위로, 짤막한 문장이 쓰여 있었다.
‘다음 차례가 누구일지는 저도 모릅니다. 또한, 아샤의 축복을 남용하지 마십시오.’
친절한 내용은 아니었다. 하지만 무슨 의도로 카드를 보냈는지는 명확했다.
헤센바이츠 공작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아샤의 축복을 이용하여 로렌 백작가와, 세 명의 납치범들에게 암시를 걸어 조종한 것까지도.
카드를 쥔 황제의 손에 힘이 들어 갔다. 희게 뼈가 돋는다.
“……헤센바이츠 공작.”
온몸을 뒤흔드는 처절한 패배감. 처음 느끼는 감각이었다.
완벽하게 패배했다.
저 멀리서 공작의 웃음소리가 들려 오는 것 같았다.
분을 이기지 못해, 황제는 두 눈을 있는 힘껏 부릅떴다.
18. 기억의 저편
자카리의 행동은 무려 황제의 면전에 경고장을 던진 행위나 다름없었 음에도, 황가는 공작가에게 별다른 항의를 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공작이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물질적인 증거가 없어 경고 선에서 멈춘 것뿐이다.
정말로 전쟁이 날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넌 그런 걸 원하지 않겠지.’
한편, 북부는 공작의 분노를 바라 보며 숨을 죽였다.
모두 공포에 질렸다.
제 어머니가 태어난 로렌 백작가마 저도 단신으로 멸해 버리는 공작의 행동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겨울의 마법이 가진 엄청난 파괴력.
로렌 백작가의 저택이 남아 있던 곳은 눈과 얼음과 서리로 뒤덮인 지옥도로 변했다 했다.
“괜찮아, 자카리.”
이엘리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로렌 백작가가 멸문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자카리에게 '괜찮다’고 말해 주었다.
“황제에게 이용당한 건 맞지만, 그래도 그들이 날 납치 사주한 건 변 하지 않으니까.”
자카리의 막막한 얼굴을 바라보던 이엘리는 자카리의 손을 꼭 마주 잡았다.
그리고 옅게 미소 짓는다.
“네가 죄책감을 느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
“이엔.”
“당연히 치러야 했던 대가를 치른 것뿐이니까…… 너무 안타까워하지 마.”
마치 자카리의 마음을 달래 주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이엘리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을 들은 자카리가 약간 마음을 놓자마자, 그녀는 또다시 죽은 듯이 잠 속에 빠져들었다.
‘난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솔직히 자카리는 제가 이루어 낸 말도 안 되는 기적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다만 그가 궁금한 건 이엘리였다.
동화 속, 깊이 잠들어 영영 깨어나지 않는 공주처럼 고요히 눈을 감은 제 아내. 갈피 잡기 어려운 혼란 뿐이었다.
‘내가 제대로 행동한 게 맞을까.’
자카리는 잠든 이엘리를 내려다보며 멍하니 생각했다.
이엘리의 얼굴은 고요했으나, 자카리의 마음은 마치 폭풍을 맞은 바다 같았다.
그래, 네가 원하지 않으니까. 그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황녀 전하는 네 얼마 되지 않는 친구지.’
손안을 손톱이 아프게 찔러 댔다.
하지만 자카리는 그 감각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알고 있어, 그래서 참았어. 하지만.’
새파란 눈동자는 깜빡이지조차 않고 아내의 얼굴을 굽어보았다.
그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문다.
‘이엔.’
도대체 난 어디까지 참아야 하는 걸까.
너에게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하는 황가를 언제까지 무시해야 하는 걸까.
그의 소중한 아내는 이성적인 성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가끔 그게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이엔…… 난 가끔.’
황가와 공작가의 대립은 남부와 북부의 대립이 된다.
제국이 반으로 쪼개져 서로 칼날을 겨누는 상황도, 그 원인이 자신이라는 것도 원하지 않을 터. 그래도 괜찮았다. 그가 숨을 삼켰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그냥 다 부수어 버리고 싶어져.’
그 어떤 것도 이엘리보다 우선하지 못한다.
가끔씩, 시시각각. 의문이 들었다. 이 세계에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일까.
너와 나, 단둘이 남은 세계는 어떨까.
온전히 이엘리를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
그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쓸어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