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깨워.”
눈썹을 찡그린 자카리가 턱을 까닥거려 보였다.
기사 한 명이 납치범들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으윽!”
“헉!”
좌아악!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인정사정없이 쏟아져 내렸다.
납치범들은 신음을 내뱉으며 두 눈을 깜빡였다.
자카리는 눈썹을 슬쩍 구긴 채 그 들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비스듬히 웃으며 말한다.
“정신을 잃을 여유가 있다니, 대단하군.”
“……헉, 억, 허억……”
“헤센바이츠의 기술도 모두 녹슬었 어. 그렇지 않은가, 마르텔 경?”
자카리가 힐끔 마르텔 경을 돌아보았다.
마르텔 경은 무표정한 얼굴이 되어 서 고개를 숙였다.
“면목 없습니다.”
“뭐, 지금은 평화로운 시대니까.”
자카리는 뚱하니 대답했다. 황가와 대놓고 으르렁거리던 몇 세대 전에 야 이런 고문 기술을 사용할 일이
많았다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런 기술을 사용할 일 이 생겼을 땐 그가 아직 어렸던 시 절이었고…… 또한 그 당시, 기술을 사용할 당사자는 사라져 버렸다.
‘내가 죽여 버렸으니까.’
그때의 일을 떠올리던 자카리는 기분이 저조해지는 걸 느꼈다.
등에 길게 남아 있는 흉터가 다시 욱신거리는 기분이었다.
칼로 베였을 때의 감촉이 어땠더라. 꽤 아팠던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다시 질문하지. 벌써 세 번째로 질문한다는 게 불쾌하긴 하지만.”
팔짱을 낀 자카리가 세 납치범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납치범들은 고통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두려움에 질려 온몸을 떨었다.
자카리가 고개를 기울이며 상냥한 눈동자로 속삭인다.
“그래서 이번 일을 기획한 사람은 누구라고?”
“로, 로렌 백작 영애입니다!”
두려움에 못 이긴 남자가 와락 언성을 높였다.
샐쭉 눈매를 횐 자카리가 다시 말을 잇는다.
“아까 전에도 그렇게 말했다 하더군.”
“예, 그렇습니다!”
“헤센바이츠의 수많은 기술들을 몸으로 경험하고서도 일관적인 대답이라니……”
자카리의 목소리는 마치 봄바람처럼 보드라웠다.
순간 그들은 또다른 두려움을 느꼈다.
눈앞에 펼쳐진 잔인한 광경을 보면 서도 꺼낼 수 있는 목소리가 아니었으니까. 자카리가 재차 말했다.
“……아주 장하군. 근성이 대단해.”
“가, 각하?”
“그런데 말이지, 난 하나 의심스러운 게 있어서 말이야.”
그렇게 말한 자카리가 손 위로 황 동 단추를 꺼내 들었다.
지하 감옥의 어두운 불빛 아래에서도, 단추는 빛을 머금어 반짝, 차갑 게 빛났다.
손목이 잘린 남자의 눈동자가 경악에 차서 커다랗게 뜨였다.
‘저, 저건 언제 가져간 거지?’
남자의 얼굴에 번지는 혼란을 자카리는 흥미롭게 응시했다.
잠시 후, 자카리가 손끝으로 단추를 튕겼다.
팅, 소리와 함께 허공을 가로지르는 단추.
신경이 그대로 끊어져 버릴 것 같았다.
“이 단추에 새겨져 있는 건 명백히 로렌 백작가의 문장이지. 나도 알 아.”
단추를 접싸게 잡아첸 자카리가 싱긋 웃었다.
하지만 새파란 시선엔 온기는 남아 있지 않았다.
자카리는 그저 침착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도, 납치범들은 마치 분노가 극에 달한 맹수를 보는 것 같은 두 려음을 느꼈다.
목을 졸라 끝내 숨을 끊어 버릴 것 같은 압도적인 공포.
자카리는 지나치게 차분하여 오히려 서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그대들에게 감히 내 아내를 납치하라 시킨 ‘윗선’이 바보가 아니고서 야.”
그 질문을 들으며 납치범들의 낯은 창백하게 질렸다.
“자신들의 꼬리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이런 증거를 일부러 남겼을까?”
“그건, 그건……!”
“게다가 그대들은 이번 일이 야만 족들이 사주한 일로 꾸미려 하지 않았나.”
마치 얼음으로 조각해 만든 것 같은 싸늘한 얼굴이 그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역시 앞뒤가 맞지 않잖아?”
헉, 납치범들은 동시에 숨을 들이 켰다. 자카리는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래서 내 영민한 아내는 어떤 사실을 떠올렸지.”
“저, 저희는……”
“야만족과 더불어 로렌 백작가까지, 더 중요한 누군가를 숨기기 위 한 미끼는 아닐까 하고.”
그 말을 들은 납치범들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얼굴로 말했다.
“물론 로렌 백작가가 아예 얽혀 있지 않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
“그들도 한 다리를 걸쳤겠지. 하지만……”
자카리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자카리가 가장 궁금한 건 이번 일의 꼬리가 아니라 머리였다.
“……난 진정한 윗선을 알고 싶어 서 말이야.”
“각하, 저희는……!”
“어떤가. 말해 주지 않겠나?”
그 질문과 함께 납치범들은 절대적인 공포에 사로잡혔다.
눈앞의 공작은 분명 미소 짓고 있는데. 평온한 목소리를하고 있는데.
그런데 금방이라도 목줄을 채여 살 해당할 것만 같은, 아니.
‘이대로 죽으라고 명령한다면…… 그 명령에 따라야 할 것만 같은.’
그런 압도적인 감각. 이런 감각이 가능하기는 한 건가.
마치 자신들이 폭풍우나 태풍처럼 압도적인 자연현상 앞에 선 조그마 한 짐승이 된 기분이었다.
절대로 이길 수도, 반항할 수도, 하다못해 도망칠 수도 없는 무소불위의 두려움.
“공작 각하, 살려 주십시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이런 애원이 튀어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말에 자카리는 눈썹을 올렸다.
“살고 싶으면, 살고 싶다는 마음을 제대로 표현해야지.”
“각하!”
“고작 ‘살려 달라’라는 말로 목숨을 구명하려 하기엔, 저지른 죄가 너무 크다 생각하지 않나?”
물론 납치범들이 진실을 토해 낸다 해도 살려 줄 생각은 없지만.
자카리는 뒷말을 삼킨 채로 싸늘하게 미소했다.
‘감히 이엘리를.’
그녀는 자카리의 마지막 선이자,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는 성역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 속내를 이야 기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 않아도 잔뜩 공포에 질린 것 같으니, 우선은 살살 구슬릴 생각이었다.
자카리는 차분한 얼굴로 그들의 대답을 기다렸다. 바로 그때.
“저희는……”
납치범 중 한 남자가 무어라 입술을 열려했다.
그러던 중, 남자의 시선이 갑자기 몽롱해졌다.
‘뭐지?’
자카리는 의심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마치 어떤 물리적인 것에 감정이 차단이라도 된 것처럼, 남자의 표정 은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이건 뭔가 이상하다. 자카리가 다 급하게 그들을 불렀다.
“당신들……”
“컥!”
그 순간 납치범들이 커다란 기침을 내뱉었다.
자카리는 물론이고, 기사들까지 눈을 부릅떴다.
“공작 각하!
“이, 이게 무슨!”
끄르륵, 남자의 입술에서 붉은 피와 함께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남자뿐 아니라 다른 두 납치범 모 두 그랬다.
혀를 깨물어 자결한 것이다. 그런데 세 사람이 동시에 자결을 선택한 다니?
“……자신의 주군에게 목숨을 바칠 정도로 충성스러운 사람들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는데.”
자카리는 약간 놀란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납치범들의 죽음에 대해 아쉬움이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계속 막혀 있었던 생각에 물꼬가 트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암시가 걸려 있었던 것 같군.”
“……”
“비밀을 발설하려는 순간, 자살을 통해 입을 막아 버리는 암시라.”
자카리의 눈동자가 가느스름 해졌다.
의자에 축 늘어진 시신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자카리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지금은 거의 사장된 마법의 영역에 닿아 있는, 정신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힘.
자카리가 가진 겨울의 마법과 거의 동일한 격을 가진 힘이라고 하 면……
“이 제국에서 저렇게 강력한 암시를 걸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황제. 자카리는 숨을 삼켰다.
그리고 충성스러운 기사단장의 얼굴이 걱정에 가득 차서 주군을 응시 한다.
“하지만 물증이 없지 않습니까.”
“알아. 물증조차 없는 마당에, 이대로 황가를 건드릴 수는 없지.”
자카리는 냉정한 군주의 얼굴로 그렇게 답했다.
잠시 후 그는 사납게 입꼬리를 밀어 올렸다.
“다만 경고는 해 줄 수 있지 않겠나.”
“예?”
“나의 아내, 북부의 안주인을 다시 한 번 건드린다면……”
자카리가 서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 얼굴을 보며 기사들은 저도 몰 래 긴장하고 말았다.
“……공작가가 차후에 어떻게 나올 지에 대한 경고 말일세.”
“……”
“……”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자카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시체를 흘끗 바라본 자카리가 입을 열었다.
“시체는 깔끔히 치워 두도록.”
“알겠습니다, 각하.”
기사들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몸을 돌리던 자카리는 잠시 후, 생각난 것처럼 통보한다.
“그리고 오늘 공작성을 잠시 비울 예정일세.”
“예?”
느닷없는 공작의 말에 마르텔 경은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자카리는 빙그레 눈웃음을 지었다.
“오늘 밤까지는 돌아올 테니, 안주인 마님을 잘 지키고 있게.”
“하, 하지만 각하.”
“아 참, 공작성의 병력은 모두 두고 갈 걸세. 그러니……”
마치 가벼운 산책을 간다고 말하는 것처럼 여상한 말투였다.
새파란 눈동자는 홀로 평온했다.
“……이만한 병력을 가지고도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다면, 그대들도 목을 내놓아야 하겠지.”
기사들은 모두 마른침을 삼켰다.
자카리는 대충 손을 휘저어 보이는 가 싶더니 걸음을 옮겼다.
“어떻게든 내 아내를 제대로 지키 게. 알겠지?”
“예, 각하. 명 받들겠습니다.”
휘적휘적 걸어 나가는 공작을 그 누구도 붙잡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리고 그날, 헤센바이츠 공작은 로렌 백작가를 방문했다.
느닷없는 공작의 방문에 로렌 백작과 백작 부인은 깜짝 놀랐다.
공작가와 백작가 간의 관계는 빈말 로라도 좋다고는 할 수 없었기에 더 더욱.
“고, 공작 각하께서 여기까지 어떤 일이시죠?”
“대가를 받으러 왔지.”
인사조차 생략하고 발을 들인 자카리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백작가족 만을 남기고 다른 사람들을 모두 내 보낸 것이었다.
이후 그는 대뜸 그렇게 말했다. 백 작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예? 대, 대가라니.”
“감히 내 아내를 건드린 것에 대한 대가.”
그렇게 말한 자카리가 쌩긋 눈웃음을 쳤다.
하지만 누군가의 미소가 무조건 호의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서리 같은 미소가 날카로웠다.
금방이라도 누군가를 갈기갈기 찢어 죽일 것 같다.
“그리고…… 친애하는 황제 폐하께 보낼 경고의 뜻 정도가 되려나.”
“각하?”
그 순간, 로렌 백작은 등골을 타고 흐르는 선명한 공포를 느꼈다.
감히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존재를 건드린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거대한 자연재해를 마주하는 기분이 이렇지 않을까.
“로렌 백작.”
나긋한 목소리. 우아한 시선. 귀족 적인 그 모습 안쪽에 숨겨져 있는 거칠고 폭력적인 그 면모.
“그대들은 선을 너무 많이 넘었 어.”
평소의 존대조차 모조리 지워 버린 싸늘한 말투에, 로렌 백작은 목 뒤를 스치는 서늘한 두려움을 느꼈다.
비록 자카리는 화사하게 웃는 얼굴 이었지만, 지금 그가 느끼는 분노는 진짜였다.
“……예?”
“날 너무 화나게 했지.”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로렌 백작은 온몸을 덜덜 떨었다.
자카리는 오만한 시선으로 얼어붙은 세 사람을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