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이엘리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건 친구에 대한 걱정이기도 했 고, 황가와 공작가 간에 분쟁이 생 길까 염려하는 것이기도했다.
자카리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해 줬다.
“황녀 전하께서는 멀쩡하셔.”
“그래? 다행이다……”
그녀는 그제야 작게 웃었다. 황가가 공작가에게 트집을 잡을 걱정은 내려놓아도 될 것 같다.
“황녀 전하를 해하려고 하긴 했는데, 때마침 헤센바이츠의 기사가 들이닥친 모양이야.”
그 말에 그녀는 자초지종이 궁금해졌다.
자카리는 미간을 좁히면서 차근차 근 설명해 주었다.
“그래서 황녀 전하를 포기하고 너를 납치하는 쪽에 집중한 거지.”
“아하.”
“아무래도 그들의 첫 번째 목적은 너였던가 봐. 감히……”
그렇게 말한 자카리의 얼굴은 다시 화가 난 표정이 되어 버렸다.
치밀어 오르는 분을 어쩌지 못하고 꾹꾹 누르고 있는 낯에 어색하게 미 소 지은 이엘리가 황급히 말문을 돌 린다.
“그리고 자카리, 네게 줄 것이 있어.”
“내게 줄 물건이 있다고?”
“응. 아까 저들한테서 빼앗은 건데……”
품을 뒤적이던 그녀가 자카리에게 황동 단추를 꺼내 놓았다.
단추가 반짝, 빛을 반사해 냈다.
“실은, 꽤 힘들게 빼돌려 놓은 거 거든.”
이엘리는 불퉁한 얼굴을 했다. 정말이었다. 일부러 도망치는 흉내까지 내면서 빼앗아 둔 건데.
“이렇게 저들을 제압하게 될 줄 알았더라면 괜히 힘 빼지 말 걸 그랬 어.”
“아냐, 넌 최선을 다한 거야. 고마 워.”
자카리가 이엘리의 이마에 쪽 소리 나게 키스했다.
그녀는 단추를 내보이며 열심히 설명했다.
“그게, 이 단추에 새겨져 있는 문 양이 백조 문양이거든. 로렌 백작가의 문양이야.”
“뭐라고?”
자카리의 언성이 순간 높아졌다. 고개를 저은 그녀가 곧게 세운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
“하지만 바보도 아니고 누가 납치 범들을 보내면서 가문의 문장을 단 옷을 입히겠어?”
이엘리는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간신히 침착함을 되찾은 자카리가 질문했다.
“그 말은?”
“응. 그리고 저 사람들은 야만족에게 이번 일을 뒤집어씌울 거라고 했었어.”
이엘리의 대답을 들은 자카리가 잠시 침묵했다.
그녀는 살포시 미간을 좁히며 말을 이었다.
“사실 이 단추가 황제가 개입했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지. 하지만……”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힐끗 남편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가 단추를 손안에서 굴리며 말했다.
“적어도 야만족들이 개입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되잖아. 이 단추는 제국의 물건이니까.”
“그렇지.”
“기껏 온건 정책을 통해 야만족과 관계가 개선됐으니, 새로이 문제를 일으킬 필요 없어.”
그렇게 말하던 그녀의 눈빛이 차갑 게 가라앉았다.
아마 납치범들의 일차적인 목적은 야만족들에게 이번 일을 뒤집어씌우고 그들은 빠져나가려는 것일 터였다.
로렌 백작가의 문장은 그 목적이 성사되지 않았을 때, 방패로 삼기 위함이겠지.
그녀는 냉정한 어조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제국 내에서 이번 일을 기획한 사람이 있다고 봐. 그리고 난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하던 이엘리의 몸이 순간 휘청거렸다.
아, 안 되는데.
아무리 긴장이 풀렸다고 해도 벌써 이렇게 쓰러지면…… 그녀는 애써 정신을 차려 보려 했지만, 절로 목소리가 흐트러진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납치를 당했고, 마취제에 당해 기 절했으며, 깨어난 이후에도 계속해 서 극심한 긴장 상태에 놓여 있어야
했다.
이 정도로 제정신을 유지한 것만 해도 대견한 일이다.
“……이엔?!”
이엘리의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놀란 자카리가 이엘리를 붙들었다.
어느새 그녀는 두 눈을 감은 채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마르텔 경이 입술을 열었다.
“걱정 마십시오, 단순히 긴장이 풀 리셔서 잠드신 것 같습니다.”
“……그래.”
자카리가 보기에도 그래 보였다.
비록 곤히 잠들어있긴 했지만 혈색이 나쁘지는 않았다.
자카리는 그녀를 추슬러 안았다.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던 마르텔 경이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정말 다행입니다, 각하 곁에 안주인 마님이 계셔서요.”
그 말은 한 점 거짓 없는 진심이었다.
문득 마르텔 경을 돌아본 자카리가 작게 미소 지었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네.”
자카리의 얼굴에 드리워진 미소에는 드물게 그늘 한 점 없다.
기사들은 내심 크게 안도했다.
‘정말로 폭주 직전에 멈추셨어.’
‘믿어지지 않는데……”
‘저게 가능한 일이었던가?’
그녀가 등장하기 전까지 기사들은 당장 물러나야 하나, 혹은 대피령을 내려야 하는 건 아닐까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자카리는 굉장히 평온해 보였다.
그런 걱정을 하는 것 자체가 우스 워 보일 만큼.
‘지금의 각하를 보고 있자면, 폭주의 위험 자체를 아예 무시해도 될 것만 같군.’
어렸을 적부터 공작가의 기사들과 함께 전장을 굴렀던 자카리였다.
그 당시의 자카리는 전투에 나설 때마다 언제나 폭주를 거듭했다.
사람들이 자카리를 보며 공포에 젖었던 이유가 있었다.
‘사실 각하께서 어렸을 적에는…… 폭주 직전에 진정됐던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하지만 이엘리가 자카리의 아내로 공작가에 들어오고부터 상황은 반전 됐다.
자카리는 전장에서 자신의 힘을 완벽히 제어해 냈고, 단 한 번도 폭주 했던 적이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안주인 마님이 곁에 계시는 것만으로도 폭주 자체를 막을 수 있다니, 다시 봐도 놀라워.’
놀란 표정을 능숙하게 감추며 마르텔 경은 생각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가 싱긋 미소했다.
‘역시, 기온도 다시 제대로 돌아가는군.’
입김이 나올 정도로 싸늘하게 식었던 날씨는 모두 사라졌다.
이제 공기는 가을밤에 어울리는 쌀쌀한 정도의 온도로 돌아가 있었다.
자카리는 깊게 잠든 이엘리를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
“아차, 그리고.”
이엘리를 소중하게 품에 안은 자카리가 흘끗 시선을 돌렸다.
차가운 시선이 납치범들을 본다.
“저 세 사람은 모두 공작성으로 압송하도록.”
“예, 각하.”
기사들이 깍듯이 목례했다. 자카리는 턱을 까닥하고는 홱 몸을 돌렸다.
품 안에서 색색 들려오는 숨소리를 귀 기울여 듣던 그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분홍색 꽃잎들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아샤꽃이라. 지금 계절에 피는 꽃이 아닌데……”
자카리는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전설 속의 아샤 요정은 봄의 화신으로 서, 계절을 바꾸고 꽃을 피우며 만 물을 치유하고 소생시키는 힘을 가졌다고 했다.
그리고 제 품 안의 조그만 아가씨는 전설로 전해지는 아샤 요정의 외 양과 꼭 닮았다.
자카리는 저도 모르게 조그맣게 중얼 거렸다.
“설마 이엘리가 이 꽃들을 피워 낸 건가..?”
자카리는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었다. 이건 너무 과한 추측이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고마운 일이었다.
만약 이 꽃들이 피지 않았다면, 그녀가 있는 위치를 알지도 못했겠지. 그는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가자, 집으로.”
잠든 제 아내를 향해 자카리가 상냥하게 소곤거렸다. 새파란 눈동자가 순간 싸늘하게 빛났다.
“조금만 기다려, 네가 이런 일을 당하게 된 대가는 모두 받아 올 테니까.”
칼날 같은 시선은 오로지 제 아내를 바라볼 때만 누그러졌다.
흩날리는 꽃잎이 온 세상을 화사하게 물들이는 가운데, 먼동이 트고 있었다.
만물이 주홍색 태양빛에 부드럽게 젖어 들었다.
오랜 긴장감에 시달렸는지, 이엘리는 쉽사리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자카리는 의사가 이엘리의 건강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으며, 단순히 잠들어 있다고 확언해 줄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말이지?”
“예, 정말입니다. 그저 긴장이 풀리고 피로가 누적되어 잠들어 계신 것 뿐입니다.”
자카리의 흉험한 기세에 의사는 잔 뜩 긴장하여 그렇게 말했다.
그제야 자카리는 좀 안도했다.
“그래, 알겠네. 이엔을 잘 보살펴 주도록.”
“각하께서는……?”
“난 아직 해야 할 일이 좀 남아 있어서 말일세.”
그렇게 말한 자카리가 몸을 일으켰다.
공작의 기세가 지나치게 섬뜩하여, 의사는 몸을 굳혔다.
“그녀를 납치한 대가를 받아 내야지.”
자카리는 비뚜름하게 입술 끝을 밀 어 올렸다.
방 밖으로 빠져나가는 공작의 뒷모습은 베일 것처럼 날카로워, 의사는 숨을 삼켰다.
제국 안의 귀족 가문들은 꽤 많지 만, 그중에서도 범죄자를 가두는 감 옥을 직접 보유한 가문은 흔하지 않다.
그리고 헤센바이츠 공작가는 감옥을 보유한 몇 안 되는 가문 중 하나였다.
“그들은?”
“안에 있습니다.”
그를 감옥 앞까지 수행한 마르텔 경이 절도 있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열게.”
끼이익. 불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자카리는 그 안쪽으로 한 걸음 발을 디뎠다.
피비린내와 습기가 뒤섞인 불쾌한 냄새가 그의 코를 찔렀지만, 자카리의 표정은 평온했다.
“자, 그대들이 내게 해 주어야 할 이야기가 아주 많을 거야.”
느슨한 얼굴이 된 그가 입을 열었다.
자카리가 건드릴 것도 없이, 지금 납치범들의 상태는 거의 만신창이였다.
그가 허리를 숙여 납치범들의 얼굴을 바라보자, 그들은 움찔 몸을 굳혔다.
“그래서 누가 이번 일을 기획했지?”
“저들의 말로는 로렌 백작 영애라 고 하더군요.”
마르텔 경이 빠르게 대답했다.
“로렌 백작 영애?”
자카리는 미간을 좁혔다.
헤센바이츠의 기사들은 입을 열지 않으려 하는 상대에게 정보를 뜯어 내는 실력도 일품이다.
자카리는 그들의 실력을 의심하는 게 아니었다.
다만 의아할 뿐이다,
“로렌 백작 영애라고? 고작 그 여자가 이렇게 대규모의 일을 저지를 수 있다고?”
자카리는 대번 의심스러운 낯이 되었다. 뭔가 이상했다.
자카리는 이엘리가 뜯어 온 황동 단추를 떠올렸다.
백조 문장이 선명하게 남아 있던 그 단추.
그리고 이엘리가 자신에게 했던 말.
‘하지만 바보도 아니고 누가 납치 범들을 보내면서 가문의 문장을 단 옷을 입히겠어?’
자카리는 아내의 생각에 동의했다.
일차적으로는 야만족들에게 이번 일의 죄를 덮어 씌우려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처럼 그 일을 실 패한다면……’
그 경우를 대비하여 로렌 백작가의 문장을 남겼다.
백작가를 희생해서 이 일을 기획한 윗선을 가리려한 의도겠지.
그는 눈썹을 찡그렸다.
‘제국 내에서 이번 일을 기획한 사람이 있다고 봐. 그리고 난 그 사람이……’
누구일까. 감히 간 크게 헤센바이츠의 안주인을 납치하고, 그녀를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려한 사람은.
이엘리가 예측하고 있었던 사람은
그가 현재 예상하고 있는 사람과 같을 것인가.
“그래, 로렌 백작 영애가 이 모든 일을 기획했다고?”
비딱하게 선 자카리가 의자에 묶여 있는 납치범에게 질문을 던졌다.
소년처럼 청량한 얼굴이었으나 어조는 서늘했다.
무엇보다도 자카리는 잔인한 광경을 보며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끄르륵……”
그럼에도 납치범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대답하지 못했다.
오랜 시간 동안 집약된 헤센바이츠의 온갖 기술을 온몸으로 직접 맛본 납치범들은 이미 정신이 혼몽한 상 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