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이엔.’
파괴적인 충동이 전신을 뒤흔든다. 지나치게 유혹적인 충동이었다.
자카리는 활짝 미소 지었다.
“있잖아, 이엔.”
“응?”
“우리 둘만이 살아가는 세계는 어 떨까?”
자카리는 애틋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를 빤히 바라보던 이엘리는 단호 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말도 안 돼.”
“어째서?”
“그건 옳은 일이 아니니까.”
그 말에 자카리는 멈칫 어깨를 굳혔다.
이엘리는 자카리의 발에 짓밟힌 남자를 흘끗 곁눈질했다.
끄르륵, 괴상한 소리를 내며 남자 가 꿈틀거린다.
애써 눈을 돌리며 이엘리는 이어 말했다.
“너 지금 이상해.”
“내가?”
자카리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의아한 눈동자 안쪽으로, 잠시 후 이해의 빛이 깃들었다.
그 이해의 빛은 약간의 실망감을 가지고 있었다.
고개를 가로저은 자카리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네가 날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래 서 널 실망시켰다면 정말 미안해.”
“자카리.”
“하지만 지금 이 모습도 나야.”
이엘리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자카리는 상냥하게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난 어쩔 수 없는 괴물이야. 구제 할 수 없지. 게다가……”
자카리의 눈동자가 위험한 빛을 품고 반짝였다.
질 좋은 비단처럼 매끄러운 목소리 가 들렸다.
“……너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점에서 굉장히 질도 나쁘 지.”
지금까지 이엘리는 자카리가 ‘괴물’이라 불리는 이유를 그녀 스스로 잘 알고 있다고 여겼다.
타인들이 자카리를 ‘괴물’이라고 여기는 근거는 그저, 악의를 가진 모욕이었다.
왜냐하면 헤센바이츠는 무려 황가를 적으로 두고 있는 가문이었으니까.
지금껏 황가는 몇 번이나 헤센바이츠를 깎아내리려 했고, 이엘리 자신도 황가가 저지르곤 하는 말도 안 되는 억지와 모욕을 수없이 지켜보았다. 하지만.
‘……이런 두려움을 느끼게 할 정 도라니. 몰랐어.’
그때 자카리는 손을 뻗었다. 그녀의 눈가를 덮어 오는 다정한 손. 그가 눈을 가린다.
눈앞의 자카리는 그녀가 알고 있는 모습 그대로인데, 그럼에도 그녀의 남편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쨌거나 이엔, 네가 보기에 좋은 모습은 아니니까.”
가려진 시야. 이엘리는 그대로 회피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지나치게 잠잠해서 오히려 두려울 정도로 공기는 고요했다.
이엘리는 이 조용한 공기가 뜻하는 바를 이미 알고 있었다.
‘……폭주의 전조.’
이엘리는 자카리가 폭주하는 모습을 몇 번이나 경험했다.
감정이 극한에 다다르면, 자카리는 자신이 보유한 겨울의 마법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공기가 너무 차가워, 겨울 같아…..’
공기 하나하나에 살의가 들끓었다. 피부를 따끔따끔하게 찌르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가장 불안한 점은 따로 있었다.
지금의 자카리는 선을 넘었다. 분명 여기서 한 발짝 더 가면.
‘……돌아을 수 없을 거야.’
그 순간, 이엘리는 숨이 막힐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다.
이대로라면 자카리를 영영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눈 안에 남아 있는 자카리의 잔상 위로, 스치듯 본 남자의 모습이 덧 씌워졌다.
‘나의 아샤.’
새하얗게 흩날리는 긴 은발, 짙푸른 시선.
얼음으로 빚어낸 것 같은 아름다운 남자의 목소리.
‘겨울의 은룡, 헤센바이츠라고 했나.’
순간 이엘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분했다.
어째서 과거의 존재들 때문에 이딴식으로 휘둘려야 하는 거야? 아샤 요정이고, 헤센바이츠 용이고, 황가 며 건국 전설까지도 모조리 지긋지긋했다.
“누가 네 맘대로 그따위로 생각하래?”
그리하여 그녀는 그의 손을 확 떼어 냈다.
그를 똑바로 바라보는 얼굴은 화가난 표정이었다.
“……이엔?”
자카리는 약간 허를 찔린 표정이 되어 이엘리를 마주 보았다.
그녀는 곧장 대답을 쏘아붙였다.
“너에게 날 포기하라고 한 적, 단 한 번도 없어!”
이엘리는 단호한 시선으로 자카리를 마주 보았다.
자카리가 예전부터 ‘괴물’이라고 불렸던 진정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도망칠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녀가 차분하게 말했다.
“널 이해하지 못하는 내게 실망하는 건 하는 수 없지만.”
자카리의 말문이 턱 막혔다. 이엘리는 언제나 자신의 가장 깊은 속내를 날카롭게 꿰뚫어 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 말부터 먼저 들어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자카리는 멍하니 그녀를 마주 보았다.
비딱하게 선 이엘리가 짓씹듯이 입을 열었다.
“나, 너 포기 안 해.”
그녀의 손이 자카리의 양 뺨을 똑 바로 붙들었다.
곧은 연녹색 눈동자는 흔들림이라 곤 없었다.
“널 떠나지도 않아.”
“……”
“매번 지레 겁먹어서 먼저 이야기 하는 건, 오히려 너잖아.”
자카리는 숨을 삼켰다. 은밀하게 감춰 둔 두려움을 낱낱이 드러낸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진정해. 난 언제나 네 곁에 있을 테니까.”
그의 눈동자가 짧게 흔들렸다. 공 기를 찌르르하게 울리던 살기도 잠잠히 가라앉는다.
이엘리는 쓰게 웃었다. 그녀의 남편은 다 좋은데, 항상 이러는 게 문제였다.
“멋대로 생각하고 판단하지 좀 마, 제발.”
이엘리는 자카리를 달래듯이 입을 열었다.
눈앞의 자카리는 완벽한 성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이엘리는 가끔씩 그에게서 길 잃은 어린 아이처럼 불안정한 면을 보고 말았다.
“너에게만큼은 이런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았어.”
한참 입술을 달싹거리던 자카리가 작게 속삭였다.
새파란 눈동자에는 아까 전의 광기 대신 공허함과 허망함이 남아 있었다.
그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네 앞에서 내 자신이 괴물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지 않았어……”
“네가 무엇을 했는데?”
그 속삭임에 이엘리가 되물었다. 그가 멈칫하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물론 저 사람의 손목이 날아가기는 했지만.”
“……이엘리.”
“감히 헤센바이츠의 안주인을 납치하고도 저 정도 대가조차 치르지 않는 게 이상한 거지.”
이엘리는 당연한 얼굴이 되어서 대답했다.
손목이 잘린 것에 대한 시각적인 충격은 분명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납치하려 했 던 납치범에게 도덕적인 죄책감이 전혀 들지 않는다.
“그 외에 네가 어떤 짓을 저질렀는 데?”
"하지만 이엔, 난 하마터면 또 한 번 폭주를……”
“그 폭주, 하지 않았잖아.”
자카리의 말을 툭 자른 이엘리가 단호하게 말했다.
연녹색 눈동자가 자카리를 똑바로 보았다.
“넌 괴물이라는 증명 따위, 한 적 없어.”
“……이엔.”
“그러니까 그딴 말은 하지도 마.”
어느 순간 이엘리는 약간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자카리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새초롬한 눈길과 꼭 다문 입술과 가느다란 어깨, 그리고, 항상 흔들리지 않는 그 곧은 시선을.
“넌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잘생기 고 멋진 사람이야.”
자카리는 입을 꾹 앙다물었다. 그런 자카리를 보며, 어린아이를 보듯 그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들어 봐, 자카리. 난 네 장점을 백 가지도 더 넘게 말할 수 있어. 그리고 그중……”
이엘리는 손을 뻗어 자카리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넘겨 주었다.
그 손길이 너무나 다정했다.
“네 가장 큰 장점이 뭔지 알아?”
“……”뭔데?”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자카리는 숨을 삼켰다.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 그 말만큼 제게 어울 리지 않는 말이 또 있을까.
이엘리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소곤소곤 들려오는 목소리가 달았다.
“어떻게 변하든지, 네가 어떤 사람 이든지…… 난 모두 괜찮아.”
이엔, 넌 하나 모르는 게 있어. 내 심장은 너무 작고 작아서…… 너 혼 자만으로도 꽉 차고 말아.
“넌 내게 첫 번째로 소중한 사람이고, 내 남편이니까.”
내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하는 건 너뿐이야.
그런데도 넌 나를, 이렇게 부족하고 헤매는 나를 믿고 사랑해 주지.
언제나 똑같은 태도와 미소로. 자카리는 울컥하는 기분을 느꼈다.
“난 널 처음 봤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널 사랑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어.”
그렇게 말한 이엘리는 생긋 눈웃음을 쳤다.
입 밖으로 내어놓으니 그제야 실감 이 났다.
그랬구나. 난 자카리와 처음 만났 던 순간부터 그를 사랑하고 있었어.
자카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몇 번이고 폭주한다고 해 도?”
“응.”
“아까 전의 난…… 세상 전체를 부 수고 싶었어. 오직 너와 단둘이 남아 있고 싶었지.”
고해성사라도 하는 것처럼 나직한 음성이었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그가 이엘리에게 말했다.
“언젠가 내가 겨울의 용이 되어 버리면 어떡하지? 정말로 세상을 부수 어 버린다면?”
진심이었다. 그리고 자카리는 자신 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방금 전, 한계를 넘어 버렸던 그 감각이 아직도 손끝에 생생하다.
그는 간절하게 그녀를 보았다.
“걱정하지 마. 왜냐하면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정말로?”
“그럼.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을 테니까.”
이엘리는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들어 자카리의 입술을 어루만졌다.
계속 짓씹어 피까지 냈던 메마른 입술 위로, 이엘리의 체온이 와닿았다.
“그러니까 잊지 마, 자카리.”
그 말을 듣자마자 전신에 안도감이 가득 차올랐다.
오로지 그녀의 목소리만을 믿고 싶었다.
“난 너와 모든 것을 공유하고 싶어. 네 고민이나 고통까지도 모두.”
이엔, 그거 알아? 넌 내 삶의 이유 이자 목적이고, 빛이며, 단 하나뿐인 이정표야.
네가 옳다고 하는 것이 내 진실이 고, 네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게 무엇이든 잘못된 거야. 나의 유일한 여신.
“네가 힘들어하는 문제가 있다면 그것도 함께할게.”
이엘리의 목소리는 흔들림 없이 고 요하다.
자카리는 연녹색 눈동자 안쪽에 비 친 자신의 얼굴을 가만히 마주했다.
그녀의 차분한 낯과는 다르게, 제 표정은 금방이라도 울어 버릴 것 같았다.
“그러니까 멋대로 너 혼자 판단하
거나, 날 밀어내거나 하지는 말아 줘. 알았지?”
이엘리는 생긋 웃었다.
그 웃는 얼굴을 보며, 자카리는 그녀가 곁에 있음을 피부로 실감했다.
그는 그녀를 부서져라 끌어안았다.
깊게 호흡하던 그는 제가 이토록 몰려 있었음을 깨닫는다.
“……숨 막혀, 자카리.”
그녀가 작게 칭얼거렸다. 자카리는 어설프게 웃었다.
이제야 조금이나마 구원받은 기분이었다.
* * *
기사들은 납치범들을 모두 제압해 냈다.
상황은 그럭저럭 정리된 것처럼 보였고, 이엘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온몸을 빳빳하게 긴장시키던 긴장 감이 사라지자,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다.
‘하지만 벌써 쓰러지면 안 되지.’
이엘리는 양손으로 양 뺨을 찰싹 쳤다.
아직 자카리에게 해 줘야 할 이야 기가 남아 있지 않나.
그가 의아한 낯이 되어 이엘리를 내려다본다.
이엘리는 자카리를 향해 말문을 열었다.
“자카리. 황녀 전하는 어떠셔?”
그가 살며시 미간을 좁혔다.
갖가지 감정이 뒤범벅된 시선이 그녀의 얼굴을 훑어 내린다.
“넌…… 네 걱정이나 하지.”
“보다시피 난 멀쩡하잖아. 내가 납치당할 때, 황녀 전하도 분명 곁에 계셨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