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자카리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버지를 잃은 후, 자카리를 현실에 붙들어 주는 유일한 끈은 바로 이엘리였다.
그런 그녀를 이렇게 급작스럽게 잃어버려야 한다니, 시야가 깜깜했다.
“대답해, 이엔.”
“공작 각하, 조금 진정하시고……”
“제발, 제발……”
자카리의 목소리 끝이 흐트러졌다. 그나마 기사들과 병사들 앞에서 무너지지 않도록 이를 악무는 것이 최선이었다.
마르텔 경은 그런 자카리를 나지막하게 불렀다.
“헤센바이츠 공작 각하.”
“……”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자카리는 느릿하게 시선을 들어 올렸다.
어둠 속에 묻힌 새파란 눈동자는 평소의 단정함과 한참 거리가 멀다.
귀기가 서린 양 불타오르는 눈동자가 그를 응시했다.
“마음이 무척 어지러우실 것은 알고 있으나, 제발 진정하십시오.”
“……마르텔 경.”
자카리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마르텔 경은 마른침을 삼켰다.
말을 몰아 자카리의 곁에 다가선다.
말고삐를 있는 힘껏 움켜쥔 자카리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자카리는 신음처럼 속삭였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진정할 수 있겠나?”
자카리의 목소리는 지금껏 마르텔 경이 알고 있던 것과는 전연 달랐다.
쇠를 갈아 내는 것처럼 섬뜩한 그 음성.
절대 손안에서 놓아서는 안 되는 무언가를 영영 잃어버린 것처럼 절 박했다.
“이엘리가 납치되었어. 실종되었다고.”
“공작 각하.”
“누가 그녀를 납치했는지 그것조차 몰라. 그녀가 탔던 마차도 근교에 버려져 있었지.”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 지금 상황을 곱씹어 생각할수록 속이 바짝바짝 말라비틀어진다.
“그녀가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까? 검이나 활 같은 무기는 손에 쥐어 본 적조차 없어.”
“각하.”
“그녀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는데 나 혼자 속 편하게 있으라고?”
자카리가 싸늘한 어조로 되물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신경을 유리 조각으로 갉작이는 느낌이다.
“만약 상처를 입었다면? 혹여나 목숨…… 목숨이라도 잃는다면. 그렇다면 난……”
자카리는 약간 말을 더듬거렸다. 마르텔 경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누가 보아도 지금 그는 명백히 이 성을 잃었다. 자카리의 창백한 얼굴이 불안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공작 부인께서는 각하의 역린이시니까……’
하지만 공작 부인을 찾기 위해선 냉철한 이성을 유지해야 한다. 마르텔 경은 냉랭하게 말했다.
“외람되오나 각하, 안주인 마님께서는 그들에게도 소중한 인질일 것 입니다.”
그 말에 자카리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불안해 보이던 푸른 시선이 다소나 마 빛을 되찾았다.
“그리고 각하께서도 아마 잘 알고 계시겠지요.”
“……마르텔 경.”
“각하께서 이성을 잃으시면 안주인 마님을 찾아낼 확률이 더욱 줄어듭니다.”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자카리가 두 눈을 깜박였다. 약간의 이성은 되찾은 것 같았다.
시선 안쪽의 타오르던 불이 다소 가라앉는 그 모습에, 마르텔 경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주인 마님을 빨리 찾아내기 위해서는, 공작 각하께서 이성을 찾으셔야 합니다.”
“……그래.”
“기사들과 병사들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지휘하셔야, 마님을 발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귀담아듣던 자카리가 입술을 세게 짓씹었다.
그러나 맞는 말이라고 여겼는지 반박하진 않는다.
주군의 입술에 맺힌 핏방울을 안타까이 응시하던 마르텔 경은 곧장 말을 이었다.
“그러니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공작 각하.”
“어떻게 수색해야 가장 빠르게 그 분을 찾아낼 수 있을지, 각하께서 해답을 주십시오.”
“……”
마르텔 경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카리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 시선이 짧게 흔들렸다.
“저희는 각하의 손과 발이며 검이니, 안주인 마님을 모셔 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짧게 고민하던 자카리가 두 눈을 꽉 감은 후, 입술을 열었다.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지독하게 낮았으나, 적어도 아까 전처럼 타오르는 감정 에 휘말려 감정적이진 않았다.
“현재 수색 인원들을 셋으로 나누도록 하겠네.”
그 말을 듣던 마르텔 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의 냉철한 주군으로 돌아온 것이다.
“첫 번째 분대는 마르텔 경이 직접 지휘하도록 하게. 분대원들을 넓게 산개 시켜 찾도록 해.”
“알겠습니다.”
“두 번째 분대는 숲의 외곽으로 돌 려보내도록 해. 숲의 밤은 어둡지. 혹시나 납치범들이 이엘리를 끌고 숲 밖으로 도망치려고 할 수도 있네. 그들을 놓치지 않도록 경계를 바짝 세워.”
“명령 전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분대는 내가 직접 지휘하겠어.”
자카리의 목소리 끝이 차갑게 가라 앉았다.
잠시 고민하는 것 같던 그가 빠르 게 말을 이었다.
“이엘리를 찾아내면 어디서든지 확 인할 수 있도록 신호탄을 올리도록 하게.”
신호탄이라. 마르텔 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생각을 정리한 자카리가 그대로 설명을 했다.
“그녀가 안전하다면 푸른색, 위험 한 상태일 때는 붉은 신호탄을 쏘는 걸로 하지. 그 색에 따라서 성과 수
색 인원들 각자 대비하도록. 붉은색 일 때는 급한 치료를 할 준비를 해 두게.”
“따르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마르텔 경이 빠르게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저 멀리서 분대를 지휘하는 목소리 가 울린다.
홀로 남겨진 자카리는 문득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꼴사납게 떨리고 있었다.
‘너를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두려워서 견딜 수가 없어.’
자카리는 손안에 얼굴을 파묻었다. 제발, 안전하게만 있어 줘. 네가 어디에 있든 꼭 찾아낼게. 다시는 널 혼자 두지 않을게…….
호흡이 불규칙하게 흐트러진다. 두려워 견딜 수가 없다.
“……”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던 자카리는 이윽고 손을 내렸다.
새파랗게 날이 선 눈동자가 빽빽한 어둠을 휘돌아본다.
말에 박차를 가한 자카리는 병력을 이끌고 한쪽 방향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북부의 가을밤은 무척 차가웠다. 흰 입김이 부옇게 뿜어져 나와 시야를 어지럽힌다.
이엘리가 정상적인 상태라 해도 이런 추위에 계속해서 노출되어서 좋을 리 없다는 생각이 들자, 자카리는 다시 한 번 마음이 초조해졌다.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던 그가 분노로 어금니를 물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다니, 내 자신이 한심해서 죽을 것 같아.’
헤센바이츠의 후계로서 자카리는 검을 휘두르지 않은 적이 없었다.
실제로 소규모 전투에 차출되어 부 대를 이끌고 싸운 적도 다수였다.
괴물이라 매도되며 스스로를 갈고 닦으며 흘려보낸 그 시간들, 이엘리가 있어 견딜 수 있었던 시간들.
그에게 삶의 의미란 이엘리 단 한 명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게 도대체 무슨 소용 이란 말이야?’
이엘리에 의지하여 버텨 냈던 시간 들.
그녀가 제게 건네주었던 엄청난 애 정의 단 일부도, 그는 되돌려 주지 못했다.
자카리가 가진 모든 건 지금 이 순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소중한 사람 하나도 찾아내지 못하는데, 황가와 비견되는 유일한 대공 가의 이름 따위 무슨 쓸모가 있을
까.
‘그 이름을 위해 이엘리는 수많은 것들을 희생했어야 했는데.’
말고삐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 손 등의 뼈가 새하얗게 도드라졌다.
자카리는 깊게 고개를 숙였다. 스스로가 한심해 견딜 수 없다.
자책이 쌓여 다시 한 번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든다.
이대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그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겠다며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기분이 되었을
때……
“……저건?”
저 멀리서 계절과 맞지 않는 꽃들이 화려하게 피어올랐다.
무르익은 가을 속에서 점차 잎새를 떨구는 나무들 사이로, 분홍색 아샤꽃잎들이 눈부시게 흩날렸다.
자카리는 눈을 크게 치떴다.
“이엔?”
하얀 달빛 아래에서 분홍색 꽃눈처럼 쏟아지는 꽃잎들이 눈이 부셨다.
선명한 가을 안, 홀로 피어난 봄 꽃. 찬란한 봄이 선연했다.
울창한 숲의 한 부분이 순식간에 연한 분홍으로 물든다.
‘자카리, 난 여기 있어.’
마치 그렇게 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꽃잎들은 하늘하늘 흩날렸다.
자카리 뒤에서 있던 기사들은, 눈 앞에서 벌어진 기적을 바라보며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들이 서로에게 조그맣게 속삭인 다.
“아, 아샤꽃……?”
“하지만 지금은 가을인데……”
그리고 자카리는 확신했다. 이엘리.
그녀가 저곳에 있었다.
그녀가 자카리를 부르고 있었다.
‘이엔.’
한시바삐 찾아와 달라는 것처럼 꽃 잎은 살랑거린다.
자카리는 홀린 듯이 말고삐를 잡아 챘다.
“저쪽으로 간다!”
“명 받들겠습니다, 각하!”
기사들이 우렁차게 외쳤다. 자카리를 필두로, 헤센바이츠의 기사들은 숲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이엘리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자 리에서 있었다.
그녀의 입술에서 놀란 음성이 흘러 나왔다.
“돼, 됐어……”
까만 밤하늘 아래, 달빛을 머금어 하얗게 보이는 꽃잎들이 활짝 피어나 있었다.
화려하게 흩날리는 그 꽃잎들을 바라보며 그녀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세상에. 내가 정말로 성공한 건가?
‘어떻게든 해내고 싶다고는 생각했 지만, 실제로 가능할 줄은 몰랐는 데.’
꽃잎들이 하나둘씩 떨어졌다. 납치 되어있은 상황과 다르게, 달빛에 젖어 있은 아샤꽃송이들은 낭만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평온한 이엘리와 별개로 납치범들의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아샤꽃이 피었다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지금은 가을이지 않습니까!”
한편 주변을 경계하던 납치범들은 온통 혼란에 빠져 있었다.
아득 이를 악문 남자가 탑 위로 미친둣이 뛰어 올라갔다.
광! 방문이 열렸다. 이엘리는 표정을 정돈하고 남자를 돌아보았다.
“공작 부인, 당신!”
“무슨 일인가?”
최대한 태연하게. 흔들리지 말자. 마음을 가다듬은 그녀는 차분한 어 조로 남자에게 되물었다.
“저 꽃들, 도대체 무슨 조화입니까!”
“그걸 내게 와서 물으면 어떡하 나?”
이엘리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남자에게 되물었다.
남자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정말로 공작 부인과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내가 무엇을 했다는 말인가?”
이엘리는 여전히 차분한 얼굴이었다. 사실 그도 그랬다.
그녀가 무슨 힘이 있어 계절에도 맞지 않는 꽃을 피워 낼 수 있단 말인가. 이엘리 자신도 제가 다루는 힘이 어떤 건지 모르는데.
“젠장.”
아드득,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분한 마음을 억누르려 숨을 들이쉰 남자가 말을 씹어뱉었다.
“하긴, 이제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일어나십시오.”
“일어나라니?”
“젠장, 이동해야 한단 말입니다!”
아까 전의 능글거리던 태도는 모조리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남자는 이엘리에게 언성을 높였다.
“저 빌어먹을 꽃들 때문에 우리의 위치가 발각되게 생겼지 않습니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엘리는 내심 고소한 기분이 들었다.
아까 전부터 날 손안에 든 쥐처럼 대하더니, 이제 좀 초조해졌나 보지?
씩씩거리던 남자는 이엘리를 거칠 게 자리에서 일으켰다.
“나갑시다.”
“나간다니, 이 밤에?”
“당연히 어둠을 틈타 도망쳐야지요.”
남자는 굉장히 초조해 보였다. 사실 공작 부인을 납치한 것 자체가 위험부담이 상당한 일이었다.
* * *
겨울의 마법을 지닌 헤센바이츠 공작이 유일하게 집착하는 대상이 바 로 그녀 아니었던가.
‘만약 붙잡히기라도 하면……’
정말로 목숨을 내놓을 각오를 해야 한다. 남자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나 이엘리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남자를 응시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삐딱하기만 하다.
“내가 그것에 왜 협조해야 하지?”
비협조적인 태도에 남자는 와락 얼굴을 구겼다.
남자가 잇새로 협박 섞인 말을 씹어 뱉었다.
“이번에도 잠드신 채 들려 나가고 싶지는 않으시겠지요.”
“신사답지 못하군. 하긴, 납치범이 다들 그러려나.”
이엘리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더 말하지는 않고 순순히 몸을 일으킨다.
드레스 속주머니에 넣어 둔 황동 단추의 감촉이 선명하다.
지금 상황에서는 저 남자 말대로 따라 주는 편이 나았다.
“좋아. 가자고.”
“……”
이엘리의 순순한 태도에 남자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의심스러운 기색을 버리지 못하며 말한다.
“아까 전처럼 중간에 도망치려고 한다거나, 그러시면 안 됩니다.”
“보장은 못 하겠네. 하지만 기절한 나를 떠메고 이동하는 것도 힘들지 않겠나?”
이엘리는 뚱한 얼굴이 되어 남자를 마주 본다.
정곡을 찔렸는지, 남자가 끙 앓는 소리를 냈다.
“게다가 당신들, 아까 마차도 버리지 않았나.”
“……그건 또 어떻게 알았습니까?”
“왜, 탑 밖을 바라보는 것도 금지된 일이었었나? 그럴 거면 창문을 닫아 두지 그랬나?”
이엘리는 싸늘한 어조로 빈정거렸다. 그녀의 속도 남자 못지않게 불편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나도 아프거나 다치는 건 싫으니까…… 우선은 따라 주 지.”
그녀가 협조적으로 나오는 게 의심스러웠는지, 남자는 이엘리를 빤히 보았다. 그녀가 재차 물었다.
“그래서 안 나가나?”
“아닙니다. 다만 손목은 묶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엘리는 남자를 째릿 노려보았다. 하지만 남자는 완고했다.
남자가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최소한의 안전조치입니다. 아까 전에도 도망치신다며 난리를 치시지 않았습니까.”
“……좋네.”
결국 양손을 든 쪽은 이엘리였다.
단추를 빼앗기 위해 한 일이었지 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양손을 내밀었다. 남자는 부드러운 손수건 하나를 꺼내 능숙 하게 손목에 매듭을 짓는다.
“이리 오십시오.”
남자는 이엘리를 데리고 밖으로 나 갔다.
밖으로 빠져나가던 이엘리는 문득 숲을 둘러보았다.
남부보다 훨씬 차가운 북부의 가을속, 홀로 봄을 만끽한 분홍색 아샤꽃가지가 아름다웠다.
“말에 오르시기 좀 어려울 테니, 제가 도와 드리지요.”
남자가 이엘리를 부축하려 했다. 이엘리는 주춤 뒤로 물러났다. 생리 적인 거부감이 든 탓이다.
“……”협조하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건 맞지만, 그래도 저 남자와 저 런 친밀한 신체 접촉까지 예상한 것 은 아니었는데.
이엘리는 미간을 좁혔다.
‘지금이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기 회일지도 몰라.’
내내 탑 안에 갇혀 있었을 때보다는, 그나마 도망칠 수 있는 수단이 있는 지금이 더 낫지 않을까.
숨을 삼킨 이엘리는 우선 말 위에 올라탄 후, 묶인 양 손목을 흔들어 보였다.
단단하게 묶인 손목은 풀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런 이엘리를 보며 남자는 미간을 좁혔다.
“쓸데없는 생각 마십시오.”
남자는 경고하듯 이엘리에게 말했다. 그와 동시에 남자는 자신 또한 말 위에 올라타려 했다.
순간 이엘리는 결심했다.
‘도망치자!’
결심과 행동은 동시에 이루어졌다.
말 위에 납작 엎드려 갈기를 움켜 쥔 이엘리가 말의 배를 있는 힘껏 박찼다.
히히힝!
느닷없는 발길질에 놀란 말이 미친 듯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깍!”
이엘리는 비명을 지르며 말에 답삭 매달렸다.
말고삐를 잡고 있을 때와 양손이 자유롭지 않을 때는 말에 매달리는 난이도 자체가 달랐다.
온몸이 미친 듯이 흔들려서, 당장 이라도 떨어질 것 같다.
이엘리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말에 매달렸다.
‘지금 붙잡힌다면, 계속 저들에게 끌려다니게 될 거야!’
그녀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저들의 손에서 벗어나, 자카리가 자신을 찾아올 때까지 숨어있기.
자카리를 생각하자 그녀의 코끝이 시큰해졌다.
자카리.
이엘리는 그 이름을 작게 읊조렸다.
그 이름만이 지금 이엘리에게 용기를 줄 수 있는 단 하나뿐인 주문이었다.
거세게 몰아치는 칼날 같은 바람이 윙윙거리며 귓속을 메우고, 말이 달 리는 서슬에 온몸이 흔들린다.
토할 것 같다. 그러나 버텨야만했다.
“저, 저 미친!”
뒤에 남겨진 남자가 멍하니 이엘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날카롭게 욕설을 내뱉은 남자가 쩌렁쩌렁 고함을 내질렀다.
“젠장, 인질이 도망치고 있어!”
“쫓아가!”
“놓치면 안 돼, 당장 잡으라고!”
남자들이 각자 말을 잡아타고 이엘리를 따라붙기 시작했다.
이엘리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더 이상 말의 속도를 올릴 수는 없었다.
사실 그녀는 지금, 말에 달라 붙어있은 것 자체가 한계였다.
“꺄아악!”
그때 이엘리의 입술에서 찢어질 것 같은 비명이 울려 퍼졌다.
숲을 질주하던 말이 나무뿌리에 발을 차인 것이다.
말이 몸을 뒤채며 날뛰었고, 이엘리의 몸 또한 허공으로 붕 떴다.
“젠장!”
욕설을 짓씹어 뱉은 남자가 말에서 몸을 일으켜 이엘리를 낚아챘다. 이엘리는 소중한 인질이었다.
만약 그녀가 여기서 다친다면 그들에게 명령을 내린 ‘귀하신 분’이 진노하실 게 분명했다.
‘귀하신 분’의 진노를 받아 내느니, 차라리 그녀를 구하며 제 몸이 상하는 편이 낫다.
“큭!”
남자가 이엘리를 받아 안은 채 바닥에 굴렀다.
광! 등 뒤로 커다란 충격이 밀어닥쳤다.
작게 신음한 남자가, 두 눈을 부릅 뜬 채 이엘리를 쏘아보았다.
험악한 기세로 그녀를 붙들며 언성을 높인다.
“당신, 도망치지 않는다더니……!”
“그 손 놔.”
그런데 그때.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얼음으로 빚은 양 차가웠다.
순간 그 자리의 사람들은 모조리 얼어붙었다.
이엘리만이 화색이 되어서 등 뒤를 돌아보았다.
“자카리!”
자카리를 바라보던 이엘리는 헛숨을 삼켰다.
자카리의 새파란 눈동자가 형형하게 불타오른다.
‘아, 어쩌지?’
지금의 자카리는 완벽히 이성을 잃은 모습이었다.
이엘리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대로 자카리가 성큼 한 걸음 다가섰다.
하얀 은발 아래의 차가운 시선이 푸른 불길처럼 일렁거렸다. 누구도 자카리를 말리지 못했다.
자카리의 등 뒤에 선 기사들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이엘리조차도.
“그 손 놓으라고 했어.”
그렇게 말한 그가 가볍게 손을 휘 저었다.
그 순간 이엘리를 붙들었던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악!”
짧은 비명과 함께 남자의 손목이 날카롭게 잘려 나갔다.
붉게 터져 나온 핏줄기들이 이엘리의 몸 위로 우수수 쏟아진다.
뺨을 스치는 핏방울의 감촉이 너무 뜨겁다. 그녀는 헛숨을 삼켰다.
“아아아악!”
양 손목을 잃어버린 남자가 바닥을 뒹굴며 미친 듯이 비명을 질렀다.
사위는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고요했다.
남자가 목이 터져라 내지르는 처절 한 비명만이 쩌렁쩌렁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아악, 내 손목, 내 손……!”
삽시간에 내려간 기온을 느끼며 이엘리는 어깨를 떨었다.
기분 탓이 아니라 실제로 기온이 내려간 것이다.
훈김이 끼치던 핏자국과 핏덩이들은 어느새 차갑게 얼어 붉은 얼음이 되었다.
“자, 자카리.”
“……이엔.”
그 부름에 자카리는 천천히 이엘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망가진 인형처럼 삐거덕거리는 동작이었다. 이윽고 자카리가 웃었다.
눈앞의 잔혹한 광경과는 한참 거리 가 먼, 화사한 미소였다.
“미안해. 눈을 감으라는 말을 먼저 했어야 하는데.”
“저기, 너……”
이엘리는 부들부들 몸을 떨면서 자카리를 바라보았다.
자카리는 약간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네가 보기엔 너무 잔인한 모습이지.”
그게 아니잖아. 이엘리는 처음으로 자카리에게 이질감을 느꼈다. 자카리는 곧 시선을 돌렸다.
“이엔, 미안하지만 눈을 좀 감아 줄래?”
이엘리를 바라보며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던 푸른 눈동자.
하지만 그 눈동자는, 손목이 잘린 채 바닥에 나뒹구는 남자를 볼 때는 단 하나의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치 사람이 달라진 것 같은 싸한 느낌이었다.
자카리는 한 발을 내디뎠다. 빠직, 발밑에 얼음 얼어붙는 소리가 들렸다.
“네게는 이런 모습은 보여 주고 싶지 않거든.”
“그, 잠시만…… 진정해. 응?”
“진정?”
자카리가 비스듬히 시선을 기울였다. 텅 빈 눈동자.
새파란 그 눈동자를 보면서, 이엘리는 목을 조이는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처음이었다. 제 남편을 바라보면서 이런 공포를 느낀 적은.
“네가 이런 일을 당했는데 진정할 수 있을 리 없잖아.”
“하, 하지만……”
“제발, 이엔.”
자카리의 목소리가 툭 끊겼다. 그가 그대로 눈을 내리깔았다.
긴 속눈썹 그늘 아래, 새파란 눈동자가 반나마 감춰진다.
이엘리는 숨을 삼켰다. 그녀를 향 한 자카리의 목소리는 나긋하기만 했다.
“내가 너에게…… 보여 줘서는 안 될 모습을 보이게 하지 말아 줘.”
이엘리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렇게 말한 자카리가 저벅저벅 걸 음을 옮겼다.
그 누구도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이엘리의 앞에 다가선 자카리는 손을 뻗어 그녀의 뺨에 된 핏방울을 문질러 닦아 주었다.
그의 손가락은 무척 따스했음에도 이상하게 이엘리는 한기를 느꼈다.
“눈, 감아 줄래?”
그렇게 말한 자카리가 생긋 눈웃음을 쳤다.
압도적인 공포가 이 자리의 모든 사람을 억누르고 있었다. 아예 종족이 다른 존재인 것 같았다.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감.
기사들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이엘리를 납치한 납치범들마저 오금이 저려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테니까.”
그렇게 말한 자카리가 손을 까닥 들어 올렸다.
새하얀 얼음 창날이 창백한 달빛을 머금어 반들거린다.
얼음 창날은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남자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
이엘리의 눈이 커졌다.
“아, 안 돼!”
이엘리는 반사적으로 자카리의 손을 잡았다.
자카리가 흘끗 시선을 돌려 그녀를 돌아본다.
“이엔?”
“……싫어, 그러지 마!”
이엘리는 마구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카리의 푸른 눈동자가 이엘리를 담은 채로 가늘어졌다.
“무슨 소리야? 이 벌레만도 못한 버러지는 너를 납치했어.”
그렇게 답한 자카리가 망설임 없이 제 발을 내디뎠다.
그가 남자의 잘린 손목을 지그시 짓밟는다.
“아아악!”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자카리는 그 노래를 감미로운 음악처럼 귀담아들었다.
처음이었다, 이런 해방감은. 온몸을 저릿하게 하는 감각.
어째서 난 이런 강대한 힘을 가졌 으면서도 지금껏 나 스스로를 억누르기만 했을까.
만물은 제 발밑에 엎드려 자신을 경배해야 마땅했다.
‘그 누구도 나에게 범접할 수 없을 거야.’
또한 이엘리가 곁에 있었다. 그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
그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필요한 건 이엘리뿐이다.
이대로 모든 것을 없애 버리고, 그녀와 단둘이 살아가는 세계는 어떨 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