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17. 경계에 서서 (2)
자카리가 제 아내의 실종 소식을 듣게 됐던 때는 이엘리가 사라진 이튿날 아침이었다.
공작성에서 급파된 사람이 밤새 말을 달려, 마수 토벌을 진행하는 북쪽 설원으로 향했던 것이다.
‘얼른 돌아가고 싶어.’
토벌 계획을 정리하던 자카리는 문득 아내를 떠올렸다.
지금쯤 이엘리는 무엇을 하고 있을 까.
‘이엔.’
자카리는 버릇처럼 크라바트 장식 핀을 손안에서 굴렸다.
장식 핀이 빛을 반사해 반짝, 빛났다.
저번 풍어제 때, 이엘리가 선물로 준 그 물건이었다. 그때의 이엘리가 무어라고 했었더라.
‘내가 만약 네 곁에 없다고 해도, 나 대신 그게 널 지켜 줄 거야.’
왜 갑자기 그 말이 생각이 나는지.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느낌이다. 자카리는 미간을 좁혔다.
‘기사들을 좀 조여서라도 빨리 마수 토벌을 마쳐야겠어.’
기사들이 들으면 기겁했겠지만, 자카리는 얼른 일정을 마치고 돌아가 기로 마음먹었다.
그 정도로 그는 당장이라도 이엘리가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공작 각하, 공작성에서 사람이 도착했습니다.”
그때 심각한 얼굴이 된 기사단장이 자카리를 찾아와 보고를 올렸고, 자카리는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공작성에서 왜 사람을 보내오는 거지? 게다가 고작 이런 사안에 기사단장이 찾아와?
“들이게.”
자카리는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한 남자가 구르듯이 달려와 자카리 앞에 멈췄다.
“무슨 일인가?”
그렇게 물은 자카리는 남자가 깊게 숙인 고개를 들어 올리자마자 무언 가가 잘못되었음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창백한 얼굴과 파리하게 질린 표정. 자카리는 목소리를 높였다.
“왜 그런 얼굴이지?”
“고,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소식을 전하는 남자의 얼굴은 절망 감에 가득 차 있었다.
자카리는 다급하게 남자를 채근했다.
“인사는 됐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여기까지 찾아온 건가?”
“……아, 안주인 마님께서.”
남자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자카리는 심장을 할퀴는 불안을 느꼈다. 그는 입술을 짓씹었다.
“제대로 말하게,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자카리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어찌할 바 모르던 남자가 덜덜 떨며 고개를 숙였다.
띄엄띄엄 이어지는 말을 그는 신경을 곤두세워 들었다.
이어지는 말들은 칼날이 되어 그의 가슴 깊은 곳을 베었다.
“납치되셨습니다.”
“……누가?”
“아, 안주인 마님께서 납치를……”
쾅! 자카리는 순간 테이블을 세게 내리쳤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자카리가 말을 내뱉었다.
“말을 준비해.”
“알겠습니다.”
기사단장이 잽싸게 대답했다. 주군에게 있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존재는 바로 안주인 마님이었다.
마수 토벌 따위에 신경을 쏟을 여력이 없었다.
기사단장은 빠르게 밖으로 뛰어나 갔다.
“그래서 누가 감히 헤센바이츠의 안주인을 납치했지?”
“저,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추측 하기로는 야만족들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지만……”
“야만족들이 이엘리를 납치해?”
자카리의 새파란 눈동자가 잘 갈린 칼날처럼 빛났다.
고개를 가로저은 그는 확고하게 말했다.
“그럴 리 없어.”
“공작 각하?”
“지금껏 온건 정책을 펼친 이유가 무엇인지 아나?”
자카리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었다. 그대로 주먹을 꽉 말아 쥔다.
“모두 내 아내에게 위협이 될 요소를 지우기 위해서였어.”
“각하.”
“그런 상황에서 야만족들이 이엘리를 납치할 이유가 없지. 젠장!”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던 자카리는 결국 거칠게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안 된다, 침착함을 유지해야만 해. 그가 숨을 삼켰다. 하지만 그녀를 잃어버렸는데 어떻게 침착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지금, 이엘리가 누구인 지도 모르는 납치범들에게 붙들려 있다는 소리잖아!"
저도 모르게 고함을 지른 자카리가 제 이마를 감싸 쥐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엘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강렬한 공포.
마치 살아 있는 짐승처럼 자카리의 뒷덜미를 물어뜯는다.
‘이엔.’
자카리는 온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나의 이엔. 네가 내게 미소 지어 주는 모습을 나는 봐야 해. 괜찮다고 말해 줘야만 해. 너의 체온이 예전과 똑같이 따스하다는 것을 알려 줘야만 해.
‘그렇지 않으면……”
만약 너를 잃어버린다면? 그 상상 만으로도 자카리는 절망 속에 굴러 떨어지는 기분을 맛보아야만했다.
이를 악문 자카리가 자신의 검을 꽉 움켜쥔 후, 그대로 막사 밖으로 뛰쳐나갔다.
북부, 그중에서도 헤센바이츠 공작가가 배출해 온 기사들은 대대로 제국 내에서 이름이 높았다.
그런 기사들이 흉험한 기세로 북부 전체를 틀어막았다.
북부의 귀족들은 느닷없이 공작가가 내린 봉쇄령에 깜짝 놀랐지만, 헤센바이츠의 안주인이 실종되었다는 사실에 두 배로 놀랐다.
“이번 일에 반기를 든다면, 그 또 한 같은 죄로 치죄하겠다.”
평소 얼음으로 빚은 사람인 양 냉 철한 공작은 거의 미친 사람처럼 굴었었다.
하나 북부의 모든 사람은 공작을 이해했다.
헤센바이츠 공작에게 공작 부인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모르는 이는 없었다.
사실 공작 부인은 북부 귀족들에게 도 중요했다. 유일하게 막 나가는 공작의 고삐를 월 수 있는 존재였으 니.
“공작가가 전 병력을 풀어서 북부를 수색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한시바삐 찾으셨으면 좋겠는데요.”
“맞아요. 공작 부인께서 계시지 않으면 공작께서 어떻게 행동하실지……”
귀족들이 공작가의 눈치만 살피고 있던 와중, 로렌 백작 영애는 초조 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니?”
같이 식사를 하던 백작 부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자, 화들짝 놀 란 백작 영애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백작 영애는 애써 태연한 목소리를 내어 부모님에게 답했다.
“아, 아니예요.”
“정말로 괜찮니? 안색이 좋지 않아.”
“네, 정말로 괜찮아요.”
백작 영애는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 부인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는 화제를 바꾼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건 그렇고 헤센바이츠 공작 부인이 실종되었다면서?”
“……그런가요?”
백작 영애는 억눌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애써 침착한 척하고 있었지만, 무릎에 얹은 손은 초조함에 못 이겨 드레스 자락을 마구 쥐어뜯고 있는 채였다.
보다 못한 부인이 입을 열었다.
“너 정말 표정이 안 좋아. 들어가 서 좀 쉬렴.”
고개를 끄덕인 백작 영애는 자리에 서 일어났다.
백작 부부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녀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차마 부모님의 눈치를 살필 여유도 없었던 그녀는 방문을 광 닫았다.
“어, 어떡하지..?”
백작 영애는 숨을 헐떡였다. 입술 은 어찌나 잘근거렸는지 너덜거렸 고, 입 안에서는 피 맛이 돌았다.
“도대체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한 거지?”
그녀가 머리를 감싸고 자리에 주저 앉았다.
무서웠다. 무서워서 죽을 것만 같았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이 일을 저 질렀다.
그녀가 제정신을 차린 후에는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어있었다.
“이, 이렇게까지 진행될 줄은 몰랐 단 말이야.”
게다가 가장 두려운 건, 자신이 어째서 그런 행동을 저질렀는지도 이 유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갑자기 어느 순간 공작 부인에 대한 분노가 확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누, 누구를 만났던 것도 같은데.”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어 보았으 나 누군가를 만났는지에 대해서는 기억이 희미했다.
다만 그 사람이 무척 다정하게 그녀의 감정에 공감해 주고, 그녀를 살살 부추겼다는 것만 기억났다.
“누가 나 좀 도와줘……”
이제 그녀의 힘으론 일을 수습할 수도 없게 되어 버렸다.
백작 영애는 덜덜 온몸을 떨었다.
영애의 눈동자에 공포가 가득 찼다.
마음에 들지 않는 남부의 촌뜨기 계집애를 납치하며, ‘한번 당해 봐 라’라고 생각할 수 있는 때는 이미 지났다.
지금 자신이 저지른 짓은 명확했다. 북부의 지배자인 헤센바이츠 공작이 유일하게 사랑하고 아끼는 ‘공작의 부인’을 자신이 납치한 것이다.
“……난 그저 아주 조금만 겁을 주려고 했을 뿐인데!”
백작 영애는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어찌나 세게 깨물었는지, 곱게 다듬었던 손톱이 엉망이 되며 피가 배 어 나왔다.
하지만 초조함과 공포에 질린 그녀는 고통조차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할 수도 없잖아.”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이런 엄청난 비밀을 간직한 채, 저 혼자 침묵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
“이 일이 밝혀진다면, 우리 가문은 정말로 멸문할지도 몰라……”
앞일이 훤하게 그려진다. 영애는 두 눈을 꽉 감았다.
공포에 질린 그녀가 몸을 둥글게 말았다.
* * *
공작을 필두로, 공작가에서도 최정 예로 손꼽히는 기사들은 모조리 모여 그들의 안주인 마님을 찾기 시작했다.
이 잡듯이 북부를 뒤지다 못해, 가끔은 허락을 구하지도 않고 가신들의 영지를 침입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항의를 하는 귀족가는 없었다. 다만 숨을 죽이고 있을 뿐이었다.
‘이엔, 제발 무사하기만 해.’
자카리는 무섭게 굳은 얼굴이 되어 빌고 또 빌었다.
말고삐를 쥔 손등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네가 없으면 난 정말로 죽을지도 몰라.’
마르텔 경은 초조한 표정의 자카리를 슬쩍 곁눈질했다.
마르텔 경은 헤센바이츠 공작가의 기사단장이자 자카리의 어릴 적 스승으로, 전대 공작 또한 굉장히 신 뢰하던 사람이었다.
‘저렇게 무너지시다니…… 하긴, 납치되신 분이 공작 부인이시니 어 찌 보면 당연하지만.’
헤센바이츠의 새로운 공작은, 제가 가진 권리만큼이나 짊어져야 하는 큰 책임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괴물로 배척 받던 기나긴 시간은 공작을 얼음을 깎아 만든 칼날처럼 예리하게 만들었다.
그런 자카리를 유일하게 다독여서 부드럽게 만들어 주던 사람이 바로 이엘리였다.
‘한시바삐 안주인 마님을 찾아야 할 텐데.’
마르텔 경은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자카리는 이제 싸늘한 표정으로 전 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빙하처럼 차가운 푸른 눈동자가 어 둠에 묻힌 숲을 노려본다.
수색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진행되었다.
병사들이 손에 갈라 쥔 횃불들이 진득하게 고인 어둠을 밀어내며 일렁거렸다.
‘이엘리, 제발. 너 어디에 있어?’
자카리는 누군가가 제 목을 조르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숨이 막힌다.
그녀가 곁에 없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렇게 사람이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든다니.
그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물었다.
“……제발, 이엔.”
애써 마음을 가다듬던 자카리였으 나, 조그만 애원이 입술 밖으로 흘러나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마르텔 경은 그런 자카리를 보며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 심정이 어떨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
‘……저런 표정을 지으실 때는 전대 공작 각하께서 세상을 떠날 때 뿐이었는데.’
마르텔 경은 전대 공작이 느닷없이 세상을 떠났을 때의 자카리의 공허 한 얼굴을 기억했다.
지금의 자카리는 그 당시보다도 더 욱 고통스러워 보였다.
자카리가 고개를 꺾으며 중얼거렸다.
“너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