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야만족들이 저지른 짓이라고 주장 하면 그만일 테니까.
그들의 죗값을 무사히 치르게 하려 면 증거가 필요하다.
‘그러고 보니 저 단추……’
그러던 중, 이엘리는 남자의 옷소매에 달린 단추 하나를 눈여겨보았다.
이엘리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정교한 돋움 장식이 새겨져 있는 황동 단추였다.
그 자리에 도사린 그녀는 생각했다.
‘증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만약 이엘리가 무사히 구출된다 해 도 저들이 도망치면 소용없지 않나.
증거품은 하나 정도 남겨 두는 게 여러모로 좋을 것이다.
얌전하게 걸음을 옮기던 그녀의 시선이 순간 날카롭게 빛났다.
이엘리가 반대편으로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마른 풀잎들이 바삭거리며 짓밟혔다.
“무, 뭐야!”
“도망치잖아, 잡아!”
“절대 놓쳐서는 안 돼!”
이엘리와 남자, 두 사람의 뒤를 따르던 두 명의 수하들이 날카롭게 언 성을 높였다.
아쉽게도 이엘리는 오래 도망치지는 못했다. 팔을 와락 붙들린 것이다. 이엘리는 거세게 몸부림을 쳤다.
“이것 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은 공작 부 인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유들유들하게 대답한 남자가 이엘리를 확 끌어당겼다.
이엘리는 힘없이 남자의 쪽으로 끌려갔다.
무력감이 온몸을 가득 채운다. 이엘리는 불타오르는 연녹색 눈동자로 남자를 쏘아보았다.
“공작 부인.”
“……윽”
“해를 끼치지 않겠다는 말씀은……”
남자가 이엘리를 붙든 손에 힘을 주었다.
천천히 조여 오는 압박감에 이엘리는 낯을 구겼다.
“……얌전히, 그리고 조용히 계실 때에 한정한 겁니다.”
남자의 목소리가 얕게 으르렁거렸다.
이엘리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남자는 조그맣게 속삭였다.
“공작 부인께서는 이성적인 분이시 지요.”
남자의 시선에서는 두 가지의 감정이 느껴졌다.
지금의 상황을 재밌어하는 것, 그리고 약간은 짜증스럽고 귀찮아하는 것.
남자는 어린애를 달래기라도 하는 것처럼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어차피 도망치지 못하실 거라는 건 잘 알고 계셨으면서, 왜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하십니까?”
“이것 놔.”
“쓸데없는 짓으로 사람을 귀찮게 만들지 않으신다면, 놓아드리지요.”
이엘리는 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픽 웃은 남자가 움켜쥔 그녀의 팔을 탁 풀어 주었다.
“약속하신 겁니다.”
남자가 놀리듯 말했다.
남자가 어찌나 팔을 세게 쥐고 있었는지, 피가 통하지 않았던 팔에 그제야 피가 통하기 시작한다.
그 저릿한 감촉에 이엘리는 미간을 구기며 남자에게 쏘아붙인다.
“당신, 납치범들 사이에서 우두머리 노릇 하니까 좋아?”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지요. 어차피 전 높으신 분들의 뜻에나 따르는 입장이니까요.”
“우스운 사람이로군.”
이엘리는 부러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잠시 후, 흘끗 남자를 뒤돌아본 그녀가 입술을 연다.
“그래서 이 탑에 얌전히 갇혀 있으면 된다, 그건가?”
“그런 셈이지요.”
이엘리는 더 말하지 않고 탑에 올 탔다.
남자는 부러 정중한 태도를 꾸며 내어 고개를 숙였다.
“그럼 부디 편히 쉬시기를.”
“염치도 없군. 이따위 불편한 곳에 서, 얼굴도 보기 싫은 작자들과 함께 있으면서……”
새파랗게 날이 선 연녹색 눈동자가 남자를 쏘아보았다.
이엘리는 입술 끝을 비뚜름히 올렸다.
“편히 쉬기를 바란다니.”
쾅! 이엘리는 그대로 문을 닫아 버렸다.
남자는 닫힌 문을 빤히 바라보다 말고 씩 미소 지었다.
“확실히 매력적인 레이디이긴 하시 군.”
절세의 미인이라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그 성격까지 무척 매혹적이지 않나.
만약 저 레이디가 공작가의 안주인 이자 황제의 사랑을 받는 여인이 아니었더라면, 자신이 갖고 싶을 정도로.
“다들 내려가서 주변을 경계해.”
약간 아쉬운 얼굴이 된 남자가 수 하들에게 명령했다.
수하들이 황급히 몸을 돌려 뛰어나 간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자는 혀로 입술을 핥으며 뒤돌아섰다. 어쨌거나 재미있는 레이디였다.
이제 탑 안에는 그녀 혼자 남아 있었다. 온몸을 짓누르던 긴장감이 풀려 그녀는 비틀거렸다.
“후우.”
크게 한숨을 내쉰 이엘리가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래도 방 안은 조금 정돈되어있 긴 했지만, 오래된 탑 특유의 텁텁한 먼지 냄새가 났다.
이엘리는 꽉 닫혀 있는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어라, 열려 있네?”
나무 덧창을 밀어 열던 이엘리는 조금 놀란 얼굴이 되었다. 당연히 잠가 놓았을 줄 알았는데.
“……아아, 왜 열어 놨는지 알 것 도 같네.”
창밖을 내다본 이엘리는 허무한 표정이 된 채로 중얼거렸다. 탑의 높이는 상당했다.
적어도 이 높이에서 뛰어내린다면, 탈출하기 전에 팔이나 다리 하나쯤 은 부러뜨리고 남을 높이였다.
“젠장.”
고운 입술 사이로 숙녀답지 못한 욕설이 흘러나왔다.
폭 한숨을 내쉰 그녀가 짚을 넣은 딱딱한 침대 위로 털썩 주저앉았다.
피곤했다. 이엘리는 미간을 구기며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댔다.
“뭐, 사실 애초부터 도망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니까.”
그녀의 신체 조건으로는 저 남자들에게 무사히 도망칠 수 있는 가능성도 없거니와, 처음부터 그것을 노리 고 행동한 것도 아니었다. 그 대신……
“……”
이엘리는 꽉 움켜쥐고 있던 손바닥을 펼쳤다.
황동으로 만든 단추를 관찰하던 그녀의 눈동자가 싸늘해졌다.
“……백조의 문장이라.”
백조 문장은 로렌 백작가문의 상징이었다.
이번에 이엘리 자신이 황제를 맞이 한 연회에서 백조 요리를 내 오며 경고를 했으니, 그건 확실했다.
이엘리는 이전에 있었던 일들을 곱 씹었다.
“그러고 보면…… 로렌 백작 영애 가 별저에 들렀었어.”
이엘리와 황녀가 머무르고 있었던 별저는 공작성에서도 내부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 말은 곧, 위치를 알지 못하면 찾아오기 어렵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별저를 구경하고 싶다는 백작 영애의 그 말 자체가 그 들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면? 이엘리의 시선이 차게 얼어붙었다.
'하지만 그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에야, 납치극을 벌이면서 이런 단추 가 달린 옷을 입는다고?’
그 단추에 새겨진 문장은 명확했다. 로렌 백작가의 문장.
하지만 납치의 결과가 어떻게 끝날 지도 모르는데, 증거가 될지도 모르는 옷을 입힌 수하를 보내다니. 전 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마치 불의의 상황이 오면, 그들이 가진 소지품들이 증거가 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의심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던 이엘리는, 문득 아까 남자가 그녀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니, 굳이 따지자면 인질이 아니 라 전리품에 가까우려나요?’
‘……이런 앙칼진 점까지 높으신 분들께 매력적으로 보이는 걸까요?’
도대체 무슨 의미지.
‘전리품이라.’
이엘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단 어를 생각하면 항상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황제였다. 황제가 자카리에게 가진 묘한 열등감, 그리고 이엘리를 향한 소유욕.
'설마 황제가 로렌 백작가를 이용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모든 것이 들어맞는다. 심지어는 납치 후 이동하게 될 거라는 말까지도.
시간이 흐르고 사건이 조금 잠잠해 지면, 제도로 올라가 황제를 만난다 해석해도 무방할 것 같지 않나.
‘하지만 증거가 없어……’
이엘리는 푹 고개를 수그렸다. 손 안에 들린 단추가 그녀를 놀리기라도 하는 양 반짝거린다.
“……황동 단추라.”
이엘리는 작게 중얼거렸다.
애초에 야만족들은 이런 물건을 입수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황동은 제국의 특산품인 데다, 야 만족들은 황동을 세공할 수 있는 기술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야만족들의 주력 무기는 검이 아니라, 날카롭게 깎아 세공한 흑요석 창이었다.
“야만족들의 생활 방식조차 조사하지 않은 채 뒤집어씌우려 하다니, 안이하기는.”
이엘리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게다가 야만족들은 이엘리를 납치해도 아무런 이득을 얻지 못한다.
자카리가 공작 위를 계승한 이후부터 공작가는 야만족들에게 온건 정 책을 펴고 있었다.
‘온건 정책을 통해 얻게 된 이득이 상당한데, 야만족들이 그 관계를 깨뜨릴 리가 있나.’
한편 야만족에게 베푸는 온건 정책 이 불만스러운 쪽은 아마 황가일 것이다.
공작가는 대대로 북부의 마수들과 야만족들을 경계하는 방벽의 위치 아닌가.
야만족과 화친을 맺는다면 야만족을 방비하기 위해 사용되는 자원 또 한 줄어든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황제가 반길 리 없었다.
‘황제는 자카리와는 다르게, 즉위한 이후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 했으니까.’
두 사람이 여실히 비교되니 황제 입장에서는 초조할 만하다.
이엘리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게다가 공작성에는 안네로제 황녀님도 계셨어. 그리고 황제는 황녀 전하를 싫어하시지.’
만약에 황녀가 죽거나 다치기라도했다면, 황제는 정식으로 공작가에 문제 제기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이번 납치 사건으로 가장 큰 이득을 얻은 건 황제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눈꼴 시린 여동생도 정리하면서, 공작가의 잘못으로 모든 걸 떠밀어 버릴 수 있는 상황이라.’
이엘리는 어깨를 움츠렸다. 수많은 걱정들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다.
황녀는 다치지 않았을까. 공작성 은 무사할까.
그녀의 실종 때문에 다들 마음고생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리고…….
“……자카리.”
지금 이 순간, 자카리가 너무나 보 고 싶었다.
자카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 까. 초조해하고 있지는 않을까.
적어도 나 때문에 자카리가 걱정할 일은 만들지 않겠노라 결심했었는데……
“자카리.”
이엘리는 그 이름을 계속 읊조렸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다했다.
이제 섣불리 움직여서 납치범들의 의심을 사는 것보다는, 얌전히 자카리를 기다리는 편이 낫다는 걸 아는 데도.
‘그래도 분해.’
움켜쥔 주먹 안쪽으로 황동 단추가 손 안쪽을 아프게 찌른다.
어째서 난 이렇게 무력한 걸까. 정말로 자카리의 구조를 기다릴 수밖에 없나.
눈물이 날 것 같아, 그녀는 입술을 사리물었다.
“……아니야, 침착하자.”
한참 울음을 삼키던 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진정해. 호랑이 굴에 빠져도 정신 만 차리면 산다 했어.
그녀는 얼굴을 가린 손을 떼어 냈다. 눈물로 손가락 끝이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이대로 울고만 있을 수는 없어.”
제 눈물을 내려다보던 그녀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어떻게든 마음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내 실종 소식이 자카리에게 들어 갔다면, 분명 그도 날 찾고 있을 거야.”
그녀의 위치를 자카리에게 알릴 노력이라도 해야 한다.
황동 단추를 잘 챙겨 넣은 이엘리는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이대로 갇혀 있을 수만은 없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그러던 중 그녀는 문득 창밖을 내 다보았다.
그녀가 끌려온 탑 근처로, 하나둘 잎사귀를 떨어뜨리는 나무들이 빽빽 하게 자라 있었다.
그중 그녀는 익숙한 나무를 발견했다. 아샤 나무였다.
“그때 정원에서……”
가을의 정원에서 여름 장미를 피워 냈던 그때.
그 당시에 그녀가 느꼈던 감각이 찌르르하게 온몸을 스쳤다.
이엘리의 눈동자가 결연해졌다.
허리를 곧게 편 이엘리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할 수 있어.’
그때의 감각을 깨운다.
자카리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려야 했다.
그녀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