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이엘리는 황급히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순식간에 정신이 까마득하게 멀어 진다.
‘황녀 전하!’
마지막으로 이엘리가 본 것은 그녀를 향해 비열하게 웃고 있는 기사였다.
저 멀리 황녀가 이엘리의 이름을 외쳐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이엘리는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렸다.
새벽에 가까운 늦은 밤. 먹물처럼 까만 밤의 가장자리는 다가오는 새벽에 의해 푸르스름하게 물들어있
었다.
“이제야 전령 새가 도착했네.”
백작 영애는 손에 편지를 움켜쥔 채 즐거운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영애가 서 있는 장소는 전령 새가 오가는 탑 위였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귀족 영애가 있을 만한 장소는 아니기도 했다.
“공작 부인의 납치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라……”
눈엣가시였던 공작 부인을 드디어 치워 버렸다. 백작 영애는 마음껏 지금의 기쁨을 만끽했다.
‘꼴좋다, 속 시원해. 그러게 적당히 행동했어야지.’
그렇게 생각하던 백작 영애는 다시 한 번 위화감을 느꼈다.
나, 이렇게 행동해도 되는 걸까?
“……”
불안한 얼굴이 된 영애는 잠시 후, 벽에 걸린 햇불에 편지를 태워 버렸다.
이상하게 마음이 술렁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괜찮아, 난 복수를 하는 것 뿐인걸. 입술을 사려문 영애는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탑 안의 긴 계단을 휘청휘청 달려 내려가는 그 뒷모습은 무척 위태로 워 보였다.
덜컹덜컹. 몸이 제멋대로 흔들렸다. 마치 자갈이 깔린 길을 마차로 달리는 것만 같은 느낌.
‘여기는?’
이엘리는 두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시야가 온통 흐릿했다. 그나마 어슴푸레한 빛으로 간신히 주변을 구 분할 수는 있어 다행이었다.
그녀는 곧 자신이 갇혀 있는 곳이 마차 안임을 깨달았다.
“……아윽.”
몸을 일으키던 이엘리는 얕은 신음을 흘렸다.
머리가 광광 울렸다. 비틀거리며 자리에 주저앉은 그녀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마취제에 당했던 게 맞는 것 같다. 속이 울렁거린다.
‘세상에, 내가 살다 살다 마취제로 기절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납치까지 당해 보다니.’
전생의 삶까지 모두 통틀어도 정말 신선한 경험이었다.
너무 신선한 나머지 짜증이 났다.
‘이런 신선함은 경험하고 싶지 않았는데.’
이엘리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어떻게든 여기가 어딘지 위치를 살펴보려 했지만, 마차가 워낙 험하게 달리는 데다 문이 꽉 닫혀 있는 바 람에 밖을 내다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이런, 공작 부인이 드디어 정신을 차리셨나 본데.”
느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덜컹, 소리와 함께 마차가 멈췄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이었다.
비명을 지르려한 것은 아니었지 만, 마차가 급히 멈추는 바람에 등을 부딪친 이엘리는 짧은 신음을 삼켰다.
삐걱, 마차 문이 열린다. 아까 이엘리를 납치한 남자가 고개를 들이 밀었다.
“오, 드디어 깨어나셨네요.”
“당신들 누구야?”
이엘리는 날카롭게 물었다. 그러나 남자는 입술을 비죽이 올리며 미소를 지어 보일 따름이다.
“그냥 조용히 계십시오. 위해는 가 하지 않을 테니까요.”
“당신들이 누구인지 물었어.”
이엘리가 싸늘하게 다시 말했다.
이엘리를 빤히 바라보던 남자가 조 롱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저희는…… 글쎄요.”
남자의 눈동자가 이엘리의 얼굴을 위아래로 훑었다.
잠시 후, 남자는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북부에 떠도는 야만족이라고나 할 까요.”
“헛소리. 야만족들이 제도에서나 사용할 법한 제국 표준어를 사용하 나?”
이엘리의 차가운 질문에 남자는 다 시 한 번 싱긋 웃었다.
그 미소를 바라보며 이엘리는 문득 깨달았다.
실제로 자신들이 야만족인지 아닌 지는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을 것이었다. 다만…….
“야만족이라고 사람들에게 인지되는 것만이 중요하다, 그 소리군?”
이엘리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으나, 그 차분한 얼굴을 보며 이엘리는 제 말이 맞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엘리는 비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가 말을 내뱉었다.
“좋아, 그렇다면 질문을 바꾸지.”
그러자 남자는 흥미롭다는 얼굴을 했다.
이엘리가 입술을 잘근 깨물며 남자를 쏘아보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지?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는 건가?”
“이런, 제가 그것을 대답해 드릴 리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남자는 싱글싱글 기분 나쁜 미소만을 짓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다만 제가 약속드릴 수 있는 건, 조용히 계시면 해를 끼치지는 않겠다는 것뿐입니다.”
“……”
“내리시지요.”
남자는 정중한 동작으로 이엘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에스코트를 하는 신사의 동작이다. 그 동작까지 그녀를 놀리는 것 같아 기분 나빴다.
손을 노려보던 이엘리는 그 손을 탁 쳐 버렸다.
“공작 부인?”
“당신의 에스코트 따위 필요 없네, 혼자 내릴 수 있어.”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리긴 했지만 어쨌든 똑바로 설 수 있었다.
남자가 입을 열었다.
“아직 마취제의 효과가 남아 있어서 어지러우실 텐데요.”
“인질의 현기증까지 걱정해 주다니, 납치범 주제에 신사다운 척하고 있군.”
이엘리는 노골적으로 빈정거렸다. 남자는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농처럼 말을 덧붙였다.
“그거야 당신은 아주 중요한 인질 이니까요.”
“인질?”
“아니, 굳이 따지자면 인질이 아니 라 전리품에 가까우려나요?”
이건 도대체 무슨 소리? 이엘리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남자는 까딱 턱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하지만 우선 내리시는 게 가장 우 선일 것 같군요.”
이엘리는 미간을 좁히며 몸을 돌렸다.
픽 웃음을 흘린 남자는 꽤나 정중 한 척 마차의 문까지 열어 주었다.
자신이 도망칠 수 있으리 라고는 전 혀 생각도 하지 않는 그 얼굴이 그녀는 너무 분했다.
“하아.”
이엘리는 커다랗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긴 호흡을 내뱉었다.
오랫동안 마차에 갇혀 있다 밖으로 빠져나오니, 맑은 공기가 반가웠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이엘리가 이내 미간을 좁혔다.
“……여긴?”
인적이라곤 전혀 없는 곳에 버려진 탑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녀가 싸늘하게 말했다.
“도대체 이런 곳을 어떻게 찾아냈는지, 재주도 좋군.”
간신히 비를 피할 수 있을 정도의 규모였다.
아마 예전에는 주변을 경계하는 초소 역할을 했던 것 같은데, 사람들이 도시로 이동하며 버려진 것 같다.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불편하시겠지만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아마 여기에 오래 계시지는 않을 거거든요.”
“그게 무슨 소리지?”
“공작 부인께서는 이제 곧 다른 곳으로 이동하실 예정이시니까요.”
이엘리는 순간 바짝 어깨를 굳혔다.
그녀가 예리한 눈동자로 남자를 쏘아보며 차게 묻는다.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니?”
“물론 거절하실 권리는 없습니다.”
남자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이엘리가 입술을 비뚜름히 올린 후 말을 이었다.
“강제로 끌고 가겠다, 이 소리로군. 그렇다면 어디로 이동한다는 거지?”
“이번에도 제가 그 질문에 대답해 드릴 리 없지 않습니까.”
젠장, 느물거리기는. 이엘리는 입 안의 보드라운 살을 짓씹었다. 남자는 여상하게 입을 연다.
“사실 이 탑을 찾아낸 건 운이 좋았습니다.
어디에 공작 부인을 숨겨야 할지 고심했거든요.”
“……를 숨겨야 한다니, 그건 무슨 말인가?”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북부는 난리가 났거든요.”
남자는 보기 좋게 눈매를 접어 보였다.
양손을 들어 올린 남자가 보란 듯 어깨를 으쓱였다.
“공작 부인께서 실종되셨다고, 공작 각하께서 반미치광이가 됐다고 하시더군요.”
자카리가? 순간 이엘리의 두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그렇구나. 자카리가 날 찾고 있어…… 이엘리는 숨을 삼켰다.
안도감과 미안함이 동시에 들었다.
자카리는 지금 얼마나 걱정하고 있을까.
걱정하는 자카리에게 괜찮다 말한 건 나였는데.
남자는 이엘리를 빤히 응시하더니 말했다.
“그래서 북부 전체가 봉쇄되어 개 미 새끼 하나 빠져나갈 수 없는 판 국이니까요.”
“……내가 납치된 지 얼마나 되었지?”
“한 하루 정도 되었죠.”
고작 하루 만에 북부 봉쇄를 명령 하는 공작도 놀랍다며, 남자는 웃으며 너스레를 떨어 댔다.
“헤센바이츠 공작도 대단하지요, 공작 부인이 납치된 것을 알자마자 북부 봉쇄를 명령하다니.”
북부 봉쇄. 헤센바이츠 공작령은 물론이고, 공작령에 종속된 가신들의 영토까지 모두 출입 금지하는 조 치였다.
당연히 북부 전체에도 무리가 가는 그런 조치를 아무렇지도 않게 취하 다니.
“역시 공작 부인께서는 귀한 분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운명이신가 봅니다.”
귀한 분들의 사랑? 그 말에 스며 들어있은 묘한 느낌에 이엘리는 남자를 흘끗 돌아보았다.
하지만 남자는 더 이상 말할 생각 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정중한 척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여하튼, 그러니 당장은 공작 부인을 숨겨 두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엘리는 다시 한 번 그 손을 탁 쳐 냈다.
사나운 연녹색 눈동자가 남자를 똑 바로 노려보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내 몸에 함 부로 손대지 말게.”
“……이런 앙칼진 점까지 높으신 분들께 매력적으로 보이는 걸까요?”
남자는 얼얼한 손을 반대편 손으로 어루만지며 씩 웃었다.
그러고는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작 부인을 무사히 옮겨 가기 위해서, 시간을 번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군요.”
그나마 저 남자가 떠벌리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라 다행이었다.
사실 이엘리가 연약한 여성의 몸이 기에 얕잡아 보아 저러는 것이겠지만.
그녀는 분한 마음을 꾹꾹 누르면서 생각했다.
‘언젠가 이번 일은 꼭 갚아 주겠어.’
그렇게 생각하던 이엘리는 남자의 차림새에 문득 주목했다.
납치범의 말엔 신뢰도가 전혀 없다는 것은 무시하더라도, 야만족이라 고 스스로를 소개한 주제에 저런 옷차림을 하고 있다니.
‘저 남자, 옷차림 자체가 제국 복식이잖아.’
그녀를 납치한 사람은 총 세 명. 그중에서도 이엘리와 직접적으로 대 화하는 사람은 한 명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끈으로 조이는 특색 없는 옷차림이었지만, 이 남자만큼은 다르다.
단추까지 달린 단정한 옷차림에, 잘 훈련받은 자 특유의 단단한 몸집.
그리고 허리에 차고 있는 검.
‘게다가 저 남자가 사용하는 저 검…… 제도에서 자주 사용하는 검의 형태를 하고 있네?’
제국 최고의 기사를 남편으로 두고 있는 이엘리는 검의 형태에 얼추 익숙했다.
보통 북부에서 사용하는 검은 바스타드 소드라고 불리는 검으로, 묵직한 무게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 반해 제도를 포함한 남부는 가느다란 세검을 주로 사용한다.
세검을 귀족적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제국인인 것이 분명해. 단독 범행 은 아닐 거고, 이 일을 지시한 윗선이 있겠지.’
이엘리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아마 저쪽은 그들의 침입 자체를 야만족이 한 짓이라고 덮어씌우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이엘리가 보기 엔 절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입술을 짓씹었다.
‘……하지만 저들이 야만족들이 아니라는 증거가 필요한데.’
이대로 그녀가 무사히 구출된다고 해도 그들의 죄는 말끔히 덮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