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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화 (132/196)

132화

“제가 가져온 선물도 두 분의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네요.”

“아, 신경 써서 가져와 주셔서 감 사해요.”

그렇게 나름대로 화기애애한 대화 가 이어졌다.

묘한 느낌이었다. 깨진 유리 조각 들 위로 보드라운 천을 깔아 둔 그런 느낌.

언젠가는 그 천이 찢어져 버릴 것만 같은, 그런 예민한 긴장감.

“그럼 황녀께서는 공작성에 계속 머무르고 계신 건가요?”

로렌 백작 영애가 은근슬쩍 질문을 던졌다.

이엘리는 떨떠름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것 같아요.”

“그러시구나…… 그렇다면 황녀 전하께서는 현재 손님방에서 머무시겠어요?”

왜 이런 걸 물어보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지금 로렌 백작 영애가 하는 행동을 보며 이엘리는 미세한 불쾌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불쾌감을 눈치채지 못한 황녀는 여상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공작 부인께서 호의를 베 풀어, 별저를 빌려주셨답니다.”

“어머, 정말인가요?”

“네. 공작 각하께서 자리를 비우셔서, 지금은 공작 부인께서도 별저에서 함께 생활하신답니다.”

황녀는 다소 뿌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황족 중에서 공작가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거니와, 보통은 정말로 친한 관계가 아니라면 같은 별저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 분께서 절친한 친우라고 하시 더니, 그 소문이 정말로 사실이신가 봐요!”

그 사실을 눈치첸 로렌 백작 영애 가 양손을 꼭 쥐며 밝게 말했다.

황녀가 수줍게 미소했다.

“글쎄요. 공작 부인께서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면 저도 무척 기쁘겠어요.”

“황녀 전하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저야말로 굉장히 행복하네요.”

누군가가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해 준다는 게 기분 나쁠 리 없다.

이엘리는 로렌 백작 영애에게서 느껴지는 희미한 위화감은 접어 버리고 생긋 눈웃음을 쳤다. 그때 백작 영애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공작성의 별저라니요. 굉장히 아름답다고 들었어요.”

그 말에 이엘리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공작성은 굉장히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값지고 귀중한 재료를 이용하여 만 들어진 데다가, 거기에 오래된 시간 과 섬세한 관리까지 더해졌다.

역사적으로도 가치가 있는 건축물이라 건축 학도도 관심을 보인다고했다.

“저도 공작성의 별저를 꼭 한 번쯤은 구경해 보고 싶었는데…… 안 될까요?”

그때 로렌 백작 영애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말을 들은 이엘리는 묘한 얼굴이 되었다.

“그게……”

“불편한 제안이라면 죄송해요, 하지만 공작성의 별저도 워낙 유명하잖아요.”

백작 영애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 났다.

‘사실 궁금해하는 건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유서 깊은 공작가의 별저를 볼 수 있는 기회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녀가 연 살롱이 귀부인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끈 이유 중 하나는, 공작성의 아름다운 별저를 실제로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엘리가 황녀에게 빌려준 별저는 외부에 공개된 적 없는 별저였다.

“정말로 궁금했었어요. 어떻게든 한 번만 볼 수는 없을까요?”

백작 영애가 다시 한 번 간절하게 말했다.

이엘리는 살짝 난처한 얼굴을 했다.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할 수 있을 리 없다.

결국 이엘리는 짧은 한숨을 삼키면서 고개를 끄덕여야했다.

“좋아요. 그렇게 보고 싶다는데 거 절하는 건 역시 매몰차 보일 테니까요.”

“감사합니다, 공작 부인!”

이엘리의 말에는 살짝 가시가 돋쳐 있었지만, 백작 영애는 그런 가시 따위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행동했다.

이엘리는 미세한 불쾌감을 애써 억 누르면서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현재 황녀와 이엘리가 함께 머무르 고 있는 별저는 공작성에서도 가장 호화로운 별저였다.

공작과 그 부인, 그리고 직계에게만 열어 주는 별저.

이엘리가 황녀에게 저 별저를 빌려 준 것 자체가 커다란 호의를 베푼 것이었다.

이엘리는 살짝 뒤를 돌아보며 백작 영애에게 입을 열었다.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는 모습인 지는 잘 모르겠네요.”

“아니예요, 정말 아름다워요!”

백작 영애가 밝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가을이 한껏 무르익은 정원 안쪽으로 새하얀 건물이 얌전히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부터 약 삼백 년 전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우아한 건물이었다.

“이런 곳을 구경할 수 있다니 정말 로 기뻐요.”

“그런가요?”

“네. 그런데 공작성에 이런 별저가 있을 줄은 몰랐네요.”

백작 영애가 천진한 얼굴이 되어 이엘리를 돌아보았다.

또다. 이 희미한 위화감. 어딘지 콕 짚어 말할 수 없는 이 불편함.

이엘리는 어깨를 바짝 굳혔다. 그리고 무난한 대답을 꺼내 놓았다.

“글쎄요, 공작성은 워낙 규모가 크니까요.”

“그러게요, 그래도 이렇게 꼭꼭 숨 겨진 별저가 있을 줄은 몰랐어요.”

솔직히 숨겨 놓은 건 아니지만. 그녀는 백작 영애의 말을 정정해 줄 필요성을 느끼진 않았다.

“비밀 장소 같아요.”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겠네요.”

곁에서 있던 황녀가 끄덕였다. 백작 영애는 이엘리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살갑게 말한다.

“이런 별저까지 구경시켜 주시고, 오늘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그래요. 만족했다니 다행이네요.”

이엘리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 대답을 들은 백작 영애의 눈동자가 은밀한 빛으로 빛났다.

백작 영애는 정중한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그녀가 남긴 위화감은 분명 있었지만 짙지는 않았다.

평소라면 경계했을 이엘리마저도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로.

이엘리와 황녀는 늦은 오후를 도란 도란 대화를 나누며 보냈다.

그리고 그날 밤. 헤센바이츠 공작성에 침입자가 들이닥쳤다.

* * *

만물이 잠든 야심한 시각, 먹물처럼 까만 밤이 지배하는 때.

느닷없이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불이야!”

이엘리는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 어 났다.

날카로운 고함 소리가 울려 퍼진 다.

황급히 창문에 달라붙어 보니 저 멀리서부터  주홍색 불길이 마구 불 타올랐다.

까만 하늘을 살라 먹으며 불티들이 우수수 휘날렸다.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진다. 이름 모를 이 하나가 목청껏 외쳤다.

“야만족들이 침입했다!”

순간 이엘리는 얼굴을 찌푸렸다. 야만족들? 지금껏 단 한 번도 공작성 근처에도 와 본 적 없던 그들이?

하지만 오래 의문을 갖고 있을 새 가 없었다. 그녀는 황급히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뭐, 뭐지?”

“공작 부인, 괜찮아요? 다친 곳은 없어요?"

그때 이엘리를 부르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잠옷 바람으로 밖으로 뛰어나온 황녀가 이엘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엘리는 우선 황녀에게로 다가갔다. 황녀의 얼굴이 무척 창백했다.

“네, 전 괜찮아요. 황녀께서는

“저도 몸은 멀쩡해요.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죠?”

황녀가 어깨를 가늘게 떨었다.

사실 이엘리나 황녀나 이런 상황에 면역이 없는 건 똑같았다.

‘하지만 이대로 앉아 있을 수만은 없잖아.’

어떻게든 지금 상황을 해결해야했다.

저들이 어째서 공작성을 침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카리가 공작성을 비운 상황에서 들어온 것이 악질 적이었다.

그 목표가 너무 투명하지 않은가.

‘자카리가 없는 틈을 노려서, 나와 황녀 전하를 어떻게든 해 볼 생각인 거야.’

겨울의 마법을 가진 자카리가 곁에 있을 땐, 감히 그 누구도 공작성에 접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마수 퇴치를 위하여 공작가의 기사들을 이끌고 출정한 상태였다.

그 말은 곧, 지금은 상대적으로 공작성의 보안이 취약하다는 뜻이다.

‘나와 황녀 전하가 인질이 되거나 상해를 입는다…… 그건 안 돼.’

이엘리는 그렇다 치고 황녀가 더 문제였다.

공작성에 황녀가 머무르는 상태에서 황녀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황가가 공작가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최악의 상황으로, 황녀가 목숨을 잃기라도 한다면?

‘어떻게든 그 상황만큼은 막아야 해.’

이엘리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이엘리는 덜덜 떨고 있는 황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황녀 전하, 우선 여기를 빠져나가 요.”

“하, 하지만……”

“듣기로, 침입자가 들어왔다고 해요. 그들이 노리는 건 분명 저와 전 하일 거예요.”

그녀는 황녀의 손목을 잡은 손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깜짝 놀란 황녀가 이엘리를 마주본다.

“저는 몰라도, 만약 전하가 여기서 다치기라도 하면 황가와 공작가 사이에 문제가 생겨요.”

“……공작 부인?”

“공작가와 황가 사이에 내전이 일어나는 것을 바라지는 않으시겠지요?”

그 말을 들은 황녀의 눈동자에 파랗게 날이 섰다.

크게 숨을 들이쉰 황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래서는 안 되지요.”

“그렇다면 가요. 우선 별저부터 빠져나간 후에 생각해 봐요.”

그렇게 말한 이엘리가 황녀와 함께 몸을 돌렸다.

그런데 그때,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작 부인?”

“누구냐!”

바짝 긴장한 이엘리가 언성을 높였다.

어둠 속에서 기사 한 명이 걸어 나온다. 그가 고개를 숙였다.

“공작 부인과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신원과 소속을 밝혀라.”

“헤센바이츠 기사단의 잭 노먼입니다. 직책은 수습 기사입니다.”

“……”

저런 기사가 있었던가? 이엘리는 순간 혼란해졌다.

기사는 곧바로 서글서글하게 웃어 보였다.

“아직 신참이라 공작 부인께서 절 알아보지 못하시는 것도 이해는 갑니다.”

“지금 야만족들이 공작성에 침입 했습니다. 한시바삐 대피하셔야 합니다.”

자신이 헤센바이츠 기사단의 소속 이라 주장하는 기사가 두 사람을 재촉했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이엘리는 황녀를 등 뒤로 숨기며 기사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그녀가 질문을 던졌다.

“하나 그들은 한 번도 공작성의 성벽을 넘은 적이 없는데.”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그 예외는 공작가의 안주인, 그리고 황녀 전하를 지키는 것에도 적용 되나?”

“예?”

“……”

기사가 순간 허를 찔린 얼굴을 했다.

이엘리는 냉엄한 얼굴이 되어 기사를 향해 따져 물었다.

“내가 알고 있는 공작성의 사람들 은, 우리를 지키기 위해 최고의 기사를 보낼 것 같은데.”

“그, 그것은.”

“공작성에는 기사단의 부단장이 남아 있어. 수습 기사가 아니라, 마땅히 그가 오지 않겠나?”

이엘리의 질문에 기사의 표정이 점 차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엘리는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게다가 다른 기사들과 합류하는게 아니라 우리를 따로 끌고 간다고? 도대체 어디로?”

“공작 부인, 밖에 나가시면 다른 기사들도 있습니다. 상황이 급하여 제가 먼저 온 것……”

“그리고 또 하나.”

하지만 이엘리는 기사의 말허리를 잘라 냈다.

냉철한 연녹색 눈동자가 기사를 빤히 노려본다.

“공작성의 사람들은 날 안주인 마님이라고 불러.”

기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엘리가 턱을 치켜세웠다.

황녀를 붙든 손에 절로 힘이 들어 간다.

“자네, 도대체 누구지?”

“하, 이런…… 젠장.”

욕설을 내뱉은 기사의 표정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기사가 이엘리를 확 붙들어 잡아당 겼다.

“이, 이것 놔!”

“가만히 있어!”

기사가 험악하게 외쳤다.

하얀 손수건이 입과 코를 틀어막는 다. 알싸한 향이 페에 가득찼다.

‘설마, 마취제가 적셔져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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