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화
그녀가 가만히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저 장미를 피워 냈다고?
그녀 스스로가 느꼈던 그 감각, 세계와 감각을 공유하는 것 같던 그 느낌도 모조리 현실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나…….
‘그 풍경.’
봄의 여왕 같던 아샤꽃나무와 겨 울을 빚어 만들어 낸 것 같던 남자.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던 그 풍경 또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었다고?
이엘리는 마른침을 삼켰다.
남자가 이엘리를 향해 간절하게 불렸던 그 이름이 귀에 아직도 쟁쟁했다.
나의 아샤. 이엘리는 입술을 당겨 물었다.
그날 저녁, 메리는 붉은 장미를 가 득 담은 화병을 이엘리의 집무실에 놓아주었다.
진한 향기에 그녀는 미간을 좁혔다.
그녀는 화병을 손가락질로 가리키며 다소 신경질적으로 묻는다.
“설마 그 여름 장미야?”
“네. 정원에서 여름 장미가 활짝 피었다더라고요. 참 이상한 일이 죠?”
“이 꽃, 바보 같네. 자기가 피어야 할 계절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이엘리는 다소 심술궂게 대답했다. 낮에 있었던 일로 마음이 혼란한 탓이다. 메리가 미소했다.
“장미가 안주인 마님을 만나서 기뻤던 게 아닐까요?”
메리의 여상한 대답에 이엘리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
안녕히 주무시라는 밤 인사를 남긴 메리가 방을 빠져나갔다.
화려한 붉은 장미를 눈 안에 담던 이엘리가 작게 중얼거렸다.
“……헤센바이츠.”
이엘리를 향해 ‘나의 아샤’라고 불렸던 새하얀 남자.
하지만 헤센바이츠는 건국 전설에도 나오는 겨울의 은룡이자, 공작가의 시조인 존재가 아닌가.
그리고 이엘리는 그 남자를 분명……
“자카리……”
그래, 자카리라고 불렀다. 왜였을 까. 하지만 분명히 그 사람은 자카리를 닮았다.
아니, 정확히는 동일인인 것만 같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묘한 감각에 이엘리는 또다시 혼란스러워지고 말았다.
* * *
그리고 이튿날. 자카리가 없는 공작성에 반갑지 않은 소식이 찾아왔다.
로렌 백작 영애가 보낸 소식이었다.
백작 영애는 정중한 편지를 보내왔는데, 그 편지에는 공작성에 방문하고 싶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북부를 떠나기 전에 북부의 안주인에게 인사를 전하고 싶다고 했다.
“로렌 백작 영애가 공작성에 방문 한다고? 도대체 왜?”
이엘리는 조금 어리둥절해졌다. 메 리도 당혹스러운 낯이다.
“네. 그리고 편지를 가져온 사람도, 답신을 받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을 기세예요.”
“그래?”
이엘리는 미간을 좁혔다. 뭐 아예 납득하지 못할 이유는 아닌데, 왜 하필이면 자카리가 없는 지금?
그녀는 묘하게 신경을 건드리는 기분을 느꼈다.
굳이 백작 영애가 이곳에 와야 할 이유가 있나?
“또한 황녀 전하께서 공작성에 체류하고 계시니, 함께 인사를 올리고 싶다…… 라.”
편지의 내용을 모르는 황녀를 위해 이엘리는 편지에 적혀 있는 내용을 또박또박 읽어 내렸다.
“흐음……”
그 내용을 들은 황녀도 의아한 낯이 되어 버렸다.
이엘리는 황녀를 돌아보며 질문을 던졌다.
“황녀 전하께서는 괜찮으실까요?”
“네, 뭐. 저는 크게 상관은 없어요.”
그렇게 대답하며 황녀는 미간을 좁혔다.
북부에서의 로렌 백작가가 생각보다 영향력이 없다는 건 알고 있다.
그래도 황제가 아직 그들을 버리지 않았으니 황녀도 태도를 조심해야만 했다.
‘이 무슨 쓸모없는 신경 소모인지 모르겠네.’
황녀는 쓰게 웃었다.
고개를 끄덕인 이엘리가 다소 시큰둥한 얼굴이 되어서 입술을 열었다.
“그렇다면 내일쯤 찾아오라고 이르렴. 함께 차라도 마시고 돌려보내면 되겠지.”
“그렇게 말씀 전하겠습니다, 마님.”
깊숙이 고개를 숙여 보인 메리가 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잠시 이엘리와 황녀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더니, 황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제 생각에도, 백작 영애가 방문하는 건 조금 이상한 것 같아요.”
“음…… 정확히 어떤 점을 말씀하 시는 것인지요?”
그녀의 물음에 황녀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곰곰이 생각하는 것 같던 황녀가 말을 잇는다.
“우선, 로렌 백작 영애가 굳이 인사를 올린다며 공작성에 찾아올 이 유가 없잖아요.”
“아……”
그녀는 눈을 깜빡였다. 그녀가 느낀 불편함을 황녀도 고스란히 느낀 것 같다. 이엘리가 물었다.
“황녀께서도 좀 미심쩍으신가요?”
“솔직히 그렇죠. 게다가 저는 굳이 인사를 올릴 정도로 세력을 가진 황 족도 아니고요.”
그렇게 말한 황녀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마를 좁힌 황녀가 이엘리를 바라 보면서 말을 이었다.
“공작 부인과 로렌 백작가의 사이는 원만하진 않고, 게다가 공작께서 도 자리를 비우셨잖아요?”
“그렇죠. 이번 연회에서도 로렌 백 작가와 언쟁이 있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이번 연회에서 내온 백조 요리는 무척 신선했다고 생각 해요.”
황녀가 눈을 찡긋댔다. 그녀는 쿡쿡 소리 내어 웃었다.
황녀는 여상한 어조로 설명을이었다.
“어쨌거나 로렌 백작 영애가 공작성에 인사를 하러 온다고 하면……”
황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이엘리를 돌아보았다. 다소 신랄한 태도로 이엘리를 향해 미소했다.
“……별 볼 일 없는 황녀 하나, 그리고 관계가 나쁜 공작 부인만 만나 게 될 거 아니예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굳이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인사를 하러올 이점이 없죠.”
“게다가 이미 연회에서 한번 만났잖아요. 공작가의 외척임을 과시하 기 위해서일까요?”
그렇게 말한 황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말해 놓고서도 말도 안 된다는 걸 알아서 였다.
“뭐, 그렇다고 하기에는 공작 각하 가 마수 토벌 때문에 자리를 비우셨죠.”
굳이 따지자면 로렌 백작 영애의 외척은 이엘리가 아니라 자카리였다.
게다가 공작 부부가 로렌 백작가에 호의적이지 않다는 건 북부, 아니 제국 사람들이 전부 다 알았다.
황녀는 살포시 미간을 찌푸리는가 싶더니, 말을 이었다.
“뭐, 제가 너무 예민하게 생각하는 것일지도 몰라요. 순수한 의도일 수도 있죠.”
“……네, 뭐.”
로렌 백작가와 순수함이란 전혀 어 울리지 않는 것 같긴 하지만.
이엘리는 떨떠름한 얼굴로 황녀의 말에 동의했다.
그리고 황녀도 이엘리와 심정적으로 같은 마음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좋게 생각하자면…… 최근에 워낙 점수를 잃었으니 그 점수를 만회하려는 것일까요?”
황녀의 말에 이엘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
사실 이런 식으로 추측해 봤자 답은 나오지 않는다.
“어쨌거나 로렌 백작 영애를 만나 본다면, 진짜 의도를 알 수 있겠죠.”
이엘리의 말에 황녀 또한 동의했다.
두 사람은 쓸데없는 고민을 접고, 점심을 먹으러 식당으로 내려가기로 의견을 모았다.
오늘의 점심 식사는 더운 채소를 곁들인 양고기 스테이크였다.
* * *
공작성에 편지를 부친 로렌 백작 영애는 지금, 싸늘한 표정이 되어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
“그깟 계집애에게 이대로 밀릴 줄 알고?”
그 망할 계집애. 그 계집애만 없었 더라면 이번의 모욕적인 일은 당할 필요조차 없었지 않나.
“이번에 받은 모욕은 어떻게든 꼭 갚아 주겠어.”
그렇게 중얼거리던 백작 영애는 입술을 꽉 당겨 물었다.
운 좋게 좋은 남편감을 만나 결혼 해서 신분 상승을 한 것뿐인 주제 에, 공작 부인이라는 이름으로 나와 우리 가족을 그렇게 무시하다니.
너무나도 화가 났다. 그런데 그때, 그녀는 등골을 싸늘하게 후벼 파는 위화감을 느꼈다.
‘뭐지? 난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거지?’
그야 물론 연회에서 모욕적인 일을 당했으니까 그렇지.
백작 영애는 억지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누군가 제 분노에 부채질을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녀는 숨을 삼켰다.
‘아냐, 신경이 예민해진 것뿐이야.’
불쾌한 얼굴이 된 그녀는 그 위화 감을 깔끔하게 무시해 버렸다.
이 타오르는 것 같은 감정은 모조 리 자신의 분노였다.
남에게 분노를 부채질 당한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어디 있나.
그리고 이튿날. 로렌 백작 영애는 공작성에 방문했다.
하인을 데려다 선물까지 바리바리 챙겨 온 모습이었다.
응접실에 세 여자는 나란히 앉았다. 백작 영애가 대뜸 고개를 숙여 보였다.
“지금껏 저희 가문이 공작가에 무례하게 행동했지요. 정말로 죄송합니다.”
“아, 네……”
이엘리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의 무례하고 날카로운 태도는 간데없이 사라지고, 그녀는 마치 봄 바람처럼 사근사근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히려 그 모습이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제 저희도 며칠 후면 제도로 돌아가거든요. 그래서 그 전에 인사를 올리러 왔어요.”
“고마운 일이네요. 그런데 저희가 이렇게 인사를 나눌 만한 사이였던 가요?”
이엘리의 목소리에 미세한 가시가 돋아 있었다.
하지만 백작 영애는 생글생글 웃을 따름이다.
“공작 부인께서 저희를 불편해하시는 건 물론 당연한 일이예요.”
“백작 영애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줄은 몰랐네요.”
“진심이람니다, 공작 부인. 공작님의 면을 봐서라도 저희를 용서해 주 시면 안 될까요?”
백작 영애는 기가 죽은 척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그 모습은 꽤나 가엾고 안타까워 보인다.
“저희도 저희의 잘못을 충분히 인 지하고 있답니다. 부모님께서도 죄스러워하고 계세요.”
“……그런가요.”
이엘리는 희미한 위화감을 느꼈다. 로렌 백작과 백작 부인이 자신의 잘 못을 인지하고 죄스러워할 수 있는 사람인지는 둘째 치자.
그건 어차피 그녀에게 답변을 들을 만한 문제가 아니니까.
‘백작 영애가 이렇게 능란하게 대화를 이어 나갈 수 있는 사람이었던가?’
이엘리가 의문을 느끼는 건 바로 이 지점이었다.
로렌 백작 영애는 좋게 말하면 부 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현실을 말하자면 오냐오냐 자란 사람 특유의 단점을 가졌다고나 할까.
‘지금까지 봐 온 바, 영애는 자존심이 강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 기 싫어했었지.’
이엘리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허 리를 곧게 펴고 그녀를 마주 보는 로렌 백작 영애의 행동에는 흠잡을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이엘리는 그 완벽한 처세술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런 사람이, 평소 그렇게 싫어하던 사람을 찾아와 순순히 사과한다고?’
여러모로 수상한데, 어디가 수상한 지 짚어 이야기하기는 어려운 이 불편함.
게다가 백작 영애도 이번엔 무례를 저지르지 않았으니, 쉽사리 의심하 기도 어렵다. 이엘리는 미간을 좁혔다.
‘이번 연회에서 로렌 백작가문이 당한 망신만 생각해도…… 저런 태 도를 보일 리 없을 텐데.’
이엘리는 힐끔 백작 영애를 곁눈질 로 바라보았다.
게다가 로렌 백작 영애의 지금 분위기도 조금 이상했다.
무언가에 들뜬 것 같은 그 표정.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 같은, 이상한 느낌.
“……괜찮으신가요?”
보다 못한 그녀가 백작 영애에게 물었다.
하지만 백작 영애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을 했다.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것이…… 아니예요.”
입술을 달싹이던 이엘리는 결국 고개를 가로저었다.
평소보다 들떠 보이는 모습이 이상 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백작 영애는 고개를 끄덕였고, 이엘리는 어색한 얼굴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