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정곡을 찔렸다. 자카리는 숨을 삼켰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차분한 어조로 말을 잇는다.
“전대 공작님에 대한 감정을 강요 하는 건 아니야, 그래도……”
태연한 척하던 얼굴 위로 실금이 갔다.
이엘리는 그런 남편을 안타까운 눈 빛으로 바라보았다.
“가끔씩 너, 집무실에서…… 전대 공작님께서 쓰시던 물건들을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잖아.”
자카리의 눈동자가 짧게 흔들렸다. 설마 그런 것까지 알고 있었나.
“……만약 네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든 그 속내를 터 놓는 게 네 마음이 좀 더 편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카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엘리가 말하는 모든 것들이, 너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복잡한 마음을 어떻게 설명해 야 할까. 자카리는 무겁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엔.”
“응.”
“참 이상해. 아버지가 그렇게 미웠었는데.”
처음으로 아버지에 대한 제 속마음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 같다. 입 안이 바짝 마른다.
자카리는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자신의 깊은 속내를 이야기하는 것 은, 스스로의 약점을 다른 사람에게 내보이는 것과 같다고 여겼다.
그런데도 그녀만큼은 괜찮다.
“차라리 죽었으면하고 바랐던 사람인데도…… 이렇게 그리워한다는 게 너무 이상해.”
자카리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이엘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자카리는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녀에게는 모든 비밀을 꺼내 놓아 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당연하지, 아버지인걸.”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이상하다고 매도하는 세상에서, 이엘리만큼은 그가 이상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장례식장에서 그의 냉정함을 이야 기하던 그 모습이 문득 떠오른다. 그가 중얼거렸다.
“새삼스럽게 내가 아버지에게 얼마 나 많이 의지하고 있었는지 알 것 같아.”
“자카리.”
“……참 우습지?”
자카리의 미소는 여전히 서글펐다. 아버지를 그토록 증오했던 주제에, 이런 식으로 아버지를 추억하며 그 리워하는 자신의 위선이 한심했다.
그러나 이엘리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답했다.
“전혀 우습지 않아.”
“하지만……”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에게 의지하는 게 뭐가 우스워?”
이엘리는 양 허리에 손을 얹고 턱을 치켜세웠다.
이엘리의 차분한 목소리가 자카리를 향했다.
“공작님께서도 너에게 헤센바이츠 공작가를 맡기고 떠나셨잖아.”
“이엔, 그건.”
“공작님께서 이 가문에 얼마나 큰 책임감을 가지고 계셨는지는 내가 더 잘 알아.”
이엘리는 전대 공작의 모습을 눈앞에 선연히 떠올릴 수 있었다.
공작가에 대한 책임감, 그리고 아내와 아들에 대한 일그러진 사랑.
공작을 구성하는 감정은 오로지 그 두 가지뿐 이었다.
“그리고 넌 그런 막중한 책임감을 짊어지게 된 거라고.”
자카리가 넘겨받은 건, 공작이 평생을 짊어지고 있던 책임감이었다. 그녀가 그에게 되물었다.
“공작님도 그렇게 네게 의지하시는 데, 왜 네가 의지하는 걸 우습다고 생각해?"
“……”
그녀의 명쾌한 말에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남편의 어깨를 두드리며 이엘리는 웃었다.
“그러니까 나도, 너와 전대 공작님께서 소중하게 여기시는 이 공작성을 어떻게든 잘 보살필 생각이야.”
“……그건.”
“그러니까 공작성은 나에게 맡기 고, 걱정 말고 다녀오도록 해. 알았지?”
“하지만 네게 너무 큰 부담을 주는 것 같아서……”
자카리가 말꼬리를 흐렸다. 아버지 도 없는 공작성에 이엘리를 혼자 두고 간다는 게, 마음 한구석에 계 속 찜찜하게 남아 있었다.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던 이엘리가 양팔을 들어 남편의 목을 끌어안았다.
“나, 네 아내야. 제국 유일의 공작 부인이자 북부의 안주인이라고.”
따스한 체온과 망설임 없이 자신에게 기대 오는 가벼운 무게.
아샤꽃향기를 닮은 달콤한 체향이 코끝을 간지럽힌다.
자카리는 그녀를 품에 가둬 넣곤 깊게 호흡했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도 내 책임은 다하고 싶으니까, 공작 각하께서는 바깥일에 집중하세요. 알았지?”
“……그래, 알았어.”
자카리가 희미하게 웃었다. 힘을 내라는 의미로, 이엘리는 자카리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며칠 후.
공작을 위시한 공작가의 기사단은 마수 토벌을 위하여 북부로 출정했다.
* * *
자카리가 떠났다. 이엘리는 웃는 얼굴로 그를 배웅했다.
하지만 그를 보낸 후 마음이 허전 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가 출정해야 한다는 것은 물론 잘 알고 있지만, 공작성이 텅 빈 것 같았다.
‘기분 전환 겸 산책이나 나갈까.’
한창 서류를 살펴보던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서류를 탁탁 쌓아 올렸다.
자카리가 없으니 이상하게 일에도 집중하기 어려운 기분이었다.
방을 나선 그녀는 곧장 공작성의 정원으로 향했다.
“오늘도 날씨는 맑구나.”
밖에 선 그녀가 하늘을 보며 희미 하게 웃었다.
햇볕이 맑게 내리찍는 오후였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가을바람이 뺨을 간지럽힌다.
따스한 햇볕을 쬐던 그녀는 역시나 자카리를 생각했다.
“지금쯤 자카리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북쪽으로 진격하고 있겠지. 힘들지는 않을까.
물론 출정을 나가도 무사히 돌아오긴 하지만, 예전엔 몸에 자잘한 상 처를 남기기도 했었는데.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나. 그녀는 미간을 좁혔다.
“휴, 이런 생각 따위 해 봤자 뭐하나.”
마음만 무거워질 뿐이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겨울의 마법을 가진 자카리를 상처 입힐 수 있는 존재는 이 제국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이엘리는 마음을 비우고 산책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아이고, 안주인 마님. 이곳은 어쩐 일이십니까?”
정원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니, 정원사가 살갑게 인사를 건네 왔다. 이엘리는 생긋 웃어 보였다.
“그냥 산책 중일세. 장미를 다듬는 중인가?”
“예. 이제 가지를 좀 쳐 줘야죠. 북부에서는 겨울도 금방이지 않습니까.”
정원용 가위를 손에 든 채 정원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엘리의 시선이 장미 덤불로 향했다.
“아, 여름 장미……”
자늑자늑 걸음을 옮기던 그녀가 문득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꽃이 모두 진 여름 장미 덤불이 하얀 울타리에 무성히 자라 있었다.
아직은 파릇한 색깔이 남아 있다. 이엘리는 작게 미소했다.
“그러고 보니 올해는 여름 장미가 무척 예쁘게 폈었는데.”
만개한 여름 장미가 붉은 꽃그늘을 드리웠었던, 지난 그 여름.
짙은 장미 향기가 아득하게 공기를 메우고는 했었다.
그녀는 추억에 잠겨 장미 덩굴을 살짝 어루만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어라?”
내가 뭔가 잘못 보고 있는 건가? 이엘리는 멍하니 제 앞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니, 분명히.
“이, 이게 도대체 뭐야?”
그녀는 순간 당황해 버렸다. 그녀가 손가락을 댄 그곳부터 무더기로 장미가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푸른 잎사귀들 사이로 붉은 장미가 송이송이 피었다.
어찌나 꽃송이가 크고 탐스러운지 마치 동그란 열매처럼 보인다.
툭툭 꽃망울을 퇴우는 장미들. 그녀는 어깨를 바짝 굳혔다.
‘나, 지금……”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온 세상과 감각을 공유하는 것만 같은 묘한 감각.
장미가 피어나는 과정이 피부로 느껴 진다.
아니, 이 감각을 정확히 표현하자 혼란한 와중에 그녀는 생각했다.
‘내가 꽃을 피워 내고 있는 느낌이야.’
그게 말이 되나? 그러나 시야 안 쪽은 이미 붉은 장미 꽃송이들로 가 득 찼다.
그 자리에 바짝 굳은 이엘리는 퍼뜩 시선을 들어 올렸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이엘리는 곧 경악하고 말았다.
‘지금 이 풍경은 도대체 뭐지?’
이엘리는 눈을 깜빡였다.
이엘리가 서 있었던 정원은 어느새 사라지고, 눈 닿는 세상은 모조리 분홍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수없이 흩날리는 분홍색 꽃잎들이 시야를 메우고 한들거린다.
‘세상에.’
이엘리는 경악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엄청난 크기의 아샤꽃나무였다.
성인 남성 다섯이 팔을 활짝 벌리고 끌어안아도 모자랄 것 같은 둥치를 가졌다.
커다란 가지 위로 빽빽하게 분홍색 꽃잎들이 피어나 살랑거린다.
마치 봄의 여왕처럼 화려하게 가지를 펼치고 있었다.
‘저런 나무가 북부에 존재하기는 했던가?’
그런 의문을 느끼면서도, 이엘리는 눈앞의 아샤꽃나무에 압도되고 말았다.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지금 상황만 아니라면 무척 아름답 다고 느낄 정도로.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때였다.
‘아샤.’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마치 봄으로 빚은 것처럼 다사로운 목소리다.
이엘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등 뒤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이엘리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뜨였다.
“……당신은?”
설원처럼 새하얀 은발이 허리 아래로 길게 흩날렸다.
빙해를 조각내어 박아 넣은 것 같은 새파란 시선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본다.
겨울을 형상화하여 만들어 낸 것 같은 아름다운 남자였다.
'나의 아샤.’
“저는 아샤가 아니……”
반사적으로 대답하던 이엘리는 찰나, 극심한 혼란을 느꼈다.
당신은 왜 날 ‘아샤’라고 부르지?
‘아니, 넌 나의 아샤야.’
남자가 손을 뻗어 이엘리의 뺨을 쓸어내렸다. 그 온기가 지극히도 따스했다.
짙푸른 눈동자는 이엘리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샤. 이엘리.
두 이름 사이에 놓인 경계가 천천히 허물어진다.
난 누구지? 난 왜 내가 ‘아샤’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지? 정말로 내 가 ‘아샤’인 건가?
“당신은……”
그녀는 입술을 움직였다. 온통 분홍색으로 물든 봄의 세상 속에서, 남자는 홀로 버림받은 겨울인 것처럼 고요히 서 있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야? 그녀는 그렇게 물어보려했다.
“헤센바이츠.”
막상 입술 밖으로 튀어나온 이름은 달랐다.
그리고 그 이름을 불쑥 내뱉은 이엘리는 짙은 기시감을 느꼈다.
저 눈동자와 얼굴은, 이엘리를 바라보는 애정 어린 시선은. 당신은, 나의…….
“……자카리?”
그 이름이 공기 중에 얹힌 순간.
세상이 무너지고 이지러졌다.
환상처럼 아름다운 남자의 모습도, 화려하게 흩날리는 분홍색 꽃잎들 도, 거대한 아샤꽃나무도 순식간에 멀어져 사라진다.
“……님.”
“……”
“안주인 마님!”
마치 꿈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이엘리는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정원사가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찰나의 낮잠이라도 잔 것만 같다. 순간 이엘리는 어리둥절해 졌다.
“마님, 정신이 드십니까?”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갑자기 마님께서 비틀거리시는 바람에……”
다행히도 쓰러지지는 않으셨다며, 정원사는 조심스레 이엘리에게 말했다.
그러던 중 이엘리는 코끝을 스치는 짙은 장미 향기를 맡았다.
멍하니 고개를 돌린 그녀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저건…… 저 장미들은.”
“가, 갑자기 피어났습니다.”
정원사도 내심 무척이나 놀란 얼굴이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정원사가 잠시 후 말을 덧붙였다.
“……마님께서 장미 덩굴에 손을 대신 이후로요.”
이엘리는 유령에라도 홀린 듯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마치 그녀를 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새빨간 장미들이 무리 지어 피어있었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장미들이 달콤한 향기를 흩뜨린다.
“거짓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