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북부의 날씨는 어느새 서늘해진 상태였다.
피부에 닿는 공기가 상쾌하여 기분이 좋다.
황녀는 어깨에 걸친 숄을 추슬러 올렸다.
황녀 또한 제도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편안한 모습이었다.
“그건 그렇고, 이번에 헤센바이츠 공작께서 마수 퇴치를 나선다면서 요.”
“네. 보통 가을부터 마수 퇴치를 시작하곤 하죠.”
이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을과 겨울에 걸쳐 공작가의 기사 들은 마수들을 정기적으로 토벌하곤했다.
그렇지 않으면 겨울에 골치 아파지기 때문이다.
자카리 또한 그 토벌에 참가했다.
“아무래도 공작께서 걸음이 떨어지지 않으시겠어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거야."
황녀가 이엘리를 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황녀는 이엘리에게 나긋한 목소리로 농을 던졌다.
“이렇게 예쁜 아내가 있다면 저라도 마수 토벌을 나가고 싶지 않을 것 같아서요.”
“농담하지 마세요, 황녀 전하.”
이엘리는 눈썹을 찡그리며 수줍게 웃었다.
황녀는 그런 이엘리를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머나, 농담이 아니예요. 진심인 걸요.”
황녀가 쿡쿡 웃었다. 새삼스럽게 이엘리는 황녀의 표정이 훨씬 더 밝아졌다는 것을 인지했다.
‘황녀 전하께서도 저렇게 웃으실 수 있구나.’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그림자는 모 두 사라진 지 오래였다.
황제가 곁에 있지 않다는 것만으로 도 저렇게 표정이 환해질 수 있다니.
이엘리는 그런 황녀가 보기 좋은 한편, 좀 안쓰러워졌다.
“그러고 보면 공작께서는 며칠이나 공작성을 비우시나요?”
“글쎄요. 보통은 짧으면 5일, 길면 일주일 정도 걸렸던 것 같아요.”
“세상에, 헤센바이츠의 기사들은 무척 강한가 보군요.”
황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엘리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기사들이 강하다기보다는, 자카리의 겨울의 힘이 강력해서 그런 거라고는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으므로.
황녀가 말했다.
“공작께서도 정말 대단하신 분이세요.”
“자카리가요?”
“그럼요. 실제로 한 가문의 가주가 전투에 직접 나서는 일은 드물잖아요.”
황녀가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말했다. 이엘리는 눈을 깜빡였다.
하긴, 그도 그랬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기사단장에게 대리권을 주어 출전시키지, 가주가 직접 출정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아무래도 자카리는 북부 최고의 기사이기도 하니까요.”
곰곰이 생각하던 이엘리는 이윽고
애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 남편에 대한 애정 이 가득 차 있어서, 황녀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잠시 후, 황녀가 농담처럼 입을 연다.
“공작 부인께서는 공작님을 무척 사랑하시는 것 같아요.”
“아……”
순간 이엘리는 말문이 막혔다. 가만히 이엘리를 바라보던 황녀가 나긋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공작님께서도 공작 부인을 마음 깊이 사랑하시고요.”
“그, 그건.”
“공작 부인께서 그런 표정을 지으실 땐, 공작님 이야기를 할 때 외에는 없는걸요.”
이엘리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양 뺨을 더듬었다.
이엘리는 조심스럽게 황녀를 마주 보았다.
“……그런 표정이요?”
“지금 같은 표정이요. 수줍어서 어쩔 줄 모르는 그런 얼굴.”
“그 정도는 아니예요!”
“그런가요? 제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데요.”
황녀는 찻물로 입술을 축이며 나지 막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그렇게 티가 나나.
솔직히 요새 자카리의 행동 하나하 나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경험을 하긴 하지만.
‘그래도 그 정도는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데.’
설마 자카리에게도 내 표정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건 아니겠지. 이엘리는 입술을 당겨 물었다.
“하지만 나쁘지 않잖아요? 서로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부부라니요.”
“황후 전하.”
“전 사실 결혼에 대해서 회의적이 예요.”
그렇게 말하는 황녀의 낯에 열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황녀에게 있어 결혼은 항상 끔찍한 존재였다.
결혼 동맹의 도구가 아니면, 황제 부부처럼 서로를 증오하는 관계.
그나마도 어머니는 하잘것없는 신분이었기에, 황녀의 아버지인 선대 황제에게 물건 고르듯이 간택 당하지 않았나.
“하지만 공작 부부를 볼 때에는 예외예요.”
찻잔을 내려놓은 황녀가 어깨를 으 쓱거렸다.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는 회색 시선이 투명하다.
“두 분을 볼 때면 결혼도 나쁘지는 않구나, 그런 생각이 들거든요.”
이엘리는 드물게 어쩔 줄 몰라 찻잔 위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럼에도 자카리가 자신을 마음 깊이 사랑하는 것 같다는 말을 듣는 건 굉장히 기뻤다.
그때 잔디를 밟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엔.”
“자카리?”
분홍색 속눈썹을 팔랑거리며 이엘리는 자카리를 돌아보았다.
자카리가 그림처럼 웃고 있었다.
“아, 황녀 전하도 계셨군요.”
“마침 공작님의 이야기를하고 있었답니다.”
황녀가 자카리를 향해 상냥하게 말했다.
자카리는 조금 의아한 얼굴로 황녀 와이엘리를 본다.
“제 이야기라니요?”
“그게, 이번에 마수 토벌에 직접 출정하신다고 들었거든요.”
황녀는 살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카리는 그저 제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보일 따름이었다.
“계속 마수 토벌에 출정하시는 건 가요?”
“예. 소년 시절부터 나갔습니다.”
“대단하세요…… 공작 부인께서 걱정이 많으시겠는 걸요.”
그 말에 이엘리는 허를 찔린 얼굴을 했다.
자카리가 언제나 무사히 돌아온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내 심 그를 걱정하며 밤을 새우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이런, 정곡을 찔렸네.’
머쓱해진 이엘리는 힐끔 자카리를 돌아보았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친 자카리가 말갛게 웃어 보였다.
넌 모르겠지, 돌아온 네 몸에 자잘한 상처가 남아 있을 때마다 내 마음이 베인 양 욱신거리는 것도.
“그것보다 날씨가 차가운데 두 분 모두 왜 안에 계시지 않고.”
“괜찮아요. 북부의 가을은 굉장히 운치가 있네요.”
황녀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가을의 정원을 바라보는 황녀의 표정은 무척 평화로워 보였다.
“황녀 전하, 이엔을 잠시 데려가도 될까요?”
그때 자카리가 이엘리에게 물었다. 황제를 대할 때와는 다르게 정중한 목소리였다.
살짝 속눈썹을 들어 올린 황녀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금슬 좋은 부부를 바라보는 건 언 제나 흐뭇하다.
“그럼요. 오히려 두 분의 오붓한 시간에 제가 방해된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운걸요.”
“그런 건 아니예요. 황녀 전하께서 북부에 머물러 주셔서 정말 기쁘답니다.”
다정하게 말한 이엘리가 몸을 일으켰다.
자카리와 손을 맞잡은 그녀가 상냥하게 말을 잇는다.
“그럼 잠시만 다녀올게요.”
“잠시가 아니라 하루 종일 다녀오셔도 괜찮답니다.”
황녀는 농담처럼 대답했다. 둘은 나란히 얼굴을 붉혔다.
“그럼 이따 다시 뵈어요.”
“그래요."
두 부부가 총총걸음으로 정원을 가로질러 사라진다.
그 뒷모습을 보던 황녀가 한숨을 쉬었다.
“후우.”
제 오라비를 보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마음이 편해질 줄은 몰랐다.
언제 오라비에게 폭력이나 모욕을 당할지 경계하지 않아도 되는 삶. 황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평화로운 가을이었다.
* * *
이엘리와 자카리는 나란히 손을 잡은 채 자박자박 정원을 걸었다.
가을이 내려앉은 정원의 색채는 화려했다. 마주 잡은 손끝의 온기가 따사로웠다.
이엘리는 자카리를 살며시 올려다 보았다.
“무슨 일이기에 여기까지 찾아왔어?”
“뭐야, 무슨 용건이 있어야 널 찾아를 수 있는 거야?”
자카리의 뻔뻔한 얼굴에 이엘리는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그가 냉큼 대답을 한다.
“보고 싶어서 찾아간 거야.”
이엘리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아니, 황녀 전하까지 두고 올 거라 면 뭔가 중요한 용건 아니었어? 게다가 우리는 밤낮으로 매번 얼굴을 본다고!
그때 자카리가 씩 웃으면서 말을 덧붙였다.
“……라는 가벼운 용건이라면 물론 나도 좋겠지만.”
그렇게 말한 그가 분홍색 정수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새파란 시선이 그녀를 물끄러미 본다.
“마수 퇴치를 하는 동안에는 혼자 성에 있어야 하는 게 마음에 걸려 서.”
“마수 퇴치를 나간 게 한두 번도 아니고, 뭐 어때. 난 괜찮아.”
“하지만 그때는 아버지가 항상 네 곁에 계셨지."
자카리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 말에 이엘리는 잠시 침묵했다.
그 이름은 정말 오랜만에 듣는 기분이었다.
테론 헤센바이츠. 자카리의 아버지 이자 그녀의 시아버지.
매몰참 아래에 다정함을 숨겼던, 제 아들을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몰랐던 사람.
그럼에도 아들을 사랑했던 사람.
“너를 혼자 공작성에 두는 건 처음이잖아.”
그가 쓰게 웃었다. 따스한 손이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자카리가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솔직히 아버지가 계셨을 땐, 내가 네 곁을 비워도 그나마 마음이 놓였었는데.”
“……자카리.”
“아버지도 없는 성에 널 혼자 두는 건…… 역시 좀 불편하네.”
그렇게 말한 자카리가 그녀를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인다.
“게다가 이번에는 황녀 전하도 공작성에 계시니까.”
“아냐, 너무 마음 쓰지 마. 황녀 전하는 내가 잘 챙기고 있을 테니까.”
“황녀 전하가 아니라 네가 신경 쓰이는 거야.”
자카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엘리는 생긋 눈웃음을 지은 후 자카리에게 힘을 주어 말한다.
“그것만큼 쓸데없는 걱정도 없어, 난 괜찮은걸.”
“네 말에는 신뢰도가 부족해, 이엔.”
그렇게 말하는 자카리의 표정은 조 금 뚱해 보였다. 그가 심술궂은 소년처럼 입술을 모으며 말한다.
“게다가 이번 출정은 조금 길어질 지도 모른단 말이야.”
“얼마나 길어지는데?”
“한 일주일 정도?”
그 말에 이엘리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사실 예전 출정은 한 달을 꼬박 채우곤 했었다.
하지만 자카리가 소공작으로서 공작가의 기사들을 지휘한 이후 그 일 정이 상당히 줄어든 것이다.
“하지만 자카리, 보통 출정은 5일에서 일주일 정도 나가잖아?”
이엘리는 뚱한 목소리로 자카리에게 되물었다.
출정이 얼마나 길어지기에 저렇게 말하나 생각했는데, 고작 평소의 일 정을 꽉 채우는 것뿐이라니.
어린아이를 걱정하는 것도 아니고, 정말.
“지금 말하는 일주일도, 예전에 비 하면 상당히 기간을 축소한 거 아니야?”
“그럴 리가. 일주일을 꽉 채워서 나가다니, 안 될 말이야.”
그러나 자카리는 단호했다. 가을 하늘을 꼭 닮은 푸른 눈동자가 이엘리를 걱정스레 바라본다.
“게다가 넌 매번 괜찮다고 하잖아.”
“하지만 정말로 괜찮은걸. 네가 너무 걱정이 많은 거니까, 그런 걱정 은 말고……”
이엘리는 힐끗 자카리를 올려다보았다. 그늘진 얼굴을 바라보던 이엘리가 충동적으로 물었다.
“그보다, 자카리.”
“응?”
“넌 이제 괜찮은 거야?"
“나?”
자카리가 눈을 깜빡였다. 자카리의 손가락을 감아쥔 이엘리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한다.
“전대 공작님.”
자카리는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이엘리의 연녹색 눈동자가 자카리를 똑바로 응시했다.
“보고 싶다거나…… 그립지는 않아?”
“……”
“저기,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거 라면 미안해.”
이엘리는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자카리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조심스레 말했다.
“하지만 아들이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건 당연한 감정이라고 생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