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이엘리 앞에서 황녀에게 폭력을 사용한다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 여 주지 않았나.
게다가 노골적으로 황후를 무시하는 모습까지 만인의 앞에 드러내 놓았다. 황녀가 차근차근 입을 연다.
“네. 그리고 가장 이상한 건……”
“이상한 건?”
“……공작 부인께서 공작가로 돌아 간 이후부터 그렇게 변했다는 거예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황녀가 이윽고 말을 이었다.
황녀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무엇이 폐하를 그렇게 변하게 한 건지, 어떤 한 가지를 짚어 원인을 찾는 건 어렵지만요.”
황녀의 말을 듣고 보니, 황제의 예민함이 새삼스럽게 더욱 피부에 와 닿았다.
이엘리와 자카리는 침묵했다.
“게다가 황제 부부께서는 사이도 무척 안 좋으시거든요.”
“뭐, 그렇게 보이기는 했습니다 만……”
자카리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대답했다.
황녀는 진지한 얼굴로 두 사람에게 말을 덧붙였다.
“국혼 이후로도 두 분은 단 한 번 도 합방을 하신 적이 없으세요.”
“……그게 가능한가요?”
이엘리가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공작가의 주인인 자카리와 이엘리 도, 공작가를 이어 갈 후계를 낳을 의무가 있다.
그들도 그러할진대, 리펜베르크 제국의 주인인 황제 부부는 어떻겠는 가.
“그도 그럴 것이, 황제 폐하와 황 후 폐하 모두…… 상대방을 거의 찾지도 않으시니까요.”
그렇게 말하던 황녀가 문득 말을 멈췄다. 황녀의 얼굴 위로 죄책감이 스쳤다.
“하지만 어떤 이유를 갖다 댄다고 한들, 오늘 공작 부인이 당한 일을 정당화할 수는 없죠.”
그렇게 말한 황녀가 깊숙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또 한 번 사죄한다.
“다시 한 번 정말로 죄송해요, 두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건 황녀 전하의 잘못이 아니예요.”
고개를 가로저은 이엘리가 입을 열었다.
아까 뭉뚱그렸던 그 질문을 다시 해야 할 시간이다.
“그보다, 황녀 전하.”
“네?”
“혹시 폐하께서 황녀 전하께…… 평소에도 그렇게 폭력을 휘두르시나 요?”
한참을 머뭇거리던 이엘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황녀는 대답 대신 희미한 눈웃음을 지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 미소로 이엘리는 황녀의 대답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녀가 입술을 당겨 물었다.
“어째서 그런 폭력을 참고 계셨던 건가요?”
“황녀의 지위마저 남아 있지 않은 저는……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으니까요.”
황녀는 담담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그 담담함이 서글폈다.
이엘리는 물론이고 자카리마저도 더 이상 황녀에게 질문을 하지 못했다.
이윽고 그들은 인사를 나눈 후, 각 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 * *
로렌 백작 영애는 입술을 사리물며 연회장 구석에 숨어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빠져나가고 싶었지만, 이런 일을 겪고 연회 중간에 빠져나가는 건 제 자존심이 허락 하지 않았다.
‘이런 수치를 겪다니, 너무 분해.’
백작 영애는 이를 갈았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은 공작의 하나뿐인 사촌 여동생이었다.
이런 대접을 받을 만한 위치가 아니라고 영애는 굳게 믿고 있었다.
정말이지 그 행동은 부당하고 오만했다. 게다가.
‘방금 전, 다른 영애들…… 분명히 날 무시하고 있었어.’
백작 영애는 조금 아까 있었던 일을 다시 되새겼다.
그녀는 황가의 총애를 받는 백작가의 영애이자 공작가의 외척이었다.
그런 후광 때문에 평소에는 다른 귀족 영애들도 그녀에게 잘 보이려 애를 썼는데.
백작 영애께서도 이제 좀 철이 드셔야 할 텐데요.’
'언제쯤 정신을 차리려고 저러시는 지.’
부채 뒤로 소곤소곤 귀엣말을 하던 귀족 영애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연회가 시작됐을 무렵에는 어떻게 든 자신에게 말을 걸어 보려던 그녀 들은, 백작 영애를 완벽하게 무시하며 지나가 버렸다.
‘평소라면 나에게 말 한 마디 걸려 고 눈에 불을 켜던 것들이!’
백작 영애가 쌕쌕거리며 숨을 몰아 쉬었다.
‘공작 각하께서도 정말 너무하셔, 어떻게 내게 이럴 수가 있어?’
백작 영애는 수치심에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약간의 예의는 지켜 줘야 하잖아!
‘귀빈들 앞에서, 고작 하녀에게 사 과를 하라고 명령하시다니!’
심지어는 하녀에게 고개까지 숙였다. 그때의 일을 다시 되새기던 영애는 입술을 잘근거렸다.
‘그따위 남부 촌뜨기보다 내가 더 가까운 위치 아냐?’
그녀는 씩씩 숨을 몰아쉬었다. 외가 쪽 사촌 여동생인 그녀는 자카리 와도 일부 피가 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와 이엘리는 그저 결혼으로 엮인 사이일 뿐, 이혼하면 다시 남남이 될 것 아닌가.
‘정말로……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 지도 모르시고!’
백작 영애는 눈물 고인 눈가를 손으로 거칠게 닦아 내면서 속으로 원망을 퍼부었다.
이게 다 남부 계집에게 눈이 홱 돌아간 탓이다.
두고 보라지, 이번 일은 이대로 넘어가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내심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쉬이 연회장 구석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연회도 이제 끝물이었다. 공작가의 연회를 한껏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 서, 황제는 홀로 기분이 나쁜 얼굴
을 하고 있었다.
그는 치받는 욕설을 꾹꾹 눌러 삼켰다.
‘젠장.’
어째서 공작 부인에 관련한 일은 제대로 끝난 적이 없단 말인가.
눈엣가시인 공작은 물론이고 여동생인 안네로제마저 사람을 불쾌하게 만든다.
그러던 중, 황제는 문득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망할 계집애, 고작 남부에서 온 시골뜨기였던 주제에!”
거친 목소리로 분노를 토해 내는 아가씨가 한 명 있었다.
사람들의 눈이 잘 닿지 않는 기둥 뒤에 숨어 화를 내고 있었기에, 제 모습을 남이 보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았다.
“……영애는?”
황제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아가씨가 뒤를 돌아보았다.
황제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제 앞에서 얼어붙어있은 조그마한 소녀는 아마, 로렌 백작 영애라고 했던가.
그러고 보니 예전에 포르투나 오페라하우스에서 한번 만났던 것 같기 도 하고.
“폐, 폐하를 뵙습니다.”
로렌 백작 영애는 황급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런 그녀를 보던 황제는 순간, 아주 재미있는 생각을 해 냈다. 황제가 씩 웃었다.
“고개를 들게.”
“……예?”
“얼른.”
나긋한 목소리에 백작 영애는 조심스럽게 시선을 들어 올렸다. 황제는 영애를 똑바로 응시했다.
“……”
그 순간 백작 영애의 눈동자가 나른하게 풀렸다.
황족 중 일부가 물려받는 ‘아샤의 축복’, 다른 이름으로는 '매혹의 마안’. 그 힘이 발휘된 것이다.
황제는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영애.”
“……네, 폐하.”
느릿한 대답이 들려왔다. 황제는 흥미로운 얼굴이 되어 백작 영애를 바라보며 물었다.
“영애는 공작 부인을 어떻게 생각 하지?”
“……미운 여자입니다.”
백작 영애의 눈동자에 한쪽으로 치우친 감정이 서리기 시작했다.
백작 영애가 날카롭게 말했다.
“그런 여자를 어떻게든 해 버렸으면 좋겠어요.”
“짐 또한 그렇다네.”
“페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신다는 말씀이신가요?”
백작 영애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황제의 입술에 걸린 미소가 좀 더 짙어졌다. 그가 느른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그렇다네. 그래서 짐에게 재미있는 생각이 하나 있는데.”
“예, 폐하.”
“문제는 영애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걸세. 그러니 짐을 좀 도와주겠나?”
“물론이지요.”
백작 영애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공작 부인과는 다르게 착한 아가씨로군.”
“아, 감사합니다.”
몽롱한 표정으로 그녀가 대답했다. 고개를 숙인 황제가 백작 영애의 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 재미있는 생각이 무엇이냐 면……”
잠시 후, 백작 영애의 귓가에서 입술을 떼어 낸 황제가 백작 영애와 시선을 맞췄다.
“잘 알아들었지?”
“네, 폐하.”
“또한, 오늘 있었던 일은 모두 잊는 거야.”
황제의 손이 백작 영애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짙은 회색 눈동자가 그녀를 똑바로 보았다.
“이건 누군가가 시켜서 저지르는 일이 아니라, 영애 스스로의 생각일 세.”
그 말에 백작 영애는 희미한 위화 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못을 박았다.
“알겠나?”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악마처럼 달콤했다.
백작 영애는 또 한 번 홀린 양 고개를 끄덕였다.
이엘리는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 먼저 귀가했다.
이런 얼굴 상태로는 도저히 연회장에 돌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연회도 끝물이었기에, 남은 귀빈들은 집사가 감당할 수 있을 터였다.
“아야야……”
“가만히 있어.”
자카리가 인상을 쓰며 이엘리의 뺨에 연고를 발라 주었다.
그녀는 데굴데굴 눈동자를 굴렸다.
“자카리, 넌 연회장에 돌아가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네가 이렇게 다쳤는데 내가 어떻게 돌아가?”
자카리는 정색을 했다. 의자에 앉아서 다리를 달랑달랑 흔들던 이엘리가 문득 입술을 열었다.
“우리, 입장이 좀 바뀐 것 같지 않아?”
“뭐가?”
이엘리는 인상을 찡그린 그대로 자카리에게 웃어 보인다. 그러고는 장난스럽게 입을 열었다.
“예전에는 내가 널 치료해 주곤 했잖아.”
“그게 뭐? 이엔, 넌 그보다 이런 상황에서 웃음이 나와?”
기가 막힌 자카리가 이엘리에게 말했다.
하지만 이엘리는 여전히 배실배실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잔소리를 하는 것도 보통은 내 쪽이었는데.”
“이엔, 너 정말.”
“이런 날도 오는구나.”
이엘리는 눈매를 곱게 접어 보였다. 자카리는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자 화를 내려던 마음까지 쏙 들어가 버린다.
길게 한숨을 쉰 자카리가 그녀의 이 마에 키스했다.
공작성의 대집사는 안주인께서 갑 자기 몸이 좋지 않으셔서 공작 부부 가 먼저 들어갔노라 전언을 남겼다.
사람들은 약간 수군거리긴 했지만 대충 납득하는 분위기였다.
대집사를 중심으로, 공작가의 사용인들은 능숙하게 손님들을 배웅했다.
두 주최자가 사라진 연회는 그렇게 종료되었다.
* * *
황제 부부는 다시 제도로 귀환했다. 하지만 안네로제 황녀는 북부에 남았다.
황녀는 매번 황제의 등쌀에 시달리면서 살았다. 그런 황녀가 안타까웠 던 황후가 호의를 베풀어 준 것이었다.
“북부에서 조금 쉬다 오세요.”
“그러세요, 황녀 전하.”
공작 부부도 환영의 뜻을 표했다. 여기서 가장 의외인 건 황제의 반응이었다.
평소라면 공작가와 접점이 있는 걸 굉장히 싫어했을 황제였으나, 이번 엔 이상하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푹 쉬고 오너라.”
“……감사합니다, 폐하.”
황녀는 미심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었다.
공작 부부는 황제의 선선한 허락을 바라보며 조금 의심스러운 얼굴을 했으나, 말끔한 표정을 하고 있는 황제의 속내를 알 길은 없었다.
그렇게 공작가의 여름이 지나고 있었다.
16. 경계에 서서 (1)
어느새 가을의 초입이었다. 하늘은 점차 높아졌고, 푸르렀던 나무들도 슬슬 붉고 노란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정원에 티 테이블을 내놓고 앉은 이엘리는 오랜만에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북부는 단풍이 좀 더 빨리 드네 요.”
“그렇죠, 아직 남부는 나무들도 파릇파릇하겠죠?”
“그러게요. 아직 남부는 좀 덥다 싶을 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