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공작 부인. 당신이 이런 선택을 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런 선택을 하게 된 건 모두 폐하 때문이지요.”
이엘리는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처럼 냉랭한 얼굴을 했다. 꽃잎 같은 입술이 움직인다.
"아직 전 폐하께서 아샤꽃이 핀 정원에서 제게 하셨던 짓을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
황제는 입술을 당겨 물었다. 미간을 좁힌 황제가 이엘리를 빤히 응시했다.
또다. 이엘리는 어깨를 굳혔다. 자카리와 이혼하게 되었던 그 계기, 그녀를 겁박하며 황제가 중얼거렸던
그 말.
‘그런데 당신, 어째서 이렇게 멀쩡합니까?’
그때의 황제와 지금의 황제는 표정이 비슷했다.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을 때의 그 초조한 낯.
"폐하, 그만 좀 하십시오!”
그때 악을 지른 황녀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황제가 차갑게 제 여동생을 노려보았다.
“폐하께서 가지신 힘은 함부로 남 용하기 위해 주어진 힘이 아닙니다!”
황제가 움찔했다. 이엘리는 느슨하게 고개를 꺾었다.
황제를 노려보던 이엘리가 차게 물었다.
“……이번에도 제게 ‘아샤의 축복’을 사용하려 하셨습니까?”
황제가 입을 다물었고, 이엘리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세 사람 사이로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 * *
백작 영애가 낯을 붉히며 연회장을 뛰쳐나간 이후로, 자카리는 완벽한 연회의 주최자가 되었다.
연회의 진행을 살피는 그에게는 백작 영애에 대한 약간의 관심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로렌 백작 영애께서는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행동하신 건지, 도무지 속내를 모르겠네요.”
“설마 자신이 아직도 공작가의 외 척이라는 생각으로 그러신 걸까요?”
“만약 그런 거라면 철이 덜 들었다고 할 수 밖예요.”
사람들은 낮게 수군거렸다. 어쨌거나 자카리의 노력은 성과를 거두어 서, 연회장의 분위기는 상당히 부드러워졌다.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던 중 자카리는 문득 창밖을 곁눈질로 응시했다.
‘가만, 그러고 보니.’
자카리의 표정이 조금 의아해졌다. 아까 전부터 계속 허전하다 했더니, 허전한 이유가 있었다.
‘아직도 이엔이 돌아오지 않았네.’
자카리가 아까 나갔다 돌아온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그러니 슬슬 황녀와 이엘리, 두 사람이 돌아올 때도 되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소식이 없다. 참다못한 자카리가 몸을 돌렸다.
"공작 각하, 어딜 가십니까?”
"잠시 볼일이 생겨서 말입니다.”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낯을 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 자카리는 의례 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금방 다녀올 테니, 다들 연회를 즐기시지요.”
비록 예의 바른 행동과 어조였지만 그 태도는 단호했다.
자카리는 곧장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우선 이엘리와 헤어졌던 그 장 소로 가 볼 생각이었다.
그러던 중, 자카리는 멈칫섰다.
어디선가 대화가 들렸다.
말다툼을 하는 것처럼 격한 목소리였다. 그는 미간을 좁혔다.
‘뭐지?’
자카리의 걸음이 조금 더 빨라졌다. 멀리서 듣느라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던 목소리가 점차 또렷하게 들렸다.
그러던 중 자카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가녀린 뒷모습이 눈에 익었다.
‘지금 상황은 도대체……’
저 앞에는 세 사람이 모여 있었다. 하나는 황제, 다른 하나는 황녀, 마지막으로 이엘리.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다. 그들이 언성을 높일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던 그가 화들짝 놀랐다.
“그 입 닥쳐라!”
고함을 지른 황제가 손을 크게 휘둘렀다. 명백히 황녀에게 가하는 폭력이었다.
짝! 그 순간 황녀를 밀쳐 낸 이엘리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황제는 당황했고, 황녀의 낯은 창백하게 질렸다.
“고, 공작 부인!”
당황한 황제가 언성을 높였다. 이엘리의 사과 같던 뺨이 새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순간 눈앞이 분노로 하얗게 흐려졌다. 이성이 툭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자카리는 달리기 시작했다.
"참으로 이상해. 어째서 당신에게 는 ‘아샤의 축복’이 통하지 않는 거지?”
황제는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 되어, 황망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바로 그때.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얼음 칼날처럼 예리하게 날을 세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이엘리가 뒤를 돌아보았다.
“자카리?
그녀의 등 뒤로 어느새 자카리가 서 있었다.
자카리는 성큼 걸음을 옮겨 거리를 좁혔다.
이엘리의 어깨를 가볍게 끌어안아 제 등 뒤로 밀어낸 자카리는, 서늘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지금 페하께서는 제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셨습니다. 맞습니까?”
"아닙니다, 공작. 이건 예상치 못한 사고였습니다. 그러니까……!”
"변명은 들을 필요 없습니다.”
얼음 속에 갇힌 불길이 저러할까. 모든 것을 태워 버릴 것처럼 새파랗 게 타오르는 눈동자였다.
“정말 슬픕니다.”
“예?”
“제가 황제를 시해한 첫 번째 공작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요.”
“고, 공작!”
황제가 다급하게 자카리를 외쳐 불렀으나, 지금 자카리는 지금 반쯤 이성을 잃고 있었다.
스르릉, 칼날과 검집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순식간에 튀어나온 검 날이 황제를 곧게 겨누었다.
“……역시 차가운 피의 헤센바이츠. 황제에게도 가차 없군요.”
황제가 입술을 깨물며 자카리에게 말했다.
실제로 자카리는 자신을 공격하지 못할 것이다.
공작가의 영토에서 황제가 시해된다.
내전이 발발하기에도 모자람 없는 조건 아닌가. 게다가 화친을 위해 황제가 직접 북부에 방문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자카리의 검날은 흔들리지 않았다.
‘설마, 정말로 검을 휘두르려고?’
그렇게 생각하자 황제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겉으로는 빙해처럼 차가워 보이는 공작이었지만, 공작 부인에 한해서는 언제든지 이성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자카리.”
등 뒤에서 있던 이엘리가 자카리의 손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자카리는 흠칫 어깨를 굳혔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잖아.”
“하지만..!”
“난 괜찮으니까.”
그녀의 담담한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자카리는 희미하게나마 이성을 되찾았다.
자카리를 진정시킬 수 있는 사람은 이엘리가 유일했다.
감히 나의 그녀에게. 자카리는 짓씹둣 말을 뱉었다.
"아무리 아샤의 축복을 타고났다 한들……”
“고, 공작.”
“……모든 사람들이 전하를 좋아할 거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말한 자카리가 황제를 쏘아 보았다.
금방이라도 상대를 죽일 것처럼 살벌한 눈초리다.
“당장.”
자카리가 힘을 주어 입술을 열었다. 새파란 눈동자는 마치 고온의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제 눈앞에서 사라져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폐하.”
얼음을 갈아 만든 것 같은 나직한 목소리였다.
황제를 대하는 태도로는 지나치게 오만불손했으나, 그럼에도 황제는 더 말을 붙이지 않았다. 자신이 잘 못한 건 알고 있었으니까.
‘……정말로 내게 검을 휘두를 기세로군.’
황제는 두려움을 삼키며 황급히 몸을 돌렸다.
저 멀리 사라지는 황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자카리가 이윽고,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황녀는 어쩔 줄 모르고 눈앞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후우.”
자카리는 제 얼굴을 마구 쓸어내렸 고, 그의 곁으로 다가간 이엘리가 걱정스럽게 묻는다.
“자카리, 괜찮……”
“네가 왜 그런 걸 물어보는 거야?”
자카리는 날카롭게 되물었다. 이엘리는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자카리가 이엘리를 마주 본다.
"이엔, 너야말로 괜찮아?”
“응, 괜찮아.”
“이럴 땐 괜찮으면 안 돼, 이엔.”
자카리는 간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자카리의 손이 이엘리의 뺨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린다.
“아프지 않아?”
“괜찮, 아니.”
반사적으로 괜찮다고 말하려던 이엘리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솔직하게 입을 열었다.
“아프긴 하지만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어.”
자카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건 모두 그 자신의 잘못이었다. 이엘리를 혼자 두어서는 안 됐다.
그녀가 연회를 주최하는 것에 대한 책임감이 투철한 것을 이용하여, 황제가 이엘리에게 접근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예상했어야 했는데.
그의 손가락이 다시 그녀의 뺨을 건드렸다.
“……”
짧은 통증이 일어, 이엘리는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
순간 자카리는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어 버렸다.
“가자.”
“응?”
“돌아가자고. 너, 뺨 치료해야 해.”
그 말과 동시에 자카리가 그녀의 손을 꼭 붙들었다.
하지만 이엘리는 제 고개를 가로저었다.
"잠시만, 자카리.”
“왜? 아니, 치료부터하고 이야기 해.”
자카리는 대번 불만스러운 얼굴을 했다.
하지만 이엘리는 단호한 낯으로 자카리를 마주 보았다.
“황녀 전하께 여줘 볼 것이 있어.”
그 말에 화들짝 놀란 황녀가 어깨를 굳혔다.
그런 황녀를 바라보며 그녀는 어색하게 웃었다.
“전하, 전 전하를 잡아먹지 않아 요.”
“……미안해요.”
황녀는 차마 그녀를 바라보지도 못했다.
공작 부인의 부어오른 뺨을 보자 죄책감이 가슴을 조인다.
그녀가 그렇게 다친 원인은 명백히 자신 때문이었다.
저를 보호하기 위해 다치고 말았다.
“아뇨, 전하께서 사과하실 일이 아니예요.”
하지만 이엘리는 명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목소리에 황녀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보다도 황녀 전하께서는 계속 폐하께 이런 일들을 당해 오셨던 건가요?”
이엘리가 황녀에게 질문했다. 이엘리를 바라보던 황녀는 이윽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설마 황후 폐하께서 도……”
"아마 황후 폐하는 그 정도는 아닐 거예요.”
황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약간 안도했고, 그와 동시에 황녀에게 안쓰러움을 느꼈다.
"황후 폐하께는 론도 후작가가 있으니까요. 론도 후작가는 중앙 정계에서 꽤 영향력이 있죠.”
그렇게 설명하던 황녀의 눈동자가 복잡한 빛을 품었다.
긴 한숨을 내쉰 황녀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폐하의 그런 이성도 언제 까지 유지될지…… 그건 잘 모르겠네요.”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이엘리는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이 이야기를 해도 될는지. 황녀의 시선이 불안하게 떨렸다.
하지만 황녀 또한 이야기를 터놓고 상담할 대상이 필요한 건 사실이었다. 황녀가 숨을 삼켰다.
"요새 폐하께서 조금…… 이상해지 신 것 같아요.”
머뭇거리던 황녀는 잠시 후, 두 사람에게 말을 꺼냈다.
황녀의 목소리는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물론 예전에도 유하신 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상식은 있으셨거든요.”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말씀이신가요?”
"맞아요. 예전의 폐하가 보여 주시 던 이성적인 모습은 모조리 사라졌 어요.”
황녀는 미간을 좁히며 말을 이었다.
무언가를 고민하는 것 같던 황녀가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예전보다 더 편집증적인 모습이 굉장히 심해지셨거든요."
"편집증적인 모습이 심해졌다, 라……”
그러고 보면 그런 것도 같다.
이엘리는 오늘 본 황제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래도 결혼 동맹이라는 황녀의 이용 가치를 인지하고 있어서인지, 남 앞에서는 상식적인 모습을 보이던 그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