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오늘 연회는 어떠셨나요?”
“즐거웠어요.”
“황녀 전하, 즐거우신 분은 그런 표정을 짓지 않아요.”
이엘리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황녀는 허를 찔린 얼굴을 했다. 사실 그랬다. 황녀는 오늘의 연회가 전혀 즐겁지 않았으니까.
제국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제 오빠는 전혀 황제답지 못하다.
‘내가.’
내가 만약 황제의 지위를 가질 수만 있다면, 오라버니보다는 훨씬 더 잘할 수 있을 텐데.
괴로운 사람들을 아껴 주고, 도와줄 텐데. 나처럼 차별 받는 사람이 없도록…… 정말 노력할 텐데.
“그냥……”
잠시 머뭇거리던 황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마음. 황녀가 웃었다.
“그냥요.”
“……”황녀 전하.”
“황제 폐하와 황후 페하의 관계가 좀 걱정스러워서 그래요.”
이엘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꼭 그것만은 아닌 것 같긴 했지만, 황녀가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이엘리가 따로 말을 덧붙일 수도 없었다.
황녀는 복잡한 얼굴이 되어, 나직하게 말했다.
“두 분께서는 제국을 떠받치시는 반석이신데, 서로 사이가 좋지 못하 시죠.”
“아……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 것 같아요.”
“공작 부인께도 보일 정도라니, 답도 없는 문제네요.”
황녀는 무거운 얼굴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숙인 고개 아래로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실은, 실은 말이예요. 아주 가끔씩은…… 미안해져요.”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황후 폐하를 황제 폐하의 곁에 묶어 두는 것이요.”
그 말에 이엘리는 침묵했다. 황녀 가 무슨 말을 하는지 너무 잘 알아서, 이엘리 자신도 답답해졌다.
황후는 황제 곁에서 행복해질 수 없다.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황후를, 제국의 어머니라는 자리에 억지로 가둬 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단순히 황제와 어울리는 신분이라는 이유로.
“그건…… 황녀 전하의 잘못이 아니예요.”
하지만 이엘리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고작이런 거였다. 또한 그 말은 사실이기도했다.
황녀가 무슨 힘이 있어 황후를 자 유롭게 해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나 황녀는 힘없이 웃어 보였다.
“그래도요.”
“황녀 전하.”
“어쩔 수 없이 저도 황족의 일원이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황녀의 회색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잠시 후, 황후가 시선을 꺾으며 말했다.
“저라도 죄스러워하지 않으면…… 누가 황후 페하께 사죄할까요.”
그 목소리에는 결혼에 의해 날개가 꺾여 버린 한 여자에 대한 인간적인 애정이 스며들어있었다.
또한 소중한 친구를 지켜 주지 못 한 것에 대한 죄의식도 함께였다. 이엘리는 입을 다물었다.
‘이럴 땐 무슨 말을 해야 하지.’
평소 나름대로 매끄러운 혀를 가졌 다 자신하는 이엘리였지만, 이런 슬 픔에 파묻힌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는 전혀 몰랐다.
그녀는 그저 묵묵히 황녀의 곁을 지켜 주기로했다. 그런데 그때.
“안네로제?”
그 순간 이엘리는 보고야 말았다.
어깨를 굳힌 황녀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올리는 것을.
“폐, 폐하.”
그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황제였다. 어둠을 삼켜 짙게 가라앉은 회색 눈동자가 바짝 얼어붙는다. 두려 움에 가득 찬 얼굴.
이엘리는 아연해졌다. 저게 오라비를 대하는 여동생의 태도인가.
“쓸모없는 계집, 네가 도대체 여기에서 무엇을……”
바짝 날이 섰던 황제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누그러진다.
황제는 비스듬히 서 이엘리를 불렀다.
“헤센바이츠 공작 부인.”
“……예, 폐하.”
“또 뵙는군요. 이번에는 운이 좋다 고 해야 할까요.”
그렇게 말한 황제가 입술 끝을 올리며 웃었다.
이엘리는 차마 그 미소에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오늘 몇 번이나 황제를 계 속 마주치는 건지. 차라리 만나지 않는 게 훨씬 좋은데.
“오늘 연회, 공작 부인과 함께 시 간을 보낼 수 있어 무척 즐겁습니다.”
“……”
“하지만 공작 부인께서 제게 웃어 주신다면 훨씬 더 즐거울 텐데요.”
매끄럽게 말한 황제가 이엘리를 향해 씩 눈웃음을 쳤다.
제도의 레이디들을 수없이 쓰러뜨린 아름다운 미소였으나, 그녀에게는 뱀의 미소보다 소름 끼치게 느껴졌다. 그녀는 미간을 좁혔다.
“폐하. 폐하께서 제가 웃을 수 있게 행동해 주시면 저도 기쁠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이엘리는 눈매를 좁히며 웃었다. 꽃처럼 화사한 미소였으되, 호의가 섞인 미소가 아니라는 것은 황제와 황녀 두 사람 다 알았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황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폐하.”
“뭐냐, 안네로제.”
황제가 날카롭게 대답했다. 평소 사람들 앞에서는 그래도 유한 황제인 척했던 모습은, 황녀를 대할 때는 모조리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하나 황녀는 애써 살가운 미소를 유지하며 말했다.
“헤센바이츠 공작 부인은 이미 남편이 있는 몸이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폐하께서는 황후 폐하의 곁에 계 셔 주시는 편이 옳은 처신이라 생각 합니다.”
황제의 눈빛에 바짝 날이 섰다. 비스듬히 고개를 내린 황제가 제 여동생을 그대로 노려본다.
“감히 네가 날 가르칠 수 있는 위치라고 생각하는 게냐?”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저는……”
“미천한 서녀인 주제에 자꾸 끼어 들지 말거라.”
얼음으로 빚은 양 싸늘한 목소리였다. 황녀는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미천한 서녀.
언제나 듣던 모욕이고, 그것이 사실이었음에도. 모욕은 언제나 아프다. 황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폐하.”
“공작 부인이 너와 친밀하게 지내 주니, 네가 나와 견줄 수 있는 황족 이라도 된 성싶으냐?”
황제가 노골적으로 빈정거렸다. 오 만한 그의 생각으로는 제 질책은 오히려 당연했다.
자신은 황제 제위를 얻은 적통 황족 아닌가.
감히 서녀인 주제에 자신에게 참견 하는 것이 무례했다.
“폐하, 공작 부인이 보고 있지 않습이니까. 부디 고정하세요.”
“고정? 네가 언제부터 내 감정에 참견할 수 있는 위치가 되었느냐?”
똑같은 상처를 백 번 헤집으면, 백 번의 고통이 돌아오는 것은 똑같았다. 황녀는 숨을 삼켰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는 단 지……”
“그 입 닥쳐라!”
발끈한 황제가 손을 들어 올렸다. 이엘리는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설마 지금 황녀 전하에게 폭력을 휘두르려 하는 거야? 이엘리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짝! 거친 손속이 날아들었다.
“윽!”
“……고, 공작 부인?!”
황제가 저도 모르게 외쳤다. 중간에 끼어든 이엘리가 황녀 대신 뺨을 맞은 것이다.
바닥에 나뒹굴던 이엘리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느닷없이 충격을 받은 머리가 띵하니 어지러웠다.
“……”
잠시 후, 이엘리는 느릿하게 시선을 들어 올렸다.
황제가 어찌나 세게 후려친 것인지 하얀 뺨 위로 새빨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
황녀를 대할 때와는 다르게 황제는 정말로 당혹한 낯이었다.
“공작 부인. 이게 무슨……”
“폐하.”
입 안이 터졌는지, 혀끝에서 비릿한 피 맛이 돌았다.
이엘리는 도전적인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황녀 전하께서는 제 가장 친한 친우입니다.”
가장 친한 친우. 그 말을 듣는 황녀의 눈동자에 갖가지 감정이 일렁거렸다.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말, 그리고 본 적 없는 행동이었다.
처음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보호 해 주는 건.
“그리고 전 황녀 전하께서 이런 대우를 받는 건 참을 수가 없습니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이엘리는 황제에게 말을 내뱉었다.
황제는 어쩔 줄 몰라하며 이엘리에게 손을 뻗었지만, 그녀는 그 손을 탁 쳐 버렸다.
자존심이 상했는지 황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폐하께 정말 실망했습니다.”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이엘리는 매몰찬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녀가 황제를 쏘아본다.
“어째서 옳은 말을 했다는 이유로, 이렇게 황녀 전하께 손을 드시는 겁니까?”
“옳은 말이라니요. 어찌 감히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대든단 말입니까?”
황제는 정말로 억울한 얼굴이 되어 이엘리에게 항변을 했다.
이엘리는 가슴속이 답답해졌다.
“이건 대드는 게 아니지요. 옳은 행동에 대해 말씀을 드리는 것이 잖습니까.”
“무릇 여자는 남자에게 순종해야 하는 법입니다.”
황제의 대답에 이엘리는 말문이 탁 막히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가 있는 건지.
“심지어 서녀인 저 아이가 저렇게 행동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 행동입니까?”
하지만 황제는 뻔뻔한 목소리로 이엘리에게 말을 덧붙였다. 이엘리의 눈에 확 불길이 일었다.
“이런 충동적인 행동은 폐하의 명예에도 모욕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오라비가 여동생을 훈계하는데 어 째서 공작 부인께서 그러십니까, 가족 간의 일입니다!”
가족 간의 일이라. 가족이라는 이 유만으로 도대체 어디까지 자율에 맡겨야 하는지.
상대방에게 짓눌려 시드는 걸 감내 하란 뜻인가? 혹은 조용히 폭력에 시달리다 목숨을 잃으란 뜻인가?
“공작 부인께서 끼어드시지만 않았어도 아무런 일도 없었을 겁니다!”
그때 발끈한 황제가 목소리를 높였다. 이엘리는 기가 찼다.
한 제국의 지배자라고 보기에 그 태도가 유치한 건 둘째 치고라도, 사람을 이렇게 함부로 대하다니. 이엘리는 입술을 짓씹었다.
‘게다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저 폭력을 용인해야 한다니, 말도 안 돼.’
무엇보다도 가장 화가 나는 건 황제의 뻔뻔한 태도였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건 물론이 고,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조차 인 지하지 못하는 저 태도.
반면에 황녀는 잔뜩 움츠러들었다.
'어째서 피해자가 저렇게 움츠러들 어야 해?’
잔뜩 얼어붙어 있은 황녀의 모습 자체가 폭력에 익숙하다는 증거였다. 이엘리는 숨을 삼켰다.
“황녀 전하께서 폭력을 당하시는 게 어째서 아무런 일도 없는 겁니까?”
이엘리는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솔직히 이엘리는 정말 화가 났다.
누구든 사람을 저렇게 함부로 대해 서는 안 된다. 그런 데다가 자신의 권력과 지위를 이용해 상대를 겁박 하다니, 최악이다.
“이건 가족 간의 문제입니다!”
“가족 간의 문제일수록 폭력이 아닌 대화로 해결해야지요.”
냉정하게 말한 그녀가 황제를 노려 보았다.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는 얼굴엔 경멸이 가득하다.
“이런 말씀은 드리려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만.”
이엘리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으며 황제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이엘리는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는 언제나 모든 일을 폭력에 의존하여 해결하려 하시더군요.”
“공작 부인, 그게 무슨 무례입니까?”
“아니요, 저는 사실만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폐하께서 무례하게 들으시는 것뿐이지요.”
그녀는 고요한 시선으로 황제를 마주 볼 따름이다.
황제는 그녀를 어떻게든 설득하려 들었다.
“공작 부인, 진정하십시오. 전 당신 과 엇갈리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십니다, 폐하.”
이엘리는 비뚜름히 웃었다. 차가운 비웃음이었다.
그녀는 침착한 목소리로 황제에게 말했다.
“이미 폐하와 전 수많은 악연들을 쌓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누구에게나 따스한 빛깔로 빛나는 연녹색 눈동자는, 황제를 바라볼 때 만큼은 차갑게 식는다.
“상대방에게 최소한의 예의만 지켜 도 저와 폐하가 엇갈릴 일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