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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화 (125/196)

125화

하녀는 엄연히 공작가에서 고용한 사람이었고, 잘못이 있다면 안주인에게 알려 안주인이 처벌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이런 대규모 연회에서 다짜고짜 손찌검부터 한다니. 이건 안주인을 모욕하는 것과 같았다.

“도대체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래도 페하께서 어떻게든 해 주시지 않을까요?”

“폐하께서는 로렌 백작가를 꽤나 신뢰하시니까요.”

사람들의 소곤거림을 듣던 황제는 금세 눈살을 찌푸렸다.

로렌 백작가는 요새 쓸모도 없는 주제에 자꾸 자신을 귀찮게 군다. 이렇게 엮여 나오는 건 사양인데.

그가 그렇게 생각하던 바로 그때.

“이게 무슨 일인가?”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흠칫 놀란 로렌 백작 영애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녀의 시선이 멈춘 자리에는 헤센바이츠 공작이 서 있었다.

얼음장처럼 차디찬 얼굴을 한 그가 입을 열었다.

“설마, 로렌 백작 영애.”

그 말에 로렌 백작 영애는 어깨를 바짝 굳혔다. 왜냐하면 자카리의 목소리에는 호의라고는 한 조각도 남아 있지 않았으므로.

자카리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하녀와 영애를 번갈아 보았다.

“영애가 지금 공작가의 하녀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이는데. 맞나?”

“저 하녀가 제게 무례한 짓을 저질렀기에 벌을 주었을 뿐입니다.”

“무례한 짓?”

백작 영애의 항변에 자카리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자카리는 바닥에 주저앉은 하녀를 보았다.

“에밀리.”

“예, 예?, ’

공작이 한낱 하녀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기에, 하녀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무슨 일이 있었지?”

“그, 그게……”

“에밀리, 네 주인이 누구지?”

그 말을 들은 하녀는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자카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낯으로 말을 이었다.

“백작 영애의 눈치를 보느라,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야.”

지극히 오만한 발언이었으나, 차마 로렌 백작 영애는 그 말에 반박하지는 못했다.

다만 분한 얼굴로 하녀를 노려볼 뿐이었다.

공작을 원망할 수는 없으니 하녀를 원망하는 그 치졸함이란.

“제, 제가 백작 영애께 실수를 저 질렀습니다.”

“실수?”

“예. 영애께서 손수건을 꺼내 드셨기에, 혹시 무언가 필요한 게 있으신지 여쭈었습니다.”

더듬거리는 그 말을 듣던 자카리는 싱긋 눈웃음을 쳤다.

온기라곤 없이 싸늘하게 식은 미소였다.

“그게 어째서 실수지?”

“……”실은 영애께서 저를 찾으신게 아니라고 하셔서……”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면서?”

“그, 그건."

하녀는 어쩔 줄 몰라 고개를 툭 떨어뜨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그는 슬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차가운 시선이 백작 영애를 똑바로 응시한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백작 영애는 그 부모를 무척 닮았 군.”

“……예?”

“자신의 주제도 모르고 행동하는 것.”

자카리의 고개가 비스듬히 꺾였다. 우아한 입술 위에 얹혀 있는 미소는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제 잘못은 인정조차 하지 않고 오만 방자하게 구는 것.”

“고, 공작 각하.”

“게다가 제국 유일의 공작 부인이 자, 북부의 안주인이 내 아내를 언 제나 무시하려 드는 것.”

그 말에 백작 영애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물었다.

하지만 자카리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자신들의 잘못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것까지.”

“아닙니다, 저는……!”

“모두 로렌 백작과 백작 부인이 평 소에 잘하는 짓이 아닌가.”

그 말에 백작 영애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섰다.

사람들은 나지막이 공작의 말에 동조했다.

“이번에 영애께서 좀 심하게 행동 하시기는 했어요.”

“맞아요. 연회를 주최하신 공작 부 인께 이게 무슨 무례인가요.”

“아랫것이 잘못을 했으면 마땅히 안주인께 그 처분을 맡겨야 하지 않나요.”

그랬다. 이곳은 북부였다. 엄연히 헤센바이츠 공작가가 지배하는 땅.

오랫동안 이 땅의 사람들은 공작가에게 충성을 바쳤다.

제도로 거의 이주하다시피 한 로렌 백작가를 옹호할 이는 없었다.

“게다가…… 하녀가 잘못한 게 맞기는 한 건가요?”

“손수건을 꺼내 든 건 백작 영애라 면서요.”

“하녀가 착각하기에 충분한 상황이었던 것 같은데요.”

게다가 사실이 밝혀지자, 그 사실 이 백작 영애에게 불리하게 작용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처음부터 이 일은 백작 영애의 잘못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자카리가 입을 연다.

“로렌 백작 영애.”

“예, 예? 가, 각하?”

싸늘한 눈빛에 피부가 따끔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저도 모르게 백작 영애는 말을 더듬거렸다.

“내가 영애에게 어떤 처분을 내려 야 할까?”

자카리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백작 영애는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고작 하녀와의 문제일 뿐이었다. 그런데 겨우 이 정도 일에 ‘처분’이 라는 단어를 입에 담는다니.

하지만 눈앞의 공작은, 자신이 말 한 일은 무조건 이루는 사람이었다.

영애는 당황하여 애원하기 시작했다.

“하, 한 번만 용서를……!”

“로렌 백작가는 언제나 용서를 빌지.”

자카리는 무표정한 얼굴이 되어 삐딱하게 섰다.

그의 목소리는 명백하게 빈정거리고 있었다.

“난 솔직히, 백작가가 용서를 구하는 것을 너무 많이 들었어.”

“공작 각하!”

“그래서 그런지, 용서를 빌 때마다 조금 지겨워진다네.”

그 말에 백작 영애의 온몸에서 핏기가 가셨다.

어떡하지? 난 약간 분풀이를 하고, 이번 연회에 조그마한 흠집을 내려 한 것뿐이었는데. 고작 하녀 때문에 일이 이렇게 커지다니!

백작 영애의 눈앞이 핑글핑글 돌았다. 자카리는 그런 영애를 한심하게 바라보고는 툭 말을 내뱉었다.

“내 아내가 정성 들여 주최한 연회 이니, 이번 단 한 번만 용서하겠어.”

“감사합니다……!”

백작 영애는 화색이 되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자카리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만.”

다만? 약간 마음을 놓은 것 같던 백작 영애는 대번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공작은 씩 웃었다.

“에밀리에게 사과하게.”

백작 영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말에 사람들이 얕게 술렁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귀족 영애에게, 평 민 하녀를 향해 사과하라는 명령을 내리다니.

자카리는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

“에밀리는 공작가에서 거둔 공작가의 고용인이지.”

어떻게 하녀에게 사과를 하라는 말씀을 하시나요! 그런 의미를 담아 백작 영애는 자카리를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자카리는 그 눈빛은 대번 무시한 채, 삐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런 고용인에게 말도 안 되는 잘못을 뒤집어 씌우려한 건 백작 영애 가 아닌가.”

백작 영애는 입술을 당겨 물었다. 공작이 하는 말은 모조리 사실이라 반박할 말조차 없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사과하는 편이 좋을 거야.”

“가, 각하!”

“내가 지켜봤을 때, 진심이 느껴지 지 않는다면.”

공작은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말을 잇는 공작의 목소리는 무척 가벼웠다.

“아까 내 아내에게 저지른 무례까지 모두 합산하여 백작가에게 그 대가를 치르게 할 테니까.”

자카리의 아름다운 얼굴은 여전히 냉랭하기만했다.

그 냉랭함에 주변 사람들마저 찔끔 할 정도였다.

평소 얼음처럼 침착한 공작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화를 내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아마도 공작 부인께 무례를 저질러서 그런 거겠지요.”

“공작 각하께서 저렇게 감정을 드러내시는 때는 거의 없으니까요.”

“정확히 말하자면 공작 부인과 관련된 일에만 저렇게 화를 내시지 요.”

사실 북부 사람들에게는 이미 익숙한 일이었다.

공작 부인은 공작의 역린이고,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성역이었다.

그런 공작 부인을 어떻게든 흠집 내려한 백작 영애가 바보 같았다.

“……미안해.”

뻣뻣하게 고개를 세운 채 백작 영애가 입을 열었다.

하녀는 어쩔 줄 몰라 앞치마 자락을 비틀었다.

비록 성의 없는 사과였지만, 살다 살다 귀족에게 사과를 듣게 될 줄은 전혀 몰라서 였다.

“로렌 백작 영애.”

하지만 자카리는 서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입으로는 미안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아쉽게도 그 표정은 전혀 미안해 보이지 않았으니까.

자카리의 눈썹이 꿈틀 움직이더니, 차게 말한다.

“영애는 진심 어린 사과를 그런 식으로 하나?”

“공작 각하, 그러면……”

“고개를 숙여야지.”

아무렇지도 않게 튀어나오는 그 말을 들은 귀족들이 헉, 숨을 몰아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귀족이 평민에게 고개를 숙이라니? 하지만 자카리는 진심이었다. 그가 눈썹을 까닥이며 말했다.

“안 하나?”

“……각하!”

“만약 이게 싫다면, 백작가는 공작가에서 정식으로 보내는 항의서를 받아야 할 걸세.”

그 말을 들은 백작 영애는 심장이 바짝바짝 조여 오는 기분을 느꼈다.

항의서를 받는다는 것은 정말로 가 문과 가문 사이의 분쟁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뜻이다.

결국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정말 미안해…… 날 용서해 주겠니?”

잔뜩 당황한 하녀는 고개부터 끄덕 이려했다.

하지만 손을 내저은 자카리가 영애를 채근했다.

“사과를 하려면 자신의 잘못부터 명확히 설명해야 하지 않겠나.”

“……”

백작 영애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분한 마음에 눈물이 가득 차오른다.

하지만 자카리는 냉정한 얼굴로 영애와 하녀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영애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실수한 것을 네게 뒤집어씌워서 정말 미안해. 앞으로는 이런 일, 없도록 할게.”

“레, 레이디.”

“그러니 이번 한 번만 나를 용서해 주렴.”

그 말에 하녀의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자카리는 차분한 목소리로 하녀를 다독여 주었다.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받아들이지 않아도 괜찮다.”

“……각하.”

“너무 마음 쓰지 말거라. 난 네가 납득할 때까지, 백작 영애에게 사과를 받아 낼 테니까.”

자카리의 단호한 대답에 하녀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지금 공작은 자신의 외척이기도 한 백작 영애를 내치고, 힘없는 하녀의 편을 들어 주는 것이다. 하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제 괜찮습니다.”

“그런가.”

하녀의 말을 들은 자카리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자카리는 뚱한 표정을 짓고는 말을 이었다.

“비록 만족스러운 사과는 아니지만…… 그래도 당사자인 에밀리가 괜찮다고 말하니.”

“……”

“이 정도로 넘어가도록 하지.”

그제야 백작 영애는 숙인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사람들이 시선들은 이쪽으로 모두 쏠려 있었다.

그러게 주제 파악을 좀 하지. 명백히 그런 뜻이 담긴 시선에, 영애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윽......!”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존심이 상한 영애는 홱 몸을 돌려 연 회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정말…… 로렌 백작가는 쓸모라고는 전혀 없군.’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황제는 지겨운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북부에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 지 원했더니, 저런 한심한 꼬락서니라니.

아무래도 백작가를 슬슬 내칠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 * * 

이엘리와 황녀는 정원에 마련된 벤 치에 나란히 주저앉았다.

머리 위로는 감청색 어둠, 사금파리처럼 반짝이는 별들.

황녀는 벤치 등받이에 가만히 등을 기대고 있었다. 이엘리가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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