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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화 (124/196)

124화

“제가 당한 무례함은, 공작가에서 로렌 백작가에게 처분을 내릴 문제 입니다.”

“그저 공작 부인의 마음을 풀어 주기 위함입니다.”

자신의 제안에도 이엘리가 전혀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자, 황제는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물론 폐하께서 저를 생각해 주시는 마음은 기쁘지만……”

이엘리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호의적인 뜻이 담긴 미소는 아니었다. 그녀가 말했다.

“……방법이 적절하지 못하다면, 행동의 의미 또한 퇴색되지 않겠습니까.”

“무슨 의미로 말씀하시는 겁니까?”

“폐하께서 더 잘 알고 계실 텐데요.”

그녀는 미소 지었다. 그 말은 황제가 계속해서 이엘리에게, 부적절하며 불유쾌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꼬집는 것이었다.

동시에 자카리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자카리가 고개를 기울인 다.

“페하, 대화 중에 죄송합니다만 제 아내를 잠시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비록 말 자체는 질문의 형식을 띠 고 있되, 형형한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황제는 찔끔했다.

“그러십시오.”

“감사합니다.”

전혀 감사하지 않은 얼굴로 인사한 자카리가 보란 듯이 이엘리를 에스코트했다.

이엘리는 그에게 환하게 미소했다.

황제는 함께 사라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싸늘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빨간 여름 장미가 가득 피어난 정원이 내다보이는, 인적이 드문 건물의 그늘 아래.

남청색 어둠이 벨벳처럼 드리워진 장소에 이엘리와 자카리는 나란히 멈춰 섰다.

연회장 안쪽에서 연주되는 음악이 아련히 들려오고, 그 사이로 바람이 잘게 쪼개져 흩어지는 여름의 감파 란 정원.

“자카리, 여긴 왜 온 거야?”

이엘리가 자카리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그가 양팔을 뻗었다.

그대로 그녀를 와락 끌어안는다. 조그만 몸이 품 안에 가득 안기자, 그제야 안도감이 들었다.

“……자카리?”

“하아.”

그대로 자카리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품 안에 갇힌 자그마한 몸이 옴 찔거리는 게 느껴진다.

“자카리?”

“오늘 하루 종일 너와 단둘이 보내는 시간이 너무 부족했어.”

그렇게 말한 자카리가 비스듬히 시선을 내렸다.

새파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차갑 게 빛난다.

“로렌 백작, 그 작자는 주제도 모르고 네게 그따위로 행동하기나 하고……”

“대신 내가 그만큼 갚아 줬잖아.”

이엘리는 나지막이 웃었다. 자카리는 마치 어린 소년처럼 이엘리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 옛날처럼, 그들이 처음 만나 서로를 의지했던 그 시절처럼. 이엘리는 손을 들어 그 등을 토닥였다.

“다 자란 줄 알았는데, 이럴 때는 어리광쟁이라니까.”

“그래도.”

네가 너무 좋은 걸 어떡해. 자카리는 그 말은 입 안으로 삼켰고, 그녀를 가만히 보았다.

“키스해도 돼?”

“으음……” 

“안 돼?”

보채듯 묻는 질문에 흰 뺨이 살짝 붉어졌다.

꼬박꼬박 키스해도 되느냐 물어보는 자카리가 귀엽다.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삼키면서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고, 곧바로 그의 목을 끌어안는다.

“왜 안 되겠어.”

“……이엔.”

“넌 내게 허락을 구하지 않고, 마음대로 키스해도 되는 유일한 사람 인걸.”

웃음 섞인 나직한 목소리가 꽃잎처럼 내려앉았다.

어둠 속에서도 새파란 눈동자가 달 빛을 머금어 빛난다.

이엘리는 두 눈을 내리감았다. 부드러운 키스가 입술에 닿았다. 호흡 이 섞인다.

“……읏……”

이엘리가 달콤한 신음을 흘렸다. 지금의 키스는 평소에 나누는 농밀한 것이라기보단, 다정하게 닿아 오는 키스였다.

그럼에도 입술이 닿는 감촉이 유난히 달다. 그녀는 속눈썹을 떨었다.

“자카리……”

이엘리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자카리를 불렀다.

자카리는 그녀의 입술을 다시 한 번 깨물며 삼켰다.

자신의 목을 감아 안은 그녀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진다. 자카리는 숨을 삼켰다.

‘도대체 황제 따위가 뭐라고. 그깟 축연이 무엇이기에……’

자카리는 그대로 그녀를 안아 들고 공작성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황제며, 황가 일가 따위 전혀 중요 하지 않은데. 오직 중요한 건 이엘리뿐인데.

그런데 바로 그때. 바스락, 소리가 났다. 자카리는 반사적으로 이엘리를 품 안에 숨기며 날카롭게 뒤를 돌아본다.

“누구냐.”

“……자카리?”

깜짝 놀란 이엘리가 얕게 잠긴 목소리로 자카리를 불렀다.

사위는 고요했고, 그들 앞의 정원 은 여전히 여름이 무르익어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자카리는 여전히 신경을 곤두세운 채다.

“당장 나오지 않으면……”

그때 정원의 나무 그늘 아래에서 가녀린 인영이 하나 빠져나왔다.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금발과 난 처한 기색을 가득 담은 연회색 눈동자. 이엘리는 저도 모르게 멍하니 상대를 불렀다.

“……황녀 전하?”

“아, 미안해요. 일부러 보려한 것 은 아니고……”

황녀는 뺨을 붉히며 횡설수설했다. 설마, 그러면 우리가 키스하는 장면을 모두 보셨다는 소린가?

이엘리의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달아올랐다.

하지만 자카리는 아무렇지도 않아했다.

“황녀 전하께서 여기엔 무슨 일이 십니까?”

“계속 연회장에 있었더니 답답해 서, 산책을 조금하고 싶었거든요.”

“그러셨군요.”

자카리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리고 이엘리는 황녀의 심정을 이해했다.

그럴 만했다. 황후와 황녀 모두, 황제 때문에 연회에 반쯤 억지로 참석한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있잖아, 자카리. 먼저 들어가 있을래?”

이엘리는 자카리의 등을 손으로 살짝 밀었다.

금세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은 자카리가 말했다.

“이엔 넌?”

“난 황녀 전하와 조금 시간을 보내려고.”

“하지만……”

자카리는 무어라 불평을 말하려 했 지만, 이엘리는 고개를 가로저은 후 빙긋 웃었다.

“연회를 주최한 안주인 노릇도 좀 해야지. 그렇지 않아?”

쌕 눈웃음을 치며 그렇게 말하자, 자카리는 뚱한 얼굴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얼마나 노력해서 얻게 된 그녀와의 시간인데 이렇게 빼앗기고 마는지. 깜짝 놀란 황녀가 손을 내저었다.

“전 괜찮아요! 두 분께서 시간을 보내시는 편이……”

“아니예요. 그렇지 않아도 황녀 전하를 계속 뵙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는 걸요.”

이엘리는 여상한 낯이지만, 자카리는 조금 심술이 난 것처럼 보였다. 황녀가 어색하게 웃었다.

“죄송해요, 헤센바이츠 공작.”

“아닙니다. 차후에도 이엘리를 독점할 수 있으니까요.”

음, 그 말은 어쩐지 황녀에게 말하는 게 아닌 것 같았다.

마치 스스로를 달래려고 하는 것 같은 그 말투.

황녀는 양심이 콕콕 찔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엘리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그럼 이따 다시 연회장에서 봐, 자카리.”

어깨를 톡톡 두드려 준 이엘리는 황녀와 함께 몸을 돌렸다.

황녀는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까닥 숙여 보였다. 자카리는 아쉬움을 차마 감출 수 없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보았다.

 로렌 백작 영애는 연회장 구석에서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어떻게 우리 가문에게 이런 모욕을 줄 수가 있어?’

어찌나 주먹을 세게 움켜쥔 건지, 파르르 주먹이 떨리며 손등 위로 하얗게 뼈가 도드라졌다.

‘좋은 뜻으로 시를 바쳤을 뿐인데, 어떻게 그렇게 무례하게 받아칠 수 가 있어?

그녀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제 아버지가 먼저 그 시를 통해, 무려 북부의 공작 부인에게 시비를 걸었다는 사실은 이미 까맣게 잊은 지 오래였다. 루비와 색유리라니, 그런 무례한 비유를!

‘거기다 그 요리는 도대체 뭐야?!’

로렌 백작가의 상징인 백조를 이용한 희귀한 요리.

마치 하나의 예술품처럼 섬세하게 장식을 올린 그 요리가 상징하는 의미는 명백했다.

더 이상 헤센바이츠 공작가에게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는 뜻이다.

하지만 백작 영애는 그런 깊은 뜻을 알아보기보다는 당장의 분노에 집중했다.

‘우리 부모님께서 고개를 숙이셨어…… 남부의 그 촌뜨기 계집아이 때문에!’

그리고 로렌 백작 영애는 그걸 참을 수가 없었다.

이엘리 때문에 제 부모님이 모욕을 당했다.

“레이디, 혹시 무언가 필요하신 것 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때 하녀가 별생각 없이 백작 영애에게 말을 붙였다.

이건 전적으로 그녀의 잘못이었다.

보통 귀족 영애들은 생리 현상 등, 조심스러운 용건으로 하녀를 부를 때면 손수건을 내어 흔들고는 한다.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가 버릇처럼 손수건을 쥐고 있어서 하녀가 착각 한 것이었다.

“감히 하녀 주제에 귀족에게 먼저 말을 붙여?!”

하지만 그녀에게는 자신의 실수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부글부글 끓는 속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던 백작 영애는 와락 언성을 높였다.

기분이 나쁜 차에 오히려 잘 걸렸다 생각이 들었다.

“죄, 죄송합니다! 저는 다만 레이디께서 손수건을 들고 계셔서……”

“뭐라고? 제 잘못은 모르고 감히 귀족의 탓을 해?”

백작 영애는 두 눈을 새파랗게 치켜떴다. 하녀는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사실 그건 단순한 화풀이였다.

공작 부인에게 제 분풀이를 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절대로 영애를 불쾌하게 할 뜻은 아니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하녀는 거의 납작 엎드리다시피 고개를 숙였다.

하녀는 온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하녀의 신분으로, 무려 헤센바이츠 공작의 외척인 귀족 영애와 문제를 일으키는 게 달가울 리 없었다.

게다가 연회장 속 수많은 귀빈들 앞이라고 생각하자 그녀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용서? 용서라니!”

한편 백작 영애의 목소리는 점차 높아지기 시작했다.

사실은 건수를 잡았다, 이런 느낌이 더 컸다.

공작 부인에게는 지금 기분을 쏟아 낼 수 없지만, 힘없는 하녀에게는 쏟아 낼 수 있으니까.

“지금 제 잘못을 감히 귀족에게 전 가해 놓고, 주제도 모르고 용서를 구해?!”

날카로운 목소리가 짜랑짜랑 울렸다.

평화로웠던 연회장의 분위기가 온 통 엉망이 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사람들의 이목이 이쪽으로 쏠리는 것을 보며 백작 영애는 약간 고소함을 느꼈다.

‘잘만 하면 연회의 분위기를 망쳐버릴 수도 있겠어.’

어쨌든 상대는 고작 하녀 한 명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무려 황제의 총애를 받는 로렌 백작가의 외동딸이다. 게다가 로렌 백작가는 헤센바이츠 공작가의 외척이 아닌가.

하녀를 심하게 꾸짖는 것쯤, 누구 도 자신에게 뭐라 할 수 없을 것이 리라.

백작 영애는 멋대로 그렇게 생각했다.

‘공작 부인의 그 우아하신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싶네.’

그리하여 백작 영애는 해서는 안 되는 짓을 저질렀다.

눈에 불을 켠 후 크게 손을 휘둘렀다.

찰싹! 날카로운 파공음이 울렸다. 뺨을 움켜쥔 하녀는 비명도 못 지른 채로 주저앉았다.

“공작가의 하녀라서 이 정도로 끝 나는 줄 알아!”

주변은 금세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고요해졌다. 의기양양해진 백작 영애는 오만하게 손을 털었다.

기겁한 사람들이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들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서로에게 소곤댄다.

“세상에.”

“지금 연회장에서 공작가의 하녀를 폭행한 건가요?”

하녀가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렀다 한들 저 행동은 도를 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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