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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화 (123/196)

123화

‘말이야 바른 말이지, 감히 자작 가문 출신이 헤센바이츠의 안주인 자리를 꿰어 차?’

자신 또한 제 여동생을 전대 공작에게 팔아 넘기듯 시집을 보냄으로써 신분 상승을 했던 주제에, 백작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던 중 백작의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났다. 좋은 생각이 난 모양이었다.

‘공작 부인은 황제 폐하와 그리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시지. 그렇다면……’

황제가 공작 부인에게 마음을 품었으나, 공작 부인이 냉정하게 거절한 건 제도에서도 유명한 일화였다.

그리고 백작이 생각해 낸 방법은, 황제의 앞에서 황제의 기분도 띄워 줄 수 있고, 공작 부인에 대한 앙심 도 일부 풀 수 있는 방법이었다. 돌 하나로 새 두 마리를 잡는 격이라고 할까.

“공작 부인을 뵙습니다.”

“……로렌 백작?”

로렌 백작이 이엘리에게 한 걸음 성큼 나섰다.

이엘리는 미심쩍은 얼굴로 백작을 돌아보았다.

“결혼식을 올리셨다지요. 정말 축하드립니다.”

“아, 감사합니다.”

이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을 축하한다 인사하는데 딱히 날을 세 울 필요는 없었다. 그때.

“축하의 의미로 시 한 수를 바치고 자 합니다.”

“……네?”

시라니, 이 무슨 뜬금없는 제안이 지? 다른 사람이 말하는 거라면 호 의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텐데, 그 말을 한 사람이 백작이라 기분이 묘했다.

그녀는 떨떠름하게 그 제안을 받아 들였다.

“그래요.”

“흠흠.”

두어 번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은 백작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백작을 빤히 바라보았다.

절벽 위에 핀 꽃 한 송이, 한들거리네. 얼른 자신을 꺾어 달라는 것처럼.

만인을 지키던 용사는 꽃의 아름다움에 취했다네.

검을 내려놓은 용사가 절벽에 기어 올랐지. 용사는 마침내 꽃을 손에 넣었네.

아름다운 꽃 한 송이, 용사의 손에서 검을 빼앗았네. 검을 놓은 용사는 더 이상 용사가 아니었지.

행복한 청년과 아름다운 꽃이 남았네. 그들은 영원히 행복했다네.

그 시를 듣던 이엘리는 미간을 좁혔다.

백작이 읊은 시는 이엘리를 우회적으로 돌려 조롱하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그 의도를 제대로 짚어 내려면, 저 시의 탄생 배경 자체를 알아야만 한다.

‘노스만의 풍자시였던가.’

리펜베르크 황가의 역대 황제들 중, 알렉산드로 황제와 관련한 시였다.

알렉산드로 황제는 황후를 폐하고 집시 출신의 아름다운 여인인 리엘라를 황후로 올렸는데, 미인에 눈이 멀어 정무를 제대로 살피지 못한 암군으로 유명했다.

저 시에서 용사는 황제, 꽃은 리엘 로 치환된다.

‘사실 집시 출신의 힘없는 여인이 무려 황제의 제안을 어떻게 거절 하겠어.’

이엘리는 냉소적으로 생각했다. 힘 없는 여인을 악녀 취급하는 것 자체 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건 그렇고 어떻게든 날 깎아내리려는 의도가 이렇게 투명할 줄이야.’

이엘리는 냉정한 눈동자로 백작을 바라보았다.

용사를 자카리, 꽃을 이엘리로 대 입하는 것이 백작이 원하는 해석일 터다.

그녀가 백작의 뜻을 알아채지 못할 거라 생각해 저러는 거겠지.

“흥미로운 시로군요.”

그리하여 그녀는 입술 끝을 비뚜름 하게 올린 채 입을 열었다.

백작이 반색하며 그녀를 본다.

“아, 공작 부인의 마음에 드신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그녀가 자신의 비꼬는 의도를 눈치 채지 못했다고 여겼는지, 백작은 활 짝 웃는 얼굴을 했다.

“좋은 시를 들려주셨으니, 저 또한 백작님께 동화를 들려드리는 걸로 답례를 하겠습니다.”

“공작 부인께서 들려주시는 동화라니 무척 기대됩니다.”

백작은 즐거운 표정이 되어 이엘리를 마주 보았다. 이엘리는 온화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옛날 옛적, 장인 한 명이 살고 있었답니다.”

뜬금없는 이야기 시작에 백작은 조금 어리둥절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말을 이었다.

“어느 날 왕이 장인을 불렀어요. 세계에서 가장 멋진 왕관을 만들라는 명령을 내렸죠.”

“……”

그 목소리를 들으며 백작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상했다. 이엘리의 목소리는 평온하고, 붉은 입술 위로는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도 묘한 불안감이 심장을 긁었다.

“그러면서 왕은 장인에게 왕관을 장식할 열 개의 루비를 내렸어요. 하지만 장인은 그 루비를 보며 해서는 안 될 욕심을 부리고 말았답니다. 결국 장인은 아홉 개의 루비를 훔쳐 냈어요.”

사위는 어느새 고요해져 있었다. 이엘리의 목소리만이 조용한 연회장 안을 낭랑하게 울렸다.

“장인은 솜씨가 무척 좋았기에, 붉은색 유리를 가져다 잘 가공하여 루비를 대체했답니다.”

“……” 

“왕관의 중앙에만 왕이 내린 루비를 박고, 다른 곳은 색유리로 장식 했어요. 하지만 완성된 왕관은 무척 아름다웠고, 루비와 색유리는 아무리 살펴보아도 똑같은 색깔로 빛났 답니다.”

그렇게 말하던 이엘리가 살짝 시선을 들어 올렸다. 연녹색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장인은 왕을 속여 넘길 수 있을 거라고 속으로 기뻐했어요. 장인은 무릎을 꿇고 왕에게 왕관을 바쳤죠. 하지만 그 순간 장인의 손이 떨렸고, 왕관은 바닥으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답니다.”

이엘리는 백작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잠시 후, 이엘리는 나른한 목소리 로 백작에게 되물었다.

“그 왕관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

백작은 침묵했다. 백작의 대답을 기다리던 이엘리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더니 곧 말을 잇는다.

“루비는 무사했지만, 색유리는 모조리 깨져 버렸답니다.”

“고, 공작 부인.”

“색유리와 루비는 비록 색깔은 같을지라도, 그 고귀함과 강도는 다른 법이지요.”

로렌 백작이 자신을 모욕했던 방법을 똑같이 빌려 와서, 이엘리는 명 백하게 빈정대고 있었다.

“로렌 백작께서는 헤센바이츠 공작가의 외척이시자, 황제 폐하께서 총애하시는 가문의 주인이라는 것, 저도 잘 압니다.”

“……예?”

“하지만 아무리 헤센바이츠의 ‘외 척’이고, 황제 폐하의 ‘총애’를 받는다고 한들…… 로렌 백작가가 공작가문, 혹은 황가와 동급이 되는 건 아니예요.”

그 말에 로렌 백작의 얼굴이 딱딱 하게 굳었다.

하지만 이엘리는 여전히 매끄러운 미소를 지은 채 백작을 마주 볼 뿐이었다.

“그런 당신이 감히 공작가의 안주인을 능멸하려 들다니.”

“아닙니다, 그건……!”

“이건 마치 ‘색유리’가 ‘루비’를 모욕하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나요?”

우아하게 내려앉은 목소리 하나에, 사위가 고요해졌다.

“바닥에 떨어져 깨지고 나서야 상대방과 자신의 차이를 깨닫고 싶으신가요?”

비록 같은 귀족일지라도 그 위치는 다르다.

아무리 그 빛깔이 똑같다 한들, 색 유리가 루비를 범접할 수는 없는 법이다. 창백한 얼굴의 백작을 보며, 그녀는 여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또한 왕이 선택한 건 색유리가 아니라 루비랍니다.”

“저는 “제 말뜻을 잘 아시겠지요?”

이엘리는 생긋 눈웃음을 쳤다. 아무리 로렌 백작이 발악한다고 한들, 자카리가 선택한 사람은 이엘리였다.

백작가는 그에게 선택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로렌 백작.”

“……고, 공작 각하!”

뒤를 돌아본 백작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느새 이쪽으로 걸어온 자카리가 차게 묻는다.

“아직도 그 무례함은 버리지 못했 습니까?”

자카리는 큰 목소리로 화를 내지 않았다.

한계까지 가라앉은 싸늘한 목소리가 목을 졸라 온다.

“제, 제 몸무게만큼의 황금을 바치 겠습니다. 제발 용서를……!”

“감히 헤센바이츠의 안주인을 농락 하려한 주제에, 고작 황금으로 용서받으려 하다니.”

자카리가 비스듬히 시선을 기울였다. 새파란 눈동자가 백작을 제 안에 담은 채로 가늘어졌다.

“백작. 제국 유일의 공작 부인이 그렇게 쉬운 상대인 줄 아십니까?”

“공작 각하!”

“감히 그 세 치 혀로 북부의 안주인을 희롱하려 하다니……”

자카리는 냉정한 얼굴로 백작을 질책했다. 그때 이엘리가 자카리의 팔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이만하면 됐어, 자카리.”

“이엔. 하지만……”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 그리고 황녀 전하까지 모신 좋은 날이잖아. 얼굴은 붉히지 말자.”

그렇게 말한 이엘리는 생글생글 웃었다. 로렌 백작은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공작 부인이 자신을 도와줄 것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 이엘리가 말을 이었다.

“마침 귀빈들을 위해 주방에서 정성스럽게 준비한 요리도 모두 완성 되었답니다.”

그렇게 말한 이엘리는 두어 번 박 수를 쳤다. 그와 동시에 요리 하나가 연회장에 날라져 왔다.

“어머나, 저것 좀 보세요!”

사람들이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 다. 이엘리는 자카리의 곁에 바짝 붙은 채 나긋하게 말했다.

“비록 부족하지만 귀빈들을 접대하 기 위해, 희귀한 요리를 하나 마련해 보았답니다.”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은 건 커다란 백조 요리였다.

금으로 만든 접시 위, 갖가지 허브와 채소와 과일로 장식한 백조 요리.

그것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날 개까지 활짝 편 채 자리하고 있었다.

“세상에, 저렇게 호화스러운 요리가 있다니요!”

“어떻게 저런 요리를 만들 생각을 했죠? 요리 라기보다는 예술품 같네 요.”

마치 예술품 같은 백조 요리를 보며 귀족들이 작게 소곤거렸다. 하지만 즐거워하는 귀족들 뒤로 로렌 백 작은 주먹을 콱 움켜쥐었다.

왜냐하면 저 요리가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공작가가 왜 저 요리를 이 연회에 내놓았는지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로렌 백작가문의 상징은 백조였다.

‘더 이상 함부로 행동하지 마라.’

비록 그들의 의도를 표현한 방식은 고상했지만, 그 뜻은 명백했다.

더 이상 신경을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

저 백조 요리처럼 언제든지 로렌 백작가를 손볼 수 있다는 걸 뜻하고 있었다.

이엘리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로 렌 백작의 창백한 얼굴을 지켜보았다. 이 정도면 그녀의 뜻도 그에게 잘 전달된 것 같다.

'그리고……’

이엘리는 서늘한 얼굴로 황제를 돌아보았다.

마침 황제도 이엘리를 돌아보고 있었다.

짙은 회색 눈동자와, 새싹 같은 연녹색 눈동자가 서로를 쏘아보았다. 이윽고 그녀가 화사하게 웃었다.

‘……더 이상 북부에서 함부로 날 될 생각은 마시지요.’

그녀는 턱을 치켜들었다. 로렌 백작가문은 황가가 북부에 심어 놓은 끄나풀에 가깝다.

그런 가문의 상징을 고급 요리로 만들어 대접한다는 것 자체가, 황가에게도 경고를 남기는 거였다.

‘대놓고 경고할 수는 없지만 이 정 도로도 충분히 알아들었겠지.’

게다가 이엘리는 ‘귀빈들을 위해 정성스레 준비한’ 요리라고 이미 말 하지 않았던가.

백조 요리 자체는 단순한 요리일 뿐이었으므로 황가나 로렌 백작가가 트집을 잡을 만한 여지도 없었다.

‘……깜찍한 짓을 하시는군.’

황제는 애써 표정 관리를 했지만, 분한 기분을 감출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분한 심정을 드러낸 다면 공작가에게 놀아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황제는 애써 웃으며 이엘리에게 말했다.

“공작 부인, 로렌 백작의 무례한 행동은 제가 처벌하겠습니다. 마음 푸시지요.”

이엘리는 황제를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

당신이 무엇이기에 공작가가 처벌 해야 할 문제를 대신 처벌해 준다 말하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이엘리는 제 의문을 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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