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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화 (121/196)

121화 

자박자박 걸음을 옮기는 황후의 어깨에는 왠지 힘이 없어 보였다.

“편견을 깬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아니까요.”

황후가 흘끗 이엘리를 돌아보았다. 묘하게 지친 목소리.

이엘리는 황후를 가만히 마주 보았다.

“저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다면 좋을 텐데. 아니, 하지만……”

황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고개를 갸웃 기울인 황후가 희 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차피 제가 그런 생각을 한들 이룰 수 없었을 테니 큰 의미는 없었겠지요.”

그렇게 말하는 황후의 얼굴은 쓸쓸했다.

헤센바이츠 공작은 자신의 아내가 하는 일에 여러모로 지원하며 지지 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황제는…… 답답하다. 황후는 애써 생각을 털어 냈다.

“아샤꽃차는 잘 마셨어요. 정말 맛있었어요.”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꽃으로 잼을 만든 것도 신선한 생각이더군요. 굉장히 놀라웠답니다.”

분위기는 다시 화기애애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황후의 서글픈 낯이 눈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날 저녁, 황제 일가의 방문을 축 하하는 연회가 열렸다.

황제의 방문을 기념하기 위해 북부의 모든 귀족들이 초대되었고, 로렌 백작가문 또한 참석했다.

주로 제도에 머물러 있었던 로렌 백작가였기에, 북부 귀족들은 백작가를 좀 불편해 했다.

결국, 백작가는 연회에서 겉돌고 말았다.

“훌륭한 연회로군요.”

“그러게요, 공작 부인께서 많이 신경을 쓰셨나 봐요.”

황제 일가를 보필하기 위해 제도에서 내려온 몇몇 귀족들은 두 눈을 둥그렇게 치켜 떴다.

고상한 취향으로 꾸며진 연회장의 모습은 우아하면서도 화려했다. 황궁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제도를 제외하면 제국에서 가장 큰 도시답네요.”

“아마 규모 자체로는 북부가 가장 크지 않나요?”

제도 귀족들의 선민사상을 깨부수는 광경을 보며, 귀족들은 미묘한 기분을 느꼈다.

내심 북부가 시골이라며 무시하던 귀족들의 허를 찔린 것이다.

이엘리는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보았다.

“오늘 연회에 참석해 주신 귀빈 여러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이엘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귀족들에게 인사를 남겼다. 사람들의 이목이 그녀에게 쏠렸다.

우아한 진녹색 드레스를 차려 입은 그녀는 공작가의 안주인으로 손색이 없는 모습이었다.

“부디 이 연회가 여러분들께 즐거운 추억으로 자리 잡기를 법니다.”

낭랑한 목소리로 말한 이엘리는 환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공작 부부는 귀빈들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각자 귀빈들을 만나러 갔다.

보통 안주인은 여성 손님들을, 가주는 남성 손님들을 맞이하는 게 보 통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여전히 그 자리에  붙박인 듯 남아 있었다.

“……”

황제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황제의 시선은 이엘리를, 정확히는 그녀의 손목을 바라보고 있었다.

새하얀 팔목에는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았다.

황제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귀여운 짓을 하시는군.’

무려 황제가 하사한 선물이었다. 게다가 황제가 북부에 내려왔으니, 예의상 한 번쯤 착용해도 되는데 그러지 않는다.

그 뜻은 명백했다. 더 이상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 정도로 넘어갈 거라면, 북부에 내려오지도 않았지.’

황제가 사납게 미소 지었다. 마침 이엘리는 혼자 있었다.

황제가 이엘리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공작 부인. 제가 결혼 선물로 보 내드렸던 팔찌는 착용하지 않으셨군요.”

“전 이미 남편이 있는 몸입니다. 다른 이의 선물을 착용하는 건 적절 치 못한 처신이지요.”

그녀는 매끄럽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황제는 물러날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황제가 말했다.

“제도로 돌아가기 전, 공작 부인께 서 그 팔찌를 착용하신 모습을 한번쯤 봤으면 싶습니다.”

“죄송합니다, 전 제 남편에게 충실한 아내이고 싶답니다.”

이엘리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대답했다.

하지만 황제는 여전히 이엘리에게 질척거렸다.

“그 팔찌의 보석, 공작 부인의 눈동자 색깔과 꼭 닮아서 일부러 골라 서 보낸 선물입니다만.”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제게 그런 배려는 필요 없습니다.”

이엘리는 황제의 말을 딱 끊어 냈다.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하지만 상대에게 호의를 갖고 싶은 쪽이 먼저 굽히는 법이다.

황제가 유들유들한 목소리로 입술을 열었다.

“공작 부인, 왜 그러십니까. 그렇게 딱딱하게 구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딱딱한 게 아니라 각자의 배우자에 대한 예의를 지키자는 뜻입니다.”

“연회이지 않습니까. 약간의 일탈은 허용되는 자리입니다.”

그 말을 들은 이엘리는 기가 막혔다.

저게 법과 질서를 수호한다 주장하는 황제가 할 말인가.

“비록 이전 신년 무도회에서 공작 부인과 저 사이에 좋지 못한 일이 있었지만……”

그 말을 듣던 이엘리는 눈썹을 구겼다.

은근슬쩍 두 사람의 공통 잘못으로 밀고 나가는 황제의 언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황제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황제가 이엘리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래서 제가 일부러 북부까지 방문했으니, 서로 좋게 끝났으면 합니다. 어떻습니까?”

마치 북부에서 황제에게 요청하여 내려오기라도 한 것처럼 황제는 거 들먹거렸다.

그리고 이엘리는 이쯤에서 황제에게 선을 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의는 지키되, 할 말은 해야만 한다.

“죄송하지만 하나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황제에게 몸을 돌린 그녀가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단정한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신년 무도회에서 있었던 일은, 단순히 그런 식으로 치부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공작 부인?”

“이미 지난 일이니 잘잘못을 따져 무엇 하겠습니까.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목소리와 태도는 정중했으나 내용은 문제의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폐하께서 제게 억지로 폐하의 감정을 강요하셨다는 사실을 지우지는 말아 주셨으면 해요.”

그렇게 말하는 이엘리의 얼굴은 담담했다.

황제는 얼굴을 찌푸렸으나, 그 말에 딱히 반박하지는 않았다.

작은 자작가의 여식과 제국 유일의 공작 부인이란 대하는 태도가 달라 지는 법이다.

“뭐…… 그때의 일, 공작 부인께서 불쾌하셨다면 미안합니다.”

황제는 관대한척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주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이엘리를 대하는 태도를 내심 자랑스러워 했다.

이엘리는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황제가 웬일로 제 잘못을 인정하지?

“어쨌거나 공작 부인께서는 예전보다도 훨씬 더 아름다워지셨군요.”

그 말만큼은 진심이었다. 만나지 못했던 시간 동안, 이엘리의 아름다 움은 꽃가지에 물이 오른 것처럼 무 르 익어있었다.

황제는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이다. 이엘리는 담백한 어조로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공작 부인. 전 당신을 만나 뵈려 고 이 북부까지 내려온 것이나 마찬 가지입니다.”

“감사한 말씀입니다만, 전 페하를 한 번도 청한 적 없단 사실을 잊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이엘리는 여전히 견고한 벽을 두른 것처럼 단호한 얼굴이었다. 황제는 가만히 입맛을 다셨다.

“매몰차시군요. 남부의 여인들은 다소곳한 맛이 있습니다만.”

다소곳한 맛이라. 당연하게 여성을 남성 아래로 두는 말투가 거슬렸다. 이엘리는 차게 답했다.

“이제 전 북부의 여인이니 당연하 지요.”

“그래도 아쉽군요. 약간은 남부 여인의 미덕을 가지시는 편도 좋을 것 같습니다.”

황제는 농담인 척 무례한 말을 지껄여 댔다.

이엘리가 미간을 좁혔으나, 황제가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이 빨랐다.

정중하게 허리를 굽힌 황제가 이엘리에게 느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예전에도 공작 부인께 춤을 신청한 적이 있었죠.”

“……”

“북부에 오랜만에 방문한 기념으로, 오늘은 부인의 첫 춤을 받고 싶습니다만.”

하지만 이엘리는 황제와 얽히는 건 역시 사양이었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황제를 보았다.

“저와 폐하, 모두 혼인한 몸이지요.”

“……공작 부인?”

“그리고 결혼한 사람은 각자 첫 번 째 춤을 함께 추어야 할 사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이엘리의 냉랭한 태도에 황제는 살짝 기분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이엘리는 차분한 낯으로 말을 이었다.

“저는 제 남편, 헤센바이츠 공작과 첫 춤을 출 생각입니다.”

“제가 북부까지 내려왔는데도 이렇게 매정하게 구시는 겁니까?”

그렇게 말한 황제가 이엘리의 뺨을 어루만지려했다. 하지만 이엘리의 동작이 좀 더 빨랐다.

“그리고 제게 이렇게 함부로 손을 대는 것도 자제해 주십시오.”

황제는 저도 모르게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난 그녀가 단호 하게 대답했다.

“폐하의 첫 춤은 마땅히 황후께서 차지하셔야 합니다.”

“공작 부인.”

“적절치 못한 염문에 휩싸이기에는…… 이제 저희가 각자 머무르는 위치가 있지 않습니까.”

이엘리는 칼처럼 선을 긋는 목소리와 태도로 황제에게 답했다.

그는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그렇다면 즐거운 시간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황제 폐하.”

정중하지만 단호한 태도로 이엘리는 황제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황제가 붙잡을 틈도 주지 않은 채 총총 사라지는 그 뒷모습은 성벽처럼 견고했다.

그 뒷모습을 황제는 빤히 응시했다.

“이런, 여전히 앙칼진 고양이 같군.”

잠시 후, 뒤에 남겨진 황제는 희미 한 미소를 지었다.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작게 중얼거린다.

“괜찮아. 어차피 오늘의 연회는 길 테니까……”

그 목소리에는 열기가 서려 있었다. 너무나도 갖고 싶은 누군가를 향한 진득한 소유욕이었다.

 이엘리에게 연회의 첫 번째 춤곡은 당연히 자카리와 추기로 되어있었다.

그녀는 남편과 손을 맞잡았다.

“자카리.”

“응?”

“오늘 다른 여자와는 춤추지 마, 알았지?”

이엘리는 두 눈을 가늘게 휜 채 자카리에게 소곤거렸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던 자카리가 이내 그녀를 향해 웃어 버렸다. 거리가 가까워진다.

그는 아내의 귀에 입술을 대고 작게 답했다.

“당연하지, 난 너밖에 없는걸.”

그렇게 말한 자카리와 이엘리는 두 발짝씩 뒤로 물러났다.

자카리가 의아한 낯으로 질문했다.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로렌 백작 영애가 참석했잖아.”

이제 이엘리는 다른 여자를 경계하는 모습을 감추지도 않았다.

입술을 삐죽이는 그녀가 너무 사랑 스러워서, 자카리는 심장이 꽉 죄이는 기분을 느꼈다.

자카리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지금 이 순간이…… 마치 꿈같아.’

여름과 잘 어울리는 경쾌한 왈츠. 왈츠에 어울리는 가벼운 동작으로 춤추는 요정 같은 아내.

‘내 아내.’

녹색 치맛자락이 동그랗게 부풀어 오른다.

분홍색 머리카락이 살랑거린다. 자카리는 숨을 삼켰다.

마주 잡은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영영 이대로 그녀와 함께, 둘만의 세계에 있고 싶다.

“이엔.”

자카리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장밋빛으로 달아오른 뺨, 반짝이는 연녹색 시선.

그녀는 언제나 그를 똑바로 응시한다.

하지만 꿈결 같던 음악은 끝나고 두 사람은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그거 알아?”

“뭘?”

“이 연회장에서 네가 제일 예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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