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이엘리는 꽃을 들어 향기를 맡았다. 달콤한 장미 향기가 마음을 안정시켜 준다.
같은 장미임에도 이렇게 다른 기분이 드는 건, 역시 장미를 준 이가 그녀의 소중한 남편이기 때문일 터.
‘황제가 장미 꽃다발을 주었을 때에는 당장 내던져 버리고 싶었는데.’
자카리는 그저 말없이 웃어 보일 뿐이다. 꽃잎을 어루만지던 그녀는 살포시 양 뺨을 붉혔다.
* * *
황제 일가가 방문하는 날짜는, 북부에서 가장 날씨가 온화하다 일컬어지는 8월로 정해졌다.
황제뿐 아니라 황녀와 황후도 함께 내려오기로 결정되었다.
그나마 듣던 중 기쁜 소식이었다.
“오랜만에 황녀 전하와 황후 폐하를 될 수 있겠네.”
이엘리는 방긋 웃었다. 바쁜 와중에도 짬을 내어 아내를 보러 온 자카리가 걱정스레 물었다.
“요새 힘들지는 않고?”
“음, 별로? 왜?”
“계속 너가 바쁘게 움직여야 할 일 이 생겨서 마음이 불편해서.”
자카리의 진지한 대답을 들으며 이엘리는 까르르 웃어 버렸다. 하지만 자카리는 진심이었다.
‘지금도 쥐면 꺼질까, 불면 날아갈 까 싶은데……’
자신의 아내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였다.
편안하고 안전한 곳에 앉혀 두고 세상 가장 귀한 것만 안겨 주고 싶은데, 자꾸 상황이 여의치 않게 돌아간다. 그는 미간을 잔뜩 구겼다.
“황제 자식, 쓸데없이 사람들 귀찮게나 하고.”
“어쩔 수 없잖아. 그래도 오랜만에 황녀 전하와 황후 폐하, 두 분을 될 수 있는 건 좋아.”
“그래도, 여러 가지 사업과 살롱만으로도 바쁘잖아.”
이엘리는 공작가의 안주인이었고, 귀빈들을 대접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녀의 일이 늘어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무려 황제 일가가 방문하니, 축연 정도는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괜찮아. 각자가 해야 할 일이 있는 거니까.”
자카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엘리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자카리는 그녀의 그런 씩씩함이 보기 좋으면서도 좀 안타까웠다.
그때, 이엘리는 서류 한 장을 끌어 다 그에게 보여 주었다.
“그것보다 축연에 참석할 귀족들을 선별하여 목록을 만들고 있는데.”
“그래? 장인어른과 장모님도 모실 생각이지?”
“아니.”
이엘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카리는 조금 의아한 얼굴이 되어 질문을 던졌다.
“왜? 북부의 귀족들은 대부분 부를 생각 아니었어?”
“그렇긴 한데, 우리 부모님은 예외야.”
“어째서?”
이엘리는 미간을 좁혔다. 그녀의 손가락이 서류 위를 두드렸다.
고민하던 그녀가 말을 꺼낸다.
“이번에 영지를 받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이번 연회는 괜찮다고 하셨어.”
자카리는 불만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하나 그녀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이번 축연에 참석하시면, 부모님의 의도와는 다르게 헤센바이츠의 외척으로 보일 테니까.”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그런 분들이 아니라는 건 내가 더 잘 알아.”
“알아. 하지만 사람들의 눈이란 게 있잖아?”
자카리의 단호한 말에 이엘리는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녀가 검지를 곧추세우고 살랑살랑 흔든다.
“이미 우리 부모님이 영지를 받은 것만 해도 불편해하는 가신들이 있을걸?”
그녀의 말에 자카리는 입을 꾹 다 물었다.
솔직히 아니라고는 할 수 없었다.
이엘리가 워낙 안주인으로서 처신을 확실히 하고 있었고, 북부 전체에서 사랑받고 있었기에 다들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자카리가 이엘리가 없으면 살지 못한다는 것도 그들의 침묵에 한몫 했다.
“그것만으로도 헤센바이츠가 다시 외척을 끌어들이려 한다, 이런 인상을 남기기에는 충분해.”
“하지만……”
“게다가 이미 로렌 백작가문이라는 선례도 있으니까, 뭐.”
이엘리는 입술을 동그랗게 말았다. 자카리는 이야기하던 것도 잊고 그녀의 입술을 응시했다.
“그냥 위험부담을 좀 줄이고자 함 이지. 이번에는 황가도 참석하니까.”
“……그래?”
“그리고 부모님도 별로 참석하기를 바라지 않으셔. 사실 연회 같은 건 좀 번거로워하시거든.”
그녀는 빙그레 웃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자카리는 한숨을 삼키며 그녀 이야기에 집중했다.
“참, 네게는 정말 고맙다고 전해 달라고 하셨어.”
저렇게 네가 생글생글 눈웃음을 지을 때마다 내 가슴이 얼마나 떨리는 지…… 넌 전혀 모르겠지?
“그보다 로렌 백작가문도 참석시킬 생각이야.”
하지만 달콤한 미소 뒤로는 현실적인 말이 뒤따랐다.
그녀의 말을 들은 자카리는 반사적으로 눈썹을 찡그리고 말았다.
고개를 내저은 자카리는 대뜸 질렸다는 목소리가 되어 대답을 했다.
“내 외척이라서 참석시키는 거라 면, 차라리 불참시키는 편이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해.”
“자카리.”
“게다가 장인어른과 장모님도 불참 하시는데, 왜 로렌 백작가문은 참석해야 하는 건데?”
“물론 그 이유도 있지만, 그 이유 하나만은 아니야.”
이엘리의 얼굴은 차분했다. 자신이 작성한 서류를 훑어보던 이엘리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로렌 백작가문을 아예 초대하지 않는다면, 황제도 결국 눈치를 챌 거 아냐.”
“무엇을?”
“로렌 백작가가 이미 북부에서 모든 영향력이 잃어버린지 오래라는 사실을.”
그녀의 목소리는 서늘했다. 자카리는 이엘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엘리는 여상하게 되물었다.
“그렇다면 황제는 북부의 새로운 귀족을 포섭하려 들겠지. 그건 역시 싫지 않아?”
“맞는 말이긴 한데…… 그래도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단 말이지.”
그렇게 대답한 자카리가 이마를 짚었다.
드리워진 손 그늘 아래, 푸른 눈동자가 차게 빛났다.
“지금은 그렇다 치더라도, 언젠가 기회를 봐서 정리하는 편이 좋다고 봐.”
“그건 나도 동의해. 적당한 때가 있겠지.”
이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전대 공작 부인에 대한 예의는 차릴 만큼 차렸다.
아마, ‘로렌 백작가를 정리할 적당 한 때’는 금방 오지 않을까.
서류를 내려놓은 그녀가 말머리를 돌렸다.
“어쨌거나 황가의 중요 인사가 북부에 모두 방문하니, 축연의 규모는 좀 크게 할 생각이야.”
“힘들지 않겠어?”
“아냐, 바꿔 생각해 보면 좋은 기회야.”
양 허리에 손을 얹은 이엘리는 야심만만하게 답했다.
그런 그녀가 너무 사랑스러워 자카리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이엔, 이렇게까지 귀여울 필요는 없잖아. 이엘리가 말을 이었다.
“황제 일가를 접대하는 것 자체가, 내가 북부의 안주인임을 증명하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황제 일가가 인정하든지 말든지 넌 북부의 안주인이야.”
“알아. 하지만 난……”
이엘리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 마음이 무거웠다. 한숨을 내쉰 그녀가 자카리에게 입을 열었다.
“……내가 너의 아내임을 황제가 그만 받아들였으면 좋겠어.”
“이엔.”
“더 이상 황제 때문에 우리의 관계가 엉망이 되는 건 바라지 않아.”
황제가 지금껏 그녀에게 보였던 관심을 생각해 보면, 이번 만남에서 황제가 어떤 식으로 나올지는 얼추 예상이 갔다.
분명 그녀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제 마음을 그녀에게 강요하려 할 터였다.
“하지만 뭐, 어쨌든 지금 황제가 어떻게 행동할지 걱정해 봤자 해결되는 건 없으니까.”
분위기가 무거워진 걸 느꼈는지, 이엘리는 어깨를 으쓱이며 웃어 보였다. 그녀가 가볍게 말을 잇는다.
“당장 내가 해야 할 일은 흠잡을 데 없는 축연을 준비하는 거겠지.”
자카리는 대답 대신 양팔을 뻗었다.
이엘리는 어느새 자카리의 품에 단단히 안겨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따뜻한 체온과 안정적인 느낌.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간지럽 혔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하지만 뭐든지 무리하지는 마.”
“……응”
이엘리는 뺨을 붉히며 대답했다. 황제 일가가 북부에 방문할 때까지 꼭 한 달이 남아 있었다.
황제 일가가 도착하기로 한 날은 아침부터 날씨가 화창했다.
햇빛은 맑았고, 바람 또한 살랑거렸다.
황제 일가를 맞이할 준비 또한 모 두 완벽하게 끝났다.
그녀는 짧은 추억에 젖어 들었다.
‘그러고 보면 자카리의 성인식 때도 이렇게 바쁘게 준비했었는데.’
황제는 황후, 그리고 황녀와 함께 공작성을 방문했다.
백 명의 수행원, 그리고 고급 관리 들을 동반한 상당한 규모의 일행이었다.
이엘리는 공작가의 안주인으로서 황제 일가를 맞아들였다.
“황제 폐하, 그리고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그리고 이엘리를 마주 보는 순간, 내내 찌푸리고 있던 황제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그때 두 눈에 날을 세운 자카리가 이엘리를 지키듯 바로 곁에 섰다. 자카리는 사나운 목소리로 말했다.
“세 분 황족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명백히 예의상 말하는 말투였다. 황제의 표정이 다시 한 번 일그러졌다.
하지만 자카리가 황제를 대하는 태 도 자체가 예법에 어긋난 부분은 없었기에, 황제는 마땅찮은 목소리로 답했다.
“공작가의 환대에 감사드리오.”
“아닙니다. 얼른 안으로 드시지요.”
자카리는 황제와 이엘리의 사이를 가로막듯이 움직였다. 이엘리는 내심 안도했다.
황제를 접대하는 건 역시 좀 부담스러웠던 터였다.
이엘리는 자카리의 등 뒤에서 황제 부부를 관찰했다.
‘……어째, 황제 부부의 관계는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아 보이네.’
솔직히 말하자면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 라는 완곡한 화법으로 말할 상태가 아니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딱 보기에도 냉랭해 보였다.
황후는 반가운 얼굴로 이엘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요, 헤센바이츠 공작 부인.”
“예, 황후 폐하. 이렇게 폐하를 될 수 있어서 굉장히 기쁩니다.”
이엘리의 대답을 들은 황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가 다정한 태도로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결혼식 때 참석하지 못해서 내내 마음에 걸렸답니다.”
“아닙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여자는 살갑게 대화를 나눴다. 그때 황녀가 웃는 얼굴로 이엘리와 황녀 사이에 끼어든다.
“공작 부인, 잘 지냈나요?”
“네, 걱정해 주신 덕분에 잘 지냈 답니다. 황녀 전하께서는 어떠하셨는지요?”
“저야 뭐 언제나 그럭저럭 지내 죠.”
황녀는 생긋 눈웃음을 쳤다. 아까 황제를 대할 때와는 다르게, 세 여 자의 분위기는 훈훈했다.
“방을 마련해 두었답니다, 피로하 실 텐데 연회 전까지 방에서 좀 쉬 시지요.”
“고마워요.”
“두 분은 방까지 제가 직접 안내해 드릴게요.”
이엘리는 한 걸음 앞서 나갔다. 보 통은 귀빈들은 집사가 방을 안내해 주곤 하지만, 두 여인과는 친분이 있어서 특별 대우를 한 거였다.
세 여자는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복도를 걸었다.
“오늘 저녁 연회가 기대되네요.”
“부족하지만 열심히 준비했답니다.”
황녀의 말에 이엘리는 쌕 눈웃음을 쳤다.
열심히 준비했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황녀와 황후는 그러지 않을 테지만, 황제와 제도의 귀족들은 은근히 북부를 아래로 보는 것이 느껴졌으니까.
“그러고 보니, 공작 부인의 살롱이 그렇게 특별하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그때 황후가 살가운 어조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엘리는 황후를 마주 보았다.
“여성 예술가들을 후원하고, 직접 예술품들을 창작한다지요?”
“그저 취미 활동을 하는 것뿐인걸요.”
“아니예요, 지금까지 그런 영역은 남성들만 하는 것으로 암묵적으로 정해져 있었 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