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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화 (119/196)

119화

“평민 중의 평민인 어민들의 등골까지 빼먹으면서 부는 축적하고 싶으셨나요?”

로렌 백작 부인은 차마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그녀를 이엘리는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로렌 백작 부인. 언제까지나 황가의 비호와 헤센바이츠의 외척이라는 이름이……”

이엘리가 찻잔을 내려놓는 동작이 지독하게 느리게 느껴졌다.

달칵. 찻잔과 찻잔 받침이 부딪치는 소리가 천둥처럼 백작 부인의 귀를 때렸다.

그녀는 침착하게 백작 부인에게 질문을 했다.

“……로렌 백작가문을 보호해 줄 거라고 생각하셨나요?”

“공작 부인, 아닙니다! 저희가 그러려던 게 아니라……!”

“입으로는 어떤 말이든 할 수 있죠. 하지만 전 뭐든지 행동을 봐야 한다고 생각한답니다.”

이엘리의 눈매가 가늘게 휘었다. 찻잔의 테두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던 그녀가 말했다.

“그래도 전대 공작 부인에 대한 예 우가 있으니…… 공식적으로 문제를 크게 키우지는 않을게요.”

그 말에 백작 부인이 번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희망에 가득 찬 얼굴이다.

‘어떻게든 사죄하고 잘 보이려 노력하면 괜찮지 않을까?’

이미 지금까지 당했던 일이 무척 많았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꼬리를 내리고 공작 부인에게 잘못했노라 이야기하면, 용서해 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엘리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만.”

다만?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백작 부인의 낯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이엘리는 미소했다.

“이제부터 로렌 백작가의 사람들은 제 살롱에 출입할 수 없도록 막을 거예요.”

“뭐, 뭐라고요!?”

백작 부인은 저도 몰래 언성을 높여 버렸다.

저 말은 곧, 로렌 백작 부인과 백작 영애가 아예 북부 사교계에 편입 될 수 있는 길 자체를 막아 버린다

는 뜻이었으니까.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안 돼, 난 그렇다 치더라도 내 딸 은?’

백작 영애는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고, 약혼자도 없었다.

그런 제 딸이 좋은 혼처를 얻으려면 귀부인들과의 돈독한 관계를 유 지해야 한다.

보통 귀족의 혼사란 그런 곳에서 이루어지니까.

“그리고 이번 일에 대해 배상하셔야 할 거예요.”

“배, 배상이라고요?”

“물론이죠. 이대로 입을 닦고 넘어 가실 생각이셨나요?”

하지만 이엘리는 냉엄하게 말했다. 온기 한 점 남아 있지 않은 연녹색 눈이 백작 부인을 본다.

“금액은 오백 르뎀으로 정했어요.”

“오, 오백 르템이라니…… 금액이 너무 과합니다!”

“글쎄요. 겉으로나마 공작가의 외 척 예우를 받는 대가로는 저렴하지 않나요?”

그렇게 말하니 백작 부인은 할 말이 없었다.

오백 르뎀은 분명 큰돈이었지만, 공작가의 외척 예우보다는 확실히 적었다.

그럼에도 오백 르뎀이라니. 그 금액은 웬만한 귀족 가문이 감당하기 어려운 금액이었다.

평민 가정의 거의 10년 치 생활비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더더욱 그랬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뻗댈 수 없는 위치라는 것을 잘 아셔야 할 거예요.”

고민하는 백작 부인을 앞에 둔 채 이엘리는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 백작 부인은 몸을 움찔했다.

“저와 자카리가 백작가를 그대로 두는 건, 전대 공작 부인의 면을 봐 서 그런 거니까요.”

그 말에 백작 부인이 어깨를 굳혔다.

아름다운 아델라이데. 그녀는 이미 죽었음에도 여전히 그들의 삶에 영 향을 끼친다.

죽은 그녀가 살아 있는 로렌 백작가 전체보다도 영향력이 강하다.

“저 배상금을 물고, 계속 자숙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이엘리는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렸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그녀가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공작가의 공식 행사 정도에는 참석할 수 있게 해드리죠.”

“고, 공작 부인……”

“전대 공작 부인께 감사하셔야 할 거예요, 전대 공작께서 그분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잘 알고.”

그녀는 로렌 백작 부인의 말을 탁 끊어 냈다.

허리를 곧게 펴고 앉은 자세로, 차분하게 말한다.

“또한 그분께서 제 남편의 어머니 이시니, 그분이 계셨던 가문에 최소한의 예우를 지키려 하는 것뿐이니까요.”

“저희는……”

“지금껏 오만하게 행동하신 것에 대한 대가는 치르셔야 한다고 봐요. 그렇죠?”

이엘리의 말에 도무지 반박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백작 부인은 무겁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날 저녁. 이엘리는 남편의 품에 안긴 채, 자신이 했던 일에 대해 깊은 고뇌에 빠져들었다.

“내가 너무 조였던 걸까?”

“아니, 오히려 관대한 처사였지.”

그는 이엘리의 뺨에 짧게 키스하며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 끝이 미세한 분노에 젖어있었다.

“사실 난 아예 백작가를 파내 버려도 상관없었지만……”

“아니야, 이 정도로 하는 편이 나 아.”

하지만 이엘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엘리는 자카리의 품에 고개를 기대면서 말을 이었다.

“왜냐하면 백작가를 파내 버리면…… 황가가 새로이 북부의 다른 가문을 포섭하려 들 테니까.”

그 말에는 자카리도 동의했다. 황가가 더 북부에 간섭하려 드는 모습을 보느니, 로렌 백작가문을 적당 히 견제하고 있는 편이 차라리 더 나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말을 덧붙였다.

“게다가 어쨌든, 네 어머니께서 태어나신 가문이잖아.”

“……”

그 말에 자카리는 잠깐 침묵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가 가라앉은 어조로 말했다.

“이엔, 넌 너무 상냥해.”

“나에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아마 너밖에 없을걸.”

이엘리는 생긋 눈웃음을 쳤다. 자카리는 대답 대신, 제 소중한 아내를 힘을 주어 끌어안았다.

15. 공작가의 여름

여름이 한창 무르익어 신록이 울창 해지는 날씨.

기온이 서늘한 북부에서도 드물게 더운 기온을 만끽할 수 있는 때. 북부에 반갑지 못한 소식이 찾아 들었다.

황제가 직접 보낸 소식이었다.

“뭐?”

정원에 화려하게 피어난 여름 장미를 감상하던 이엘리는 뜨악한 얼굴로 자카리를 돌아보았다.

“황제 폐하가 북부에 찾아오신다고?”

“……그렇다고 하더라.”

자카리의 표정도 그다지 좋진 않았다.

그녀의 곁에 성큼성큼 다가온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북부 전체를 시찰하면서 헤센바이츠 영지에도 방문한다고 하던데.”

“갑자기 웬 북부 시찰이래? 뜬금없이.”

그 말을 들은 이엘리는 질색을 했다.

자카리는 명백히 불만스러운 어조로 이엘리에게 말했다.

“뭐, 말로는 우리의 결혼식 때 참석하지 못한 게 미안하다고 하던데.”

“뭐라고?

이엘리는 기가 막힌 표정이 되어 버렸다.

황제의 뻔뻔함이 어디까지 나아가는지 모를 일이다.

“새로이 자리 잡은 공작 부부를 축 하하고, 북부와의 친목을 다지고 싶다고 하더라고.”

공작 부부를 축하하고, 북부와의 친목을 다진다…… 라. 입술에 침은 바르면서 그런 말을 하나?

“예전에 좋지 못한 일이 있었지만 이 정도에서 정리하자고 하던데……”

“아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제 폐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셔?”

“내 말이 그 말이야.”

자카리의 입가에 조소가 스쳤다. 자연스럽게 손을 뻗은 자카리가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네게도 사과하고 싶다고 하시네.”

이엘리는 잠시 멈칫했다. 자카리는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조심스럽게 질문한다.

“혹시 황제와 너 사이에 무슨 일이 라도 있었어?”

새파란 덩굴 안쪽으로 붉은 장미가 무리 지어 피었다.

그 장미를 보던 이엘리는 황제가 건넸던 장미 꽃다발을 생각하며 미간을 좁혔다.

아샤꽃가지 대신 황제가 줬던 화 려한 장미 꽃다발.

“……”

그녀는 침묵했다. 자카리는 더 물어보지 않았다.

다만 이엘리를 끌어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괜찮아, 이엔.”

“……자카리.”

“네가 원하지 않으면 황제의 제안 은 거절할 테니까.”

그는 여상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숨을 삼켰다. 황제가 화해하자며 먼저 손을 내밀었는데, 개인적인 감정으로 거절하는 건.

잠시 그를 바라보던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난 그 방문을 받아들이고 싶어.”

“……이엔.”

“나…… 너에게 돌아오기 전에.”

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를 빤히 바라보는 연녹색 시선. 새싹 같은 빛깔, 그 안쪽에 비치는 자카리의 얼굴이 잘게 떨리고 있었

다.

“황제가 내게 자신의 여자가 되라 고 한 적이 있었어.”

“……”

그 말을 들은 자카리는 잠시 침묵했다. 이엘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린다.

“물론 난 거절했지만…… 그럼에도 제도에서 나와 황제의 염문이 도는 건 어쩔 수 없었어.”

“이엔.”

“난 황제가 너무 싫어.”

그녀는 내뱉듯 말을 이었다. 자카리는 그녀를 망연히 응시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다소 거칠다.

“하지만…… 오히려 황제와의 염문을 없애기 위해서는 황제를 만나는 편이 좋을 거야.”

황제를 생각할 때마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그녀를 훑듯이 바라보던 그 시선이 너무 싫다.

“내가 황제를 대하면서 당당하게 행동해야, 제도에 퍼진 염문이 가라 앉을 테니까.”

하지만 언제까지나 피하고 있을 수 만은 없었다.

“그리고 황제가 북부를 방문한다 면, 북부의 군주가 황제를 맞아들이는 게 당연해.”

이엘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개인적인 감정으로 자카리의 발목을 잡는 것 또한 싫었다.

“그건 네 의무이자 권리이니까.”

“……하지만, 이엔.”

자카리는 안타까운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본다. 그가 그녀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며 말했다.

“내가 가진 모든 의무와 권리보다도 네가 훨씬 더 중요해.”

“자카리.”

“그러니까 난 네가 너 스스로를 가 장 중요하게 여겼으면 좋겠어.”

자카리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이엘리는 그런 그를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카리가 자신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해 주는지 알 것 같다. 그리고 이엘리 또한 자카리를 소중하게 생각했다.

“고마워. 하지만 나, 정말로 괜찮으니까……”

그러므로 이엘리는 약간 가벼워진 마음으로 그렇게 말했다. 자카리의 시선에 걱정이 서렸다.

“진심이야? 황제의 제안 따위 거절 해도 되니까……”

“아냐, 정말이야.”

이엘리는 생긋 눈웃음을 쳤다. 그녀는 자카리의 품에 고개를 기대면서 조그맣게 소곤거렸다.

“왜냐하면 네가 내 곁에 있어 줄 거잖아.”

그 말에 담겨 있는 순수한 애정에 자카리는 말문이 막혔다.

이엘리는 나긋하게 말을 이었다.

“나쁜 기억은 좋은 기억으로 덮으면 돼.”

“……이엔.”

“네가 옆에 있으니까, 분명 그럴 수 있을 거야.”

그녀의 말을 들은 자카리의 입술 위로 희미한 미소가 서렸다.

자카리가 장난스럽게 질문했다.

“지금까지 이엘리 네가, 나에게 그렇게 해 줬던 것처럼?”

그렇게 말한 자카리가 장미 꽃송이를 하나 꺾어, 이엘리의 손에 들려 주었다.

“이 장미꽃이 네게 좋은 기억이 되었으면 좋겠어.”

“……고마워.”

장미를 받아 든 이엘리는 울어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되어 버렸다.

자카리는 이엘리가 말하기 전, 황제와 그녀 사이에 번졌던 염문을 이미 알고 있었으리라. 그랬기에 이 장미를 주었겠지.

‘아마 황제가 신년 무도회에서 나를 어떻게 대했는지 이미 알고 있을 거야……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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