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8화 (118/196)

118화

“응, 살펴봐야 할 게 좀 있어서.”

“뭘 보기에…. 아.”

자카리가 이엘리의 어깨 너머로 서류를 슬쩍 살펴보았다.

잠시 후, 그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굴 양식 사업이네?”

“응. 근데 지금 이 신청자…… 좀 이상하지 않아?”

이엘리는 이름 중 하나를 가리켰다.

자카리가 살짝 이마를 구겼다. 미세한 위화감이 느껴진다.

“갑자기 공작령에 전입신고를 해서 지원을 받아 간다니, 너무 시기가 적절하잖아.”

“그래…… 그래 보이네.”

“그것만으로 의심하는 건 좀 그렇다고 생각해서, 내가 좀 더 조사해 봤는데.”

그녀는 등 뒤에서 자신을 끌어안은 자카리의 품에 몸을 기댔다.

자카리를 올려다보며 말한다.

“의심스러운 부분을 더 발견하고 말았지 뭐야."

“뭔데?”

“그게, 지원을 받으면 어떤 식으로 사업에 사용할 건지 보고서를 올리라고 했거든.”

이엘리는 펜 끝을 까닥거렸다. 자카리는 그녀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가 그대로 질문한다.

“응, 그런데?”

“어민들은 글을 잘 모르니까 행정원들을 붙여 주겠다고 제안했고, 모두 받아들였어.”

행정원들은 예산 집행이 투명하게 되는지 감시하는 한편, 어민들의 고충을 듣고 상부로 올려 보내는 위치를 가진다.

서로 상부상조하는 관계니, 어민이 행정원을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이 사람은 행정원이 도와준다는 제안을 거절하고 혼자 보고서를 올렸어.”

그 말은 뒤집어 말하자면, 행정원을 거절한다는 것 자체가 어딘가 외 부에 드러나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다는 뜻이다.

이엘리가 미간을 좁혔다. 그녀는 펜으로 보고서를 톡톡 두드려 보였다.

“그래서 그 사람이 보낸 보고서를 읽어 봤거든?”

“그런데?”

“너무 깔끔해.”

그게 이엘리가 느끼는 위화감의 이유였다.

너무 흠잡을 곳이 없다. 자카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일개 어민이 썼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깔끔하다는 뜻이야.”

이엘리는 미간을 좁히며 대답했다. 자카리의 눈에 의아함이 스쳤다.

이엘리는 말을 덧붙였다.

“마치…… 누군가가 대필이라도 해 준 것처럼.”

자카리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이엘리는 그의 몸에 툭 고개를 기댔 다. 그대로 말을 잇는다.

“물론 이것만 보면 심증만 있을 뿐 확증은 없지. 그래서 따로 조사를 시켰는데……”

말꼬리를 흐리던 이엘리는 이윽고, 사납게 웃었다. 이엘리는 자카리를 향해 나긋하게 말했다.

“……글쎄, 로렌 백작가가 연관되 어있지 뭐야?”

자카리의 눈빛이 대번에 싸늘해졌다.

마치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로 되묻는다.

"로렌 백작가문이?”

“응. 위장 전입신고를 한 거야. 당연히 저 양식 사업에서 한몫 챙겨 보려는 속셈이겠지.”

“하아……”

어째서 내 외가는 항상 이딴 식인가. 그의 얼굴에 시름이 깊어졌다. 그녀는 냉정하게 말했다.

“아마 로렌 백작도 함께 가담했을 거라고 봐. 서류를 대신 꾸며 준다 거나 하는 형식으로.”

“그럴 확률이 높겠지. 백작 부인 혼자서 서류 자체를 꾸미는 건 어려웠을 테니까.”

"뭐, 백작은 지금 제도에 있으니까 실질적인 일들은 백작 부인이 했겠지만.”

이엘리는 곰곰이 생각에 빠진 얼굴이었다.

잠시 머리를 굴리던 이엘리가 다시 입술을 열었다.

“응, 그런 문제도 있거니와…… 게다가 사람도 구해야 하잖아?”

“전입신고가 끝났을 때, 백작가문을 대리하여 공작령에 들어올 사람을 말하는 거지?”

“응, 바로 그거야.”

이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카리는 이제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녀는 아차 하는 표정을 했다.

로렌 백작가문은 어쨌거나 자카리와 피가 이어졌지 않나.

“그런데 자카리, 괜찮아?”

“뭐가?”

“그래도 네 외가 친척들이잖아.”

이엘리는 약간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카리에게 말했다.

하지만 자카리는 대번 고개를 저었다.

“난 괜찮아.”

“정말?”

“물론이지, 어차피 내 가족은 너뿐 이니까.”

자카리는 부드럽게 웃었고, 이엘리는 말문이 막혔다.

자신을 향한 저 애정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 알아서였다.

자카리는 그녀의 입술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성적인 함의가 담긴 키스가 아니라, 그저 온기를 나누는 키스였다. 호흡과 호흡이 뒤섞이는 가운데 뭉그러진 음성이 들렸다.

“이엔. 난 너만 있으면 돼.”

그 말이 진심임을 알아 이엘리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녀는 자카리의 뺨을 살짝 어루만졌다.

 북부의 사교계는 점차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지금껏 예술이 남자 위주로 돌아갔던 것을 비판하고, 여성 예술가들을 주로 후원하게 된 것이다.

귀부인들은 ‘사회 전반에 나서는 건 남자가 하는 일이다’라는 편견에서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엘리로서는 고무적인 일이었다.

“공작 부인께서 여성 작가들을 후 원하신다고 하더라고요.”

“그러게요. 여성 작가들이라니... 독특하시네요.”

“그래도 신선하지 않나요? 전 괜찮다고 생각해요.”

이엘리가 여성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것은, 후에 여성 예술가들이 예술계에 직접 발을 디딜 수 있는 발 판이 되었다.

처음에는 북부에서 시작된 일이었 지만, 이엘리의 기금을 받은 재능 있는 여성 작가들이 예술 도시 에폴 리에 있는 아카데미에 입학하면서 점점 제도에도 소문이 퍼졌다.

“북부에서는 요새 새로운 살롱이 유행한다고 하던데요.”

“공작 부인께서 직접 유행시켰다죠?”

“여성 예술가들을 직접 발굴하여 지원하고, 귀부인 스스로도 작품 활동을 한다던데요.”

“신선하네요. 지금까지 리펜에서는 그런 살롱이 존재하지 않았잖아요?”

하지만 그것에 불만을 가지는 사람들도 분명 존재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로렌 백작 부인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백작 부인은 테이블에 쌓여 있는 서류를 밀어내며 잔뜩 신경질을 냈다.

와장창, 잉크병이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백작 부인은 눈에 불을 켠 채, 분에 차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고작 남부의 촌뜨기 계집애가 공작 부인 입네 행세하는 것도 분한데, 뭐?”

하녀들은 그저 오들오들 떨 뿐, 차마 잔뜩 성을 내는 안주인에게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했다.

“그 계집애의 살롱에 내 살롱이 밀리다니!”

그사이 백작 부인 앞으로 온 편지가 한 통 있었다. 게다가 발신자도 백작 부인이 거절할 수 없는 거물이었다.

결국 하녀 중 한 명이, 없는 용기 까지 쥐어짜 내어 백작 부인에게 말을 걸었다.

“저, 마님.”

“무슨 일이야!”

백작 부인은 쌔근쌔근 숨을 몰아쉬며 하녀를 홱 돌아보았다.

목소리가 절로 날카롭게 나온다.

“편지가 도착했습니다만……”

“쓸데없는 편지는 다 태워 버려, 무슨……!”

“그게…… 헤센바이츠 공작 부인께 서 보내오신 편지라서.”

쭈뻣대던 하녀가 대답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대에 부인은 두 눈동자를 커다랗게 치켜떴다.

“뭐라고?”

이건 도대체 뭐지?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성큼성큼 걸어간 부인이 편지를 낚아채 펼쳤다.

‘친애하는 로렌 백작 부인.’

친애하는? 두 사람은 좋은 말로도 ‘친애하는’ 이라는 수식어로 서로를 칭할 관계가 아니었다.

‘백작 부인과 제가 따로 만나 대화 해야 할 일이 생긴 것 같아, 이렇게 서신을 부칩니다.’

그 생각은 이엘리도 백작 부인과 동일한 듯했다.

‘내일 당장 공작성으로 오시겠어요?’

백작 부인은 두 눈을 부릅떴다. 비록 부드러운 말투로 쓰여 있었지만 이건 명백한 협박이었다.

‘참고로 빠른 시일 내에 공작성에 오시지 않으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생기실지도 몰라요.’

설마……? 백작 부인은 뱃속이 뒤틀리는 기분을 느꼈다. 걸리는 일이 하나 있었던 것이다.

헤센바이츠에서 어민들을 지원하기 위해 진행한 굴 양식 사업. 보자마자 알았다.

그 사업이 얼마나 큰 이득을 얻을 수 있는지.

그런 먹음직스러운 사업에 어떻게 든 끼어들지 않는 게 바보다.

‘아니야, 그건 아닐 거야.’

백작 부인은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위장으로 전입신고를 하긴 했지만, 공사다망하신 공작 부인께서 고작 어민들 하나하나를 살필 리 없었다.

하지만 날카로운 불안감이 뱃속을 긁는다.

‘그럼 최대한 빠른 방문 기다리겠습니다. 이엘리 헤센바이츠.’

우아한 글씨체로 쓰여 있는 ‘이엘리 헤센바이츠’라는 서명을 보며 백작 부인은 입술을 물었다.

이튿날. 백작 부인은 아침 일찍부터 공작성에 방문했다.

이엘리는 백작 부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용한 응접실 안, 두 여자는 나란히 마주 앉았다.

이엘리는 나긋한 어조로 입술을 열었다.

“이전에도 몇 번이나 예산 책정에 실수하는 모습을 보이셨죠.”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때도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계속 우기시기에, 그저 실수라고 받아들여 드렸지만요.”

이엘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백작 부인은 마른침을 삼켰다.

백작 부인의 시선이 테이블 위를 헤떴다. 다과와 차, 그리고 두꺼운 서류들이 놓여 있었다.

표지에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서류 또한 보였다.

‘저 서류는 도대체 뭐지?’

백작 부인은 뱃속부터 들끓어 오르는 불안감을 느꼈다.

뭔가 불길했다. 신경을 건드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이엘리의 목소리가 깊게 가라앉았다. 이엘리는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백작 부인을 마주 보았다.

“감히 헤센바이츠의 공작령 내에서도 이런 식으로 행동하실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네요.”

실은 어떻게든 발을 걸칠 것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쉽게 걸릴 정도로 허술하게 행동할 줄은 몰랐 지.

이엘리는 쌩긋 눈웃음을 쳤다. 찻잔을 들어 입술을 축인 이엘리는 말을 이었다.

“굴 양식 사업의 지원은 소규모 어민들의 자립을 위해 지원하는 거죠.”

“공작 부인, 그것이……”

“백작 부인께서도 잘 알고 계시리 라 믿었는데요.”

이엘리는 칼처럼 단호한 어조로 말을 맺었다.

꽃잎 같은 입술 위로 비뚜름한 미 소가 걸렸다.

“양식 사업이 잘되는 것 같으니까 어떻게든 끼고 싶으셨나요?”

“저, 저는 그런 적 없습니다!”

백작 부인은 우선 발뺌을 해 보았다. 그런 그녀를 한심하게 바라보던

이엘리가 곧장 대답했다.

“설마 제가 증거 하나 없이 백작 부인을 이곳에 불렀으려고요.”

“……네?”

백작 부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엘리는 턱짓으로 테이블 위를 까닥 가리켰다.

이엘리가 가리킨 것은, 아까 전부 터 자꾸만 신경을 건드리던 바로 그 서류들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아니라고 하실 것 같아서 증거부터 미리 모아 뒀지요.”

거짓말! 백작 부인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이엘리는 도망칠 곳을 미리 차단해 뒀다.

“참고로, 백작가에서 위장 전입신고를 해 둔 작자에게 증언도 이미 받아 뒀답니다.”

“고, 공작 부인……!”

“아무리 부유함이 좋다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나요?”

이엘리의 차분한 목소리에는 온기 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녀가 한숨을 섞어서 말을 이었다.

“백작 부인께서 평민들을 그토록 무시하는 모습을 몇 번이나 봤는 데.”

이엘리는 생긋 눈웃음쳤다. 백작 부인이 살롱에서 제멋대로 떠들던 모습을 꼬집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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