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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화 (117/196)

117화

“맞아요, 심지어 여성 예술가들을 지원해 주기도 하신다고 하더라고요.”

나이가 많고 보수적인 귀부인들은 살짝 흰 눈을 뜨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귀부인들은 이엘리의 살롱에 호의적이었고, 무엇보다도 젊은 귀부인들에게는 폭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번에는 여성 바이올리니스트를 초청한다면서요?”

“맞아요. 이름이 아마…… 안나라고 하던데요.”

그렇게 말한 귀부인은 미간을 살짝 좁혔다.

다른 귀부인이 입을 가리며 눈을 동그랗게 뜬다.

“설마 평민인가요?”

“그렇다고 들었어요. 게다가 처음으로 돈을 받고 개인 바이올린 연주회를 열었다고……”

보수적인 귀족 사회에서 남성도 아닌 여성 평민 예술가를, 그것도 귀부인의 살롱에 들이다니.

“솔직히 지나치게 파격적인 행보 아닌가요?”

그때 로렌 백작 부인이 대화에 끼어 들었다.

귀부인들은 움찔 어깨를 굳히며 백작 부인을 본다.

“여성이 연주회장을 대관하여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는 것 자체가 천박 한데."

“저, 로렌 백작 부인.”

“감히 그런 천박한 짓에 돈까지 받으려 들어요? 정말 주제넘지, 평민인 주제에!”

백작 부인이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저 정도로 화를 낼 일은 아닌 것 같은데.

귀부인들은 눈동자를 굴렸다. 하지만 분위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로렌 백작 부인은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게다가 그런 천박한 여자를 무려 제국 유일의 공작 부인의 살롱에 들이다니요.”

노골적인 언사에 오히려 귀부인들이 어쩔 줄 몰라했다.

귀부인들은 주변을 살피며 대답했다.

“그…… 백작 부인, 말씀이 좀 심 하세요.”

“뭐가 심한가요? 전 사실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로렌 백작 부인은 득의양양한 얼굴을 했다.

바로 그때, 등 뒤에서 자박이는 발소리가 들렸다.

“백작 부인께서는 제 살롱에 항상 큰 불만을 갖고 계신 것 같군요.”

이엘리였다. 백작 부인은 입술을 당겨 물었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이엘리가 쌩긋 웃었다.

“그런데 어째서 제 살롱에 매번 출석하시는 것인지, 그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지만.”

“불만이 아니예요, 이건 정당한 비판입니다!”

“스스로에게 정당한 비판이라 한들, 남에게도 정당할 거라는 생각은 버리셔야지요.”

이엘리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만하게 고개를 들어 올리며 백작 부인을 본다.

“무엇보다도 여긴 제 살롱이랍니다, 백작 부인.”

“……”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당장 나가 셔도 괜찮아요. 저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답니다.”

백작 부인은 분한 얼굴을 했다. 이엘리의 살롱은 명실상부 북부 최고의 살롱이었다.

이 자리에서 퇴출되면 앞으로 사교 활동은 거의 포기해야 한다. 칼자루를 쥔 그녀가 느긋하게 말했다.

“그리고 백작 부인의 불만에 제가 직접 답변해드리자면……”

이엘리의 말에 백작 부인이 어깨를 굳혔다.

백작 부인을 빤히 바라보던 이엘리는 말을 이었다.

“어째서 돈을 받고 연주회를 열었 다는 사실이 천박하게 받아들여지는지 모르겠네요.”

백작 부인은 입술을 당겨 물었다. 어찌나 세게 깨물었는지 피가 돌지 않아 희게 질릴 정도였다.

“이 사회는 백작 부인 같은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 아주 흔하죠. 그녀는 그런 사람들을 설득하여 연주회를 열었고, 관객까지 끌어들였어요. 그런 편견을 딛고 연주회에 참석하는 관객이요.”

이엘리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백작 부인은 어떻게든 항변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사회의 편견을 몸소 깨는 일인데,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모르시겠어요?”

“하지만 돈을 받고 연주하는 거잖아요, 품위 있는 여성은 그렇지 않아요!”

“백작 부인. 부인께서 도대체 어떤 권리를 갖고 계시기에 그런 판단을 내리시나요?”

정말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것처럼 이엘리가 그렇게 되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부인께서는 품위 있는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을 구분하는 기준이 참 단순하시네요.”

“공작 부인, 단순한 게 아니예요. 보편적인 기준을 따르는 거죠!”

“제 눈에는 사회의 인습에 따르느냐 그러지 않느냐, 이것만이 그 기준이 되는 것 같은데요.”

이엘리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긴 속눈썹을 깜빡이며 이엘리가 나긋하게 입을 연다.

“보편적인 기준을 무조건 옳다고 할 수는 없어요. 잘못된 것은 개선 되어야 하고요.”

“공작 부인, 부인께서 평민들을 오냐오냐 하시며 지 원하시니까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겁니다!”

“부인이야말로 뭘 모르시네요. 평민들이 없으면 이 제국은 존재할 수 조차 없어요."

냉랭한 말이었다. 이엘리는 삐딱한 시선으로 백작 부인을 응시했다.

이엘리는 단호하게 말한다.

“백작 부인께서 다소 닫힌 사고방식을 갖고 계신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나요?”

닫힌 사고방식이라고 완곡하게 돌려 말하긴 했지만, 귀부인들의 우아한 대화를 고려해 보자면 충분히 공격적인 언사였다.

그 말을 들은 백작 부인의 얼굴이 파래졌다가 새빨갛게 붉어졌다.

“그리고 아까 돈을 받는다는 것에 대해 불만이 있으신 것 같아 말씀드립니다만.”

하지만 이엘리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지만, 그 목소리는 서슬이 퍼렇다.

“돈을 받는 행위는 자신의 연주가 가치가 있다는 것을 금전으로 증명하는 거라고 봐요.”

“여자가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는 것 자체가 문제인데, 어떻게 여자가 감히 돈을 받나요?”

“자신의 재능과 노력을 아무 대가 없이 보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이기적인 발상 아닌가요?”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이엘리가 되물었다. 백작 부인을 말문이 막혔다. 이엘리는 다시 말했다.

“그것을 왜 나쁘게 생각하시는 건 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네요.”

“하, 하지만……!”

“뭐, 그렇다 한들 백작 부인께 저의 생각을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건 진심이었다. 뭐 하러 입 아프 게 저 꽉 막힌 백작 부인을 상대한단 말인가.

굳이 백작 부인을 설득하지 않아도 이엘리는 상관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없는 편이 이엘리에게는 나았다.

“그러니 제 생각에 동의하지 못하신다면……”

이엘리가 우아한 동작으로 부채를 들어 올렸다. 방문을 가리킨 그녀가 눈을 접으며 선언했다.

“나가시면 됩니다.”

깔끔하게 말을 맺은 이엘리는 상큼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이 싸움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한 사람은 백작 부인이 아닌 이엘리였다.

결국 백작 부인은 무겁게 고개를 떨어뜨려야 했다.

지금까지 여성은 감상하는 쪽이지, 직접 창작하는 쪽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엘리의 말을 듣고, 귀부 인들은 신선한 충격을 느꼈다.

게다가 이엘리는 살롱에 출입하는 사람들에게 확실한 방패가 되어 주었다.

제국 유일의 공작 부인이 그녀들의 편이다. 귀부인들은 그것에 안도를 느꼈다.

“감히 누가 공작 부인에게 이의를 제기하겠어요.”

“맞아요.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 중 하나이신데요.”

더불어 아샤차는 이제 공작 부인 과의 친분을 증명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공작 부인은 자신과 특별히 친밀한 가문들에 한해 아샤차를 공급해 주 곤했다.

손님들을 대접하며 아샤차를 내놓는 건 귀족가의 새 유행이 됐다.

귀부인들은 너도나도 아샤 차를 얻기 위해 눈에 불을 켰다.

“어머나, 이 차는……”

“아시는군요. 아샤 차랍니다. 공작 부인께서 직접 보내 주신 거예요.”

귀족가에서 이런 대화들이 들려오는 건 흔한 일이었다.

여성 예술가에 대한 인식도 나아졌다.

“이번에 공작 부인께서 새로운 예술가를 찾아내어 후원하신다고 하던 데요.”

“아, 들었어요. 이번엔 조각가라고 하던가요?”

“맞아요. 이전에 후원하셨던 안나 양은 에폴리의 아카데미에 입학한다고 들었어요."

이엘리는 살롱을 중심으로 여성 예술가들을 후원하기 시작했다.

그 후원을 보며 흰 눈을 뜨고 바라보는 사람도 물론 있었다.

특히 남성 귀족들이 반발했는데, 그건 자카리가 알아서 막았다.

“내 아내가 진행하는 일이야.”

“하지만, 각하!”

“이 일이 그대들에게 단 하나의 피해라도 줬나?”

새파란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은 채 사람들을 노려본다. 귀족들은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그, 그것은 아니지만……”

“그렇다면 아무 문제도 없지 않나”

자카리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귀족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자카리가 비딱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그대들이 내 아내에게 있어 뭐라고 참견하려 하는 거지?”

자카리의 서슬 퍼런 시선을 마주하며 귀족들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 건 물론이었다.

자카리의 비호 아래 이엘리는 마음껏 원하는 바를 이루어 나갔다.

이엘리가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것에 감화된 귀부인들 또한 하나둘 그녀를 따랐다.

그러던 중, 이엘리가 자카리를 찾아갔다.

“나, 능력 있는 여성 예술가들을 한정하여 지원할 수 있도록 기금을 만들고 싶은데.”

“기금?”

“응, 교육을 받게 해 준다거나, 혹은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으면 도와 준다거나……”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자금이 없으면 재능은 스러지고 만다.

그나마 남성 예술가들은 귀족들의 지원을 포함하여 여러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지만, 여성 예술 가들은 그게 어려웠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재능이 묻혀야 한다니, 그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말하던 이엘리는 문득 멈칫했다.

공작가의 예산을 너무 많이 끌어다 쓰는 거 아니야?

“음, 내 내탕금을 사용할 테니까 그건 걱정하지 말고……”

“왜 너의 내탕금을 사용해야 하는 데? 내탕금 외에, 공작가에서 안주인에게 사용하라고 따로 배정해 둔

예산도 있잖아.”

“하지만 내가 운영하는 살롱은 개인적인 거잖아. 그런 것에 예산을 사용하는 건……”

“이엔.”

자카리가 그녀의 귓바퀴에 쪽 키스했다. 그녀의 귓속으로 달콤한 목소리가 쏟아져 들어온다.

“넌 공작가의 안주인이고, 공작가의 예산은 모조리 네 거야.”

“하지만……”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해도 돼.”

자카리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의 품에 안긴 채, 이엘리는 눈을 깜빡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음…… 하지만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하는 거잖아?”

“헤센바이츠의 안주인이 사용하는 건데, 그게 어떻게 개인적인 용도 야?”

오히려 의아하게 물어 온 자카리가 이를 세워 그녀의 목덜미를 가볍게 깨물었다.

이엘리는 진저리를 쳤다. 잘근잘근 닿는 이의 감촉에 기분 좋은 소름이 돋는다.

그는 나른하게 속삭였다.

“내 아내를 침대에서 독점하는 것 정도는 하게 해 주겠지?”

“……안 된다고 해도 할 거잖아?”

“역시 나의 이엔이야. 날 너무 잘 알아서 두려울 정도인데?”

그렇게 말한 자카리가 그녀를 부드럽게 침대에 눕혔다.

이엘리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늦은 새벽, 조도를 낮춰 둔 등이 옅은 주홍색 빛을 흩뿌렸다.

이엘리는 굴 양식 사업 관련 서류를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있었다.

무언가 문제가 있는지, 하얀 미간을 살포시 찌푸린 채였다.

“……이엔, 자지 않고 뭐해?”

“아, 자카리.”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남편을 돌아보았다.

자카리가 등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았다.

“이런 늦은 시간에 일하고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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